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 다른 청춘 애니메이션의 탄생
일본에서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사랑을 받은 영화 <룩백>이 지난주 한국에 공개됐다. 만화를 통한 두 소녀의 우정과 성장을 그린 영화에 한국 관객의 반응도 심상찮다. 개봉 첫날 전체 외화 박스오피스 1위를 하더니, 나흘 만에 누적 관객수 7만을 돌파했다. 그림에 빠져드는 마음만으로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두 소녀,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연필의 사각거림은 적막한 가운데 반동하며 울리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 속 농구공이 되고, 그림을 그리느라 굽은 등은 색소폰을 부는 <블루 자이언트>(2023)의 주인공 다이의 굳은살 박인 엄지손가락과 겹쳐진다. 그렇다, 또 다른 청춘 애니메이션의 탄생이다.
하지만 청춘의 열정이나 성장을 앞세우는 서사를 덥석 믿기엔 우린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렸다. '아프면 환자'라는 것을 알아버렸고, 그저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운을 다한 이곳에서 성장까지 하라니, 그 저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구조적 문제를 가볍게 무시하는 청춘물들이 공허해질 무렵 <룩백>이 찾아왔다. <룩백>이 근래 인기를 끈 청춘 애니메이션과 다른 점은 이 영화가 그리는 청춘의 아픔, 좌절, 성장이 실제 일어난 사회적 비극과 원작자 본인의 자전을 조화한 끝에 드러난다는 점이다.
※ 아래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만화가를 꿈꾸는 두 소녀의 의기투합

후지모토 타츠키의 143쪽짜리 동명 단편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는 만화를 그리는 한 소녀의 등을 비추며 시작한다. 소녀의 이름은 후지노. 그는 지금 학급 신문에 연재할 4컷 만화를 그리는 중이다. 책장 속 빽빽한 만화책과 거울에 비친 진지한 얼굴에서 만화에 대한 소녀의 태도가 읽힌다. 4컷 만화 따위 5분이면 완성한다는 친구들 앞 괜한 허세가 밉지 않은 것도 성실히 이야기를 구상하고, 천천히 컷을 완성해 나간 소녀의 은밀한 시간을 관객은 알기 때문이다. 참신한 스토리와 그림으로 반 친구들을 사로잡은 후지노는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보인다. 주변인들의 극찬과 격려도 사양 않고 만끽한다. 동급생 쿄모토의 존재를 의식하기 전까지, 후지노는 그저 행복했다.

학급 신문에 자신의 만화와 쿄모토의 만화가 나란히 실린 날, 후지노는 난생처음 높은 벽을 마주한다. 등교거부 학생 쿄모토의 그림은 차원이 달랐다. 경탄과 시기, 좌절이 교차했다. 하지만 '학교도 못 나오는 겁쟁이'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날부터 후지노는 인체 드로잉 책을 참고해 밤낮없이 연습에 매진한다. 계절이 지나가고 해가 바뀌는 것도 모르고 후지노는 책상에 붙어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거세게 전진하던 후지노가, 부모님과 친구들의 한숨에도 꼭 쥔 펜을 놓지 않던 그녀가 거짓말처럼 멈춰 선다. 자신이 실력이 는 만큼 쿄모토의 표현력도 한발 앞선다. 쿄모토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절망감이 만화에 대한 애정을 압도했다. 일상을 되찾고,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그럭저럭 보내던 후지노에게 선생님은 뜻밖의 부탁을 한다. 여전히 두문불출하는 쿄모토에게 졸업장을 전해주라는 특명이다. 가까스로 이뤄진 둘의 첫 만남에서 쿄모토는 후지노의 작품을 극찬하며 존경에 가까운 팬심을 고백한다. 예상찮은 상찬이었다. 맹렬히 타올라 한 줌 재가 된 만화를 향한 열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쿄모토를 만난 그날, 빗길을 춤추듯 내달려 집으로 향하던 그 순간, 후지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다시 펜을 쥔 후지노는 쿄모토와 의기투합한다. 일 년에 걸친 신고 끝에 완성된 작품이 만화 공모전에서 입상하며 둘은 프로 만화가 콤비 '후지노 쿄'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실제 일어난 비극이 영화로 재탄생

