최고의 데뷔, 10년의 공백, 그리고 <1987>&hellip;장준환 감독의 이모저모

<1987>의 제작 발표 당시, ‘장준환’이란 이름을 발견한 이들 가운데 몇명은 분명 의아해했을 것이다. B급 장르영화로 분류할 수 있는 <지구를 지켜라!>와 범죄영화의 탈을 쓴 성장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의 장준환 감독이 1987년 6월 민주 항쟁을? 그 의구심은 영화가 공개된 이후 뒤집어졌다. 사람 간의 믿음으로 전해지는 변화의 불씨를 그린 <1987>은 김경찬 작가의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장준환 감독의 영민한 연출이 견인하고 있었다. 기발한 상상력을 주무기로 평가 받던 그는 왜 <1987>이란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게 됐을까?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외계인을 잡는 청년의 블랙코미디였고, 복귀작은 킬러들 품에서 자란 소년의 스릴러였다. 차기작은 6월 항쟁을 담았다. 장르도, 소재도, 작품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도 생판 다르다. 하지만 세 작품을 관통하는, 장준환 감독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권위에 대항할 것.’
 

<지구를 지켜라!>는 병구(신하균)가 외계인이라고 추정되는 강 사장(백윤식)을 납치, 고문하는 과정을 그린다. 병구가 강 사장을 고문하면서 외계인임을 자백하라는 광경은 <1987>에서 목격할 수 있는, 학생을 고문하며 억지 자백을 받아내는 남영동의 풍경과 얼핏 유사해 보인다. 그런데 사실 고문의 맥락은 정반대다. <1987>에서는 군부 독재의 ‘지배층’이 민주화를 원하는 약자인 학생을 고문하는 것이라면 <지구를 지켜라!>는 ‘지배층’인 강사장이 약자인 공장 노동자 병구에게 고문을 당한다. 심지어 병구는 구사대(노조와 대립하는, 사측에서 만든 비조합원 단체)에게 여자친구가 폭행당해 죽었다. 때문에 병구는 노동계층의 상징이며 그의 고문은 자본계층을 향한 복수로 읽을 수 있다. 장준환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과거 역사의 전복을 꿈꾸고 있었던 것 같다.
 

<화이>는 <타짜>, <추격자>, <도둑들>로 가족애라고 찾아보기 힘든 폭력적 아저씨 이미지가 강했던 김윤석에게 아예 ‘아버지’란 칭호를 부여한다. 김윤석이 연기한 석태(김윤석)와 그의 동료는 모두 킬러이자 범죄자다. 그들은 소년 화이(여진구)를 킬러로 길렀다. 석태를 제외한 다른 네 명의 ‘아빠’는 화이와 나름의 방법으로 교감을 하지만 ‘아버지’ 석태(김윤석)는 다르다. 그는 화이를 살인에 가담시켜 완전한 범죄자로 만들려 한다. 강압적인 태도로 자신과 똑같은 삶을 강요하는 석태, 그에 대한 화이의 저항은 아버지란 이름에 내포된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것과 같다.

전작들을 이런 시선으로 해석하고 <1987>을 바라보면 장준환 감독이 그간 품었던 ‘꿈’을 비로소 풀어놨다는 느낌마저 든다. <지구를 지켜라!>나 <화이>는 픽션이지만 6월 민주 항쟁은 권력의 폭력에도 굴하지 않은 이들의 실화이지 않은가. 그것도 병구나 화이처럼 개인이 아닌, 최소 100만 명 이상의 민중들이 참여했던 운동이었다. 장준환 감독이 <1987>을 기획하게 된 것도, 정권 교체로 외압 걱정 없이 6월 민주 항쟁 30주년에 개봉한 것도 운명인지도 모른다.
 

<지구를 지켜라!>는 어마무시한 호평을 받았다. “2000년대 가장 인상적인 한국 영화감독 데뷔작”(이동진 평론가) “한국 영화 사상 가장 기발하고, 엽기적인 데뷔작”(김봉석 평론가)이란 말처럼 SF와 스릴러, 코미디를 뒤섞어 한국 사회에 녹인 대담한 영화였다. 호평과 수상이 이어졌지만 흥행에 실패하면서 장준환 감독은 장장 10년이나 차기작을 준비하게 됐다.
 

