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개봉한 <룩백>(2024)의 흥행세가 심상찮다. 유명한 프로덕션도, 연재물의 극장판도, 유명 감독도 아닌 <룩백>은 오로지 입소문만으로 <베테랑2>(2024) 다음으로 흥행하고 있는 영화로, 감독은 오시야마 키요타카다. 그는 신예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아마도 국내에서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신카이 마코토, 호소다 마모루의 뒤를 이을 보석 같은 신예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점차 등장하고 있는 요즘, <룩백>의 흥행은 눈여겨볼 만한 소식이다. 오늘은 <룩백>을 포함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를 이어 받을 새로운 애니메이션 감독들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준비해보았다.
<룩백> - 오시야마 키요타카

<룩백>은 <체인소 맨>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동명 단편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으로, 연재물 극장판이 아닌 오리지널 독립 애니메이션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흥행한 경우는 많지만, <주술회전> 시리즈처럼 연재물의 극장판이거나 ‘지브리’ 같은 네임드 제작사의 영화였다. 작품도, 프로덕션도, 감독도 인지도가 없는 상황 속에서 57분짜리 독립 애니메이션이 흥행하는 건 일본에서조차 드문 성과다. <룩백>은 만화로 연결되었던 두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만화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초등학교 4학년 후지노(카와이 유미)가 동급생인 쿄모토(요시다 미즈키)가 그린 만화를 보고 압도적인 실력차를 느낀다. 후지노는 열등감을 느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히키코모리였던 쿄모토는 후지노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그의 열성팬임을 있는 힘껏 고백한다. 그렇게 절친이 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영향력을 조금씩 주고받는데, 만화를 포기하려 했던 후지노에게 쿄모토는 만화를 그리는 동기를, 세상이 무서웠던 쿄모토에게 후지노는 세상 밖으로 이끌어주는 존재였다. 작품은 두 사람밖에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원작은 만화적 여백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표현했는데, 워낙 연출이 뛰어나 ‘영상화가 제대로 될 수 있을까’라는 우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개봉 직후, 원작의 감동을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애니메이션이 보여줄 수 있는 라이브함까지 담아냈다는 평이 주요하다. 오시야마 감독은 감독들 사이에서도 유연하고 뛰어난 작화로 유명한데, 특히 어떤 그림체든 다 소화해내는 폭넓은 작화 스타일이 특징이다. 원작의 고유함은 유지한 채, 애니메이션이 본래 갖고 있는 역동성을 강조해 마치 그림이 살아있는 것처럼 연출하는 게 그의 시그니처. 2004년 <창궁의 파프너>로 애니메이션 업계에 데뷔한 그는 <강철의 연금술사: 샴발라를 정복하는 자>(2005)부터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2),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 등 굵직한 작품의 원화를 맡아왔다. <룩백>에서도 그의 애니메이션에 대한 진심과 연출 실력이 드러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영화의 도입부, 한밤중에 책상 앞에서 4컷 만화를 고심하고 있는 후지노의 뒷모습이다. 롱테이크로 후지노가 만화에 몰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머리를 긁적이거나 지우개로 지우는 등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에선 결코 나올 수 없는 행동들을 남겨두어 후지노의 성격을 드러냈다. 만약 이 장면이 인트로에 배치되지 않았다면, 아마 그의 자신만만한 성격을 처음 접했을 때 ‘조금 재수 없는 애’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객에게 가장 먼저 후지노의 창작을 향한 열정과 묵묵한 시간을 보여주어 오해 없이 원작의 감동을 전달한다.

여담으로, <룩백>을 자세히 보면 선이 미묘하게 흔들리거나 제대로 겹쳐지지 않는 등 ‘손으로’ 그린 느낌이 물씬 나는데, 감독이 의도적으로 표현한 연출이라고. AI로도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시대에서, 그는 “원화를 그린 사람이 ‘이 그림으로 정말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잡음'으로 제거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하며 원화의 뉘앙스를 최대한 그대로 남기기 위해 이와 같이 연출했다고 밝혔다.
<표류단지> - 이시다 히로야스