문틈으로 빨려 들어간 운명의 4컷 만화로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의 세계가 이어지고, 만화를 향한 한결같은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언제까지나 함께일 순 없었다. 쿄모토에게 꿈이 생겼다. 더 잘 그리고 싶었다. 쿄모토가 미술 대학에 입학하며 둘은 갈라진다. 결별은 아팠지만 분초를 다투는 프로의 세계에서 쓰라림은 짧아야만 했다. 폭풍 같은 날들이 지나가고, 연재를 시작한 장편 만화가 궤도에 오른 어느 날, 후지노는 불길한 뉴스 하나를 접하게 된다. 정체불명의 남성이 한 대학의 미대에서 도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 그곳은 쿄모토의 학교였다.
두 친구에게 닥친 비극은 2019년 7월 18일, 일본에서 일어난 실제 비극과 교차한다. 광인은 자신의 작품을 베꼈다고 주장하며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에 불을 질렀다.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그로부터 2년 후,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는 단편 만화 「룩백」을 발표했고 만화 주인공 쿄모토는 자신의 그림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광인의 흉기에 살해당한다.(작가 본인이 해당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힌 바는 없으나 작중 묘사나 정황상 영향이 있을 거란 추측이다) 만화가 '후지노 쿄'의 절반이 떠난 날, 후지노는 휴재를 결정한다.
서로의 등을 바라보며 성장하는 청춘

줄곧 자신의 등을 바라보고 자신을 동경하며 성장해 온 쿄모토의 존재를 후지노는 죽은 친구의 방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그곳에는 자신의 장편만화 「샤크 킥」의 단행본이 빼곡했고, 후지노의 서명이 담긴 쿄모토의 낡은 옷이 걸려있었다. 서명이 새겨진 옷의 뒷부분이 정면을 향해 있어 방에서도 쿄모토는 후지노의 등을 바라본 셈이다. 만화를 그릴 때도, 히키코모리였던 쿄모토가 후지노의 손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갔을 때도, 조금씩 뒤처지는 쿄모토의 앞에는 언제나 후지노의 등이 있었다.
자신은 영영 두 눈으로 볼 수 없기에 취약하다 여겼던 등이, 누군가에겐 나아갈 지표였다. 이제 후지노가 먼저 떠난 이의 등을 바라볼 차례다. 바라보고 기억하며 조금씩 살아내기 위해 후지노는 중단했던 연재를 다시 시작한다.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가 「룩백」으로 비극 끝에 남겨진 이가 나아갈 길을 만화라는 예술에서 발견한 것처럼, 작품 속의 희생자 쿄모토를 넘어 교토 애니메이션의 방화 사건 희생자를 애도하며 그들의 꿈을 이어받은 모든 이들을 향한 헌사를 그 속에 담은 것처럼, 후지노도 그림을 통해 추모하며 성장하길 택한다.

서두에 언급한대로 후지모토 타츠키는 자신의 실제 경험을 「룩백」에 녹여냈다. 두 주인공 '후지노'와 '쿄모토'의 이름은 원작자의 이름에서 글자를 따와 만들었으며, 중학교 시절 일러스트 투고 사이트에서 같은 나이임에도 그림이 능숙한 사람들을 부러워한 경험을 녹여내 '후지노'를 '내 안에서 데려온 아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영화광으로 잘 알려진 후지모토 타츠키는 사소한 디테일을 곳곳에 숨겨놓기도 했는데, 만화 마지막 컷에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테이트-라비앙카 살인사건을 현실과 다른 이야기로 그렸다)의 DVD 패키지를 숨겨 놓는 등 해석의 재미를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