사실 그가 처음부터 <화이>를 위해 10년 동안 쉬었던 건 아니다. 그가 기획한 차기작은 <인어공주>. 자그마치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아틀란티스 대륙의 공주였던 인어가 부산 기장 앞바다에 시체로 떠오르고 그걸 추적하는 내용이었다고. 문제는 ‘저예산’에 적합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에 ‘고예산’이라고 할 수 있는 인어를 구현해야 했으니 더 진행하지 못하고 잠정 중단에 들어갔다.
 
그다음 프로젝트는 ‘씨네21’에서 심층 인터뷰까지 진행했던 <파트맨>. ‘지독한 냄새가 나는 방귀를 뀌는 히어로’가 주인공이다. 데뷔작으로 기획했다가 잠시 미뤄뒀지만, “자꾸 마음이 콩밭에 가서 다른 작업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한 ‘숙원’이었다. 하지만 결국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아마도 <지구를 지켜라!>처럼 국내 관객들의 취향과 워낙 멀리 떨어진 영화라 그런 듯하다.

장준환 감독의 미완 프로젝트는 또 있다. 2007년 장준환 감독은 <타짜 2> 프로젝트의 수장으로 발탁됐다. <1987> 발표 때처럼 “장준환 감독이 타짜를?”이란 반응이 적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구상에 들어갔다며 빠르면 2008년 촬영이 들어갈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타짜> 시리즈 영화화 판권을 가진 회사가 내부 사정으로 개편에 들어가면서 <타짜 2> 프로젝트도 중단됐고, 장준환 감독은 하차했다. 이후 2014년이 돼서야 강형철 감독의 속편이 개봉했다.
 

장준환 감독은 돌고 돌아 2012년 <화이> 제작을 발표했다. 차기작이 나오지 않아 ‘소포모어 징크스’란 말로도 수식할 수 없었던 장준환 감독은 2013년 <화이>로 10년 만에 돌아왔다. 여진구, 김윤석, 조진웅, 장현성, 김성균, 박해준 등의 배우들로 범죄극을 만들 것이란 예상과 달리 ‘괴물’이란 환상을 이용해 뒤틀린 성장영화를 만들었다. 청소년 관람불가라는 핸디캡에도 240만 관객을 돌파,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을 터뜨려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장준환 감독은 <화이>에 이어 <1987>까지 김윤석을 기용했다. 그것도 둘 다 권력의 상징이자 영화의 악역으로. 석태는 화이를 어떻게든 범죄에 손대게 하려는 킬러이고, 박 처장은 민주화 인사와 학생들에게 고문으로 위조 자백을 강요하는 대공수사처의 수장이다. 박 처장 역을 제안받았을 때 “또 나한테 이런 역할을 주는구나 싶었다”는 김윤석은 실존 인물과 유사하게 보이기 위해 마우스피스를 끼고 이마 라인을 바꾸고 이북 사투리를 익혔다.

장준환 감독도 김윤석이란 배우를 위해 크게 누울 자리를 마련해준다. 민주화 투쟁의 불씨가 점점 확산되는 구조의 <1987>에서 그 중심에는 마침내 응징돼야 하는 악역 박 처장이 존재하게끔 준비했다. 뿐만 아니라 단순히 ‘출세욕’이나 ‘권력’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그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피해자였던 박 처장이 ‘빨갱이’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명분까지 제시해 보다 입체적인 ‘악’의 얼굴을 보장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진 배우도 있다. <지구를 지켜라!>의 순이, 황정민이다. <지구를 지켜라!>에서 병구만을 믿고 따르는 순이였던 그는 <1987>의 신발 가게 사장으로 등장한다. 5분도 채 되지 않는 출연임에도 실제 이한열 열사와 <1987>을 이어주는 매개체인 신발이 바로 그의 손에서 전해진다. 전작 <화이>의 여진구도 특별출연으로 두 번째 연을 맺었다. 마침내 자신만의 길을 찾았던 화이가 그 유명한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박종철 열사로 분한 것도 기묘하게 이어진다.
 