이시다 히로야스는 <펭귄 하이웨이>(2018)로 장편 극장 애니메이션 데뷔를 하고, 그 이후 오리지널 장편 작품 <표류단지>(2022)를 선보였다. 두 작품 모두 초등학생이 주인공인데, “그 나이가 가장 즐거웠기 때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곧 어린이를 위한 애니메이션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는 <펭귄 하이웨이> 개봉 당시 인터뷰에서 “어른들이 공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부분도 있다. 저와 같은 세대 혹은 그 이상, 예를 들어 어린 자녀를 둔 아버지 세대가 공감할 법한 말투 혹은 소년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 연령대 관객에게 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깊이 있는 스토리텔링보다는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에 보다 특화된 감독인데, 특히 캐릭터의 ‘질주’ 장면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본인은 딱히 질주 장면을 유달리 좋아하는 건 아니나 <후미코의 고백>(2009)에서의 질주 장면이 너무 큰 사랑을 받아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렸다고. 실제로 <펭귄 하이웨이>에서도 원래는 질주 장면이 딱히 없었지만, 팬들의 사랑을 보답하는 차원에서 질주 장면을 추가했다.

그의 가장 최신작이자 오리지널 작품인 <표류단지>는 이전에 그가 보여주었던 아이들의 희망찬 모험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진행된다. ‘상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년소녀들의 예민한 감정을 역동적으로 그렸다’는 점은 같지만, 폐건물이 된 아파트를 타고 망망대해 위를 표류하게 된 아이들이 주인공인 관계로 전작보다 어두운 분위기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던 주인공 나츠메(세토 아사미)는 코스케(타무라 무츠미)의 할아버지 집에서 그와 함께 지내던 시간이 인생 가장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죽고, 아파트는 낡아 철거가 결정되자 나츠메는 이곳에서의 추억을 잊지 못해 과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은 나츠메가 현재를 보게 되는 과정을 어드벤처 형식으로 보여주는데, 이때 역동적인 액션 장면이나 중간중간 들어간 개그 코드가 갑갑할 수 있는 스토리에 숨통을 틔운다. 감독도 캐릭터의 감정선을 무시하지 않는 수준에서 액션 장면을 집어넣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균형을 맞췄다고.
<마보로시> - 오카다 마리

오카다 마리는 각본가 출신 감독으로 1996년부터 애니메이션 업계에 입성했기 때문에 ‘신예’라고 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다. 2018년에 <이별의 아침에 약속의 꽃을 장식하자>로 애니메이션 감독 데뷔에 성공한 후, <마보로시>(2023)까지 연출하며 점차 각본의 일을 줄이고, 감독으로서 도약하고자 하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기에 리스트에 넣었다. ‘오카다 마리 각본’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정도로 업계에서 확실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편인데, 질척하고 엇갈리는 인간관계에 탁월하다. 그로 인해 등장인물의 감정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지만, 스토리의 짜임새는 비교적 약하다는 평도 더러 있는 편이다.

가장 최근에 연출한 <마보로시>는 갑작스러운 제철소 폭발 사고로 외부와 단절된 한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폭발 사고로 인해 바깥으로 가는 길은 모두 막히고, 심지어는 시간의 흐름까지 막히면서 마을은 ‘변하지 않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마을 주민은 “이렇게 모든 게 변하지 않고 있다면 언젠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으로 마을의 모든 변화를 금지하는데, 여기엔 ‘마음’까지 포함된다. 현재의 자신을 잊지 않기 위해 내야 하는 자기 확인표에는 이름과 나이뿐만 아니라 머리 스타일,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까지 기입해야만 한다. 그곳에 사는 중학교 2학년 마사무네(에노키 준야)는 동급생 무츠미(우에다 레이나)에게 이끌려 제철소 제5용광로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늑대처럼 행동하는 한 소녀(쿠노 미사키)를 만나게 된다. 감독은 코로나19 시절, ‘변화는 좋다고 생각하며 살았고, 오히려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하던 세상이 갑작스레 “밖으로 나가지 말고, 변하지 말라”라고 말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마보로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됐다고 밝혔다. 표면적으로는 변화와 개혁을 찬양하면서도 실제로는 변화해선 안 된다는 사회적 강박을 부각하기 위해서 ‘멈춰버린 마을’을 배경으로 했다고.