<지구를 지켜라!>와 <화이> 중간에 단편 <털>과 옴니버스 영화 <카멜리아>의 단편 ‘러브 포 세일’(Love for Sale)도 작업했지만, 장편 차기작이 계속 연기돼 10년을 ‘강제 휴식’한 장준환 감독. 이 때문에 2012년엔 <장준환을 기다리며>란 단편 영화도 공개됐다. 배우 류덕환이 연출을 맡고 오정세가 출연했다. 물론 장준환 감독 역시 특별출연으로 이 단편에 보답했다.
 

<1987>의 강동원과 박희순도 장준환 감독과 작업한 바 있다. 강동원은 <카멜리아>의 ‘러브 포 세일’에 출연했는데, 장준환 감독은 당시 “<전우치> 촬영 후 시간이 남는다 해서 한 번 찔러나 보자는 마음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 인연으로 <1987> 시나리오를 비밀리에 보여줄 수 있었다고. 박희순은 1994년 <2001 이매진>으로 만난 이후 지금까지도 무척 절친한 사이라고. 박희순은 “(장준환 감독이 <1987>의 조 반장 역을 제의했을 때) 나도  역사에 힘을 싣는 소시민 역을 달라 했으나 안 먹혔다”고 말하기도 했다.
 

<1987>은 한국 상업 영화 최초로 명동 성당 내부를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이전작들에서도 읽을 수 있듯 장준환 감독 본인은 무교다. 다만 무신론자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2006년 배우 문소리와 결혼했다. <지구를 지켜라!> 회식 때 신하균이 문소리를 초대한 게 첫 만남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차기작이 계속 미뤄지면서 나중에는 ‘문소리 남편’으로 더 유명(?)해졌다. 2016년 문소리가 연출한 <여배우는 오늘도>에서 남편 역으로 출연해 문소리에게서 “열의는 좋았다”며 연기점수 70점으로 평가받았다. 문소리는 <1987>에 특별출연해 엔딩의 시위 장면에서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고, 촬영 현장에서 젊은 배우들에게 직접 구호나 박수 등을 알려줬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봉준호 감독과 동기다. 봉준호 감독의 초기 단편 <지리멸렬>의 조명감독이다. 과거 인터뷰 중 “봉준호의 영화를 보면 상당히 사회적으로 풀어낸다. 재밌게. 나는 반대로 안으로 파고드는 스타일인 것 같다. 비슷한 얘기를 나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라고 비교했다.
 

<1987>에서 연희(김태리)에는 장준환 감독 자신의 경험이 반영돼있다. 연희가 동아리 모임에 갔다가 광주 민주화 운동 비디오를 보게 된 것도 장준환 감독이 성당에서 해당 비디오를 본 걸 반영했다. 또 과거 대학생 시절 장준환 감독은 “(학생운동보다는) 실존적이고 철학적인 개인 고민들이 많았다”고 회상하는 것도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요?”라는 대사로 대변되는 연희의 태도와 비슷하다.
 

<1987> 언론시사회 후 기자간담회에서 눈물을 쏟았다. 이때 처음으로 배우들과 함께 완성본을 봤는데, 상영이 끝난 이후 대기실에서 박희순이 우는 걸 보니 마음이 약해져 기자간담회 도중 운 것이라고 이후 인터뷰에서 털어놨다.
 

장준환 감독은 유재하의 ‘지난날’이 6월 항쟁 이후 발매된 곡인 걸 알고도 유재하의 음악을 좋아해서 영화에 쓰기로 결정했다.
 

아직 차기작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다만 “하고 싶은 건 있는데 돈이 많이 드는 마이너 취향 영화”라는 언급은 끝내 제작하지 못했던 미완 프로젝트 <인어공주>나 <파트맨>을 떠올리게 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