여담이지만, 각본가 일을 할 때도 유독 ‘에로티시즘'을 강조하던 그는 <마보로시>에서 그 욕망을 마음껏 펼쳤는데, 질척한 연애사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에로티시즘, 이를 모호하게 풀어내는 서사로 인해 관객들 사이 호불호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의 각본 스타일에 익숙하다면 황홀한 영상미와 함께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
<Sonny Boy> - 나츠메 신고

나츠메 신고는 애니메이터 출신 감독으로, 작화의 강약을 조절하며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스로도 ‘손이 빠른 게 장점’이라고 말할 정도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특화된 감독으로, 특히 그가 연출한 <원펀맨>(2015)은 역동적인 액션이 도드라진다. 유독 ‘움직임’을 추구하는 감독이라 움직임을 극대화하기 위해 작화를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디테일이 뭉개지거나 생략되는 등 작화 이슈가 있었지만 현재는 적절한 타이밍에 디테일을 생략해 작화와 모션 퀄리티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액션에 특화된 감독이다 보니 그의 각본, 연출 스타일도 심플하고 직선적일 것 같았으나 의외로 아방가르드한 연출을 즐겨하는 편.

<Sonny Boy>(2021)는 기획, 각본, 감독 모두 나츠메 신고가 한 작품으로 그의 아방가르드한 연출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점차 애니메이션 스토리가 이해하기 쉽고 직선적인 것에 반해, <Sonny Boy>는 같은 반 학생 모두가 다른 차원에 표류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설정 자체는 <표류단지>와 비슷할 수 있지만, 학생 모두 자신만의 초능력을 갖고 있고 재난 상황에서 극으로 치닫는 인물들의 갈등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어둡다. <Sonny Boy>는 시리즈인데, 각 화마다 느슨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어 마치 퍼즐을 푸는 것 같다. 다 보고 나면 “잘 모르겠지만 재밌다”, “뭔가 어렵지만 멋지다” 같은 감상이 남는데 이것이야말로 감독이 의도했던 바라고. 감독은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순간이나 감동, 그리고 그 이면의 부분을 많이 신경 썼다. (중략)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결과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작품이 된 것 같다”라고 밝혔다. 미스터리 장르지만, 작품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뜯어 이해하기보다 영상물 자체로 즐기면 오히려 즐거운 작품. 특히 사운드트랙이 하나의 앨범 수준으로 퀄리티가 좋아 나츠메 신고 특유의 연출 스타일과 화려한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사이다처럼 말이 톡톡 솟아올라> - 이시구로 쿄헤이

<4월은 너의 거짓말>(2014~2015)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시구로 쿄헤이는 로맨스물에 강점이 있는 감독이지만, 본인의 스타일을 뚜렷하게 고수하기보단 작품에 어울리게 작화, 연출을 맞추는 편이다.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후, 그는 업계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차기작을 냈지만 데뷔작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상태였다. 연달은 흥행 실패로 점차 초창기 명성을 잃어가고 있던 상태에서 청춘 로맨스 애니메이션 <사이다처럼 말이 톡톡 솟아올라>(2021)을 들고 온다. <4월은 너의 거짓말> 이후 난해한 작품을 주로 하던 이시구로 쿄헤이 감독이 칼을 갈고 로맨스를 만들어 온 것. 시티팝 스타일에 정석 청춘물 연출로 단박에 대중을 사로잡으며 ‘이시구로 쿄헤이는 역시 로맨스’라는 공식을 공고히 했다.

<사이다처럼 말이 톡톡 솟아올라>는 전형적인 청춘 로맨스물로 사람들을 대하기 어려운 소년 체리(이치카와 고메소로)와 교정 중인 앞니를 가리기 위해 마스크를 항상 쓰고 다니는 소녀 스마일(스기사키 하나)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사를 펼쳐나간다. 감독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라고 말하며, “제가 지금까지 참여했던 작품은 인물의 생사와 관련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반작용으로 사람이 죽지 않으면서도 극적이고 마음이 뜨거워지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시티팝 스타일의 밝은 색채와 리듬이 강조된 연출도 작품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특히 음악 사용에서 멜로디보다 작품의 호흡을 끌어갈 수 있는 리듬을 강조한 점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보다 보면 투명한 탄산 방울이 톡톡 터지는 듯한 사운드가 들리는데 이러한 경쾌함이 극 전체에 밝은 분위기를 더한다. 진득하고 꼬인 치정 로맨스가 지겹다면 마음정화차원에서 한번은 봐야 할 수작. 보고 있으면 그들의 풋풋함에 사이다라도 들이킨 듯 보는 이까지 청량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