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

한때 미국은 꿈의 나라였다. 20세기 급격하게 성장한 미국은 대외적으로 '열심히 하면 성공이 보장된' 나라로 비쳤다. 때문에 주변국, 혹은 (한국처럼) 지구 반대편에서도 성공하겠다는 꿈을 품고 미국에 당도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다. 그러나 미국 또한 완벽한 유토피아는 아녔으니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소외가 존재했고, 때때로는 이민자들끼리도 갈등의 골이 생겼으며 급기야 대폭 증가한 이민자를 상대로 'Make America Great Again'을 외치는 상황까지 초래했다. 21세기의 '아메리칸 드림'은 그 본연의 뜻이 아니라 미국의 민낯을 드러내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배우의 성공엔 '아메리칸 드림'이란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에게 붙는 이 단어는 21세의 변질된 뜻이 아니라 최초 등장했던 당시의 뜻으로 사용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무대에 올라 "꿈은 이루어진다"(dreams do come true)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그의 성공은 그가 연기한 대표 캐릭터와 맞아떨어져 이민자 여성의 상징으로 발돋움하는 촉매가 됐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로 아카데미 여주조연상을 거머쥔 아리아나 데보스(Ariana DeBose)의 이야기다.

1991년생 아리아나 데보스는 댄스 서바이벌 예능의 에이스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2009년 <So You Think You Can Dance>(우리나라로 치면 <댄싱9>) 시즌 6에 출연, 상위 20명 안에 들었다. 푸에르토리코인 아버지와 백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노스캐롤라이나주 토박이로 'CC & Co. Dance Complex'에서 춤과 무용을 전공했다. 2011년 그의 데뷔 뮤지컬 '브링 잇 온: 더 뮤지컬'이 성공을 거둬 전국 투어를 시작하며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이후 그는 '모타운' '해밀튼' '피핀' 등에 출연하다가 2017년 '썸머: 더 도나 썸머 뮤지컬'에서 디스코 도나 역을 맡아 2018년 토니상 뮤지컬부문 최우수 여주우연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2020년 넷플릭스의 뮤지컬영화 <더 프롬>에서 엘리사 그린 역을 맡고 리차드 로저스/오스카 해머스타인을 추모하는 팝 리메이크 앨범에서 'Shall We Dance?'(뮤지컬 '왕과 나'의 넘버) 보컬로 발탁되기도 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아니타라는 상징적인 배역을 맡기까지, 그는 그렇게 커리어를 쌓으며 미국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이렇게 북미에서 점점 인지도를 쌓아오던 데보스가 한국 관객들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 눈도장을 찍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동명의 뮤지컬과 영화가 있는, 미국 뮤지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 중 하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리메이크한다고 알려지면서 기대만큼 우려도 모은 이 작품에서 아리아나 데보스는 아니타라는 역할을 맡았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현대 미국의 두 이민자로 각색했는데, 몬테규 가문과 캐플릿 가문은 각각 백인 청년 중심의 샤크와 푸에르토리코인 중심의 제트라는 청년 갱단으로 그려진다. 아니타는 이중 샤크파의 리더 베르나르도의 약혼자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인물이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주인공은 제트파의 토니와 샤크파 베르나르도의 동생 마리아이지만, 아니타 또한 그에 못지않은 극의 핵심 인물 중 하나다. 그는 넘버 'America'(아메리카)에서 말하듯 미국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희망적인 인물에서, 극의 후반 누구보다 큰 비극을 마주하는 역경을 겪기 때문이다. 1961년 로버트 와이즈·제롬 로빈스의 영화에선 극중 아니타와 아리아나 데보스와 마찬가지로 푸에르토리코 혈통의 리타 모레노가 연기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그는 2021년 영화에서 발렌티나 역으로 출연했다)

이처럼 중요한 역할이었기에 데보스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새로운 아니타를 맡아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그러나 영화의 캐스팅 디렉터 신디 톨란(Cindy Tolan)은 '썸머: 더 도나 썸머 뮤지컬' 무대를 직접 보고는 데보스를 어떻게든 설득해야 한다고 마음먹었고, 실제로 캐스팅 오디션에 참석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눈에도 완벽한 아니타였던 그는 오디션에 합격해 그동안의 역량을 모두 발휘하듯 극중 세계를 종회무진하며 아니타의 에너지와 노래, 감정선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영국아카데미(BAFTA), 미국아카데미, 크리틱스초이스, 골든글로브(영화 부문), SAG어워즈 등에서 여우조연상을 쓸어 담듯 수상했다. 미국아카데미에서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아니타=여우조연상'이란 기록을, SAG어워즈 사상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아프로-라티나 배우, 유색인종 퀴어 배우라는 기록을 세웠다.
물론 그런 대기록 이후 그의 영화판 행적은 녹록지 않다. 디즈니 100주년 기념 애니메이션이란 거대한 프로젝트인 <위시>는 배우들의 열연과 별개로 흥행에 실패했고, <아가일> <I.S.S.> 같은 작품 역시 성공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그를 지속적으로 주목하게 만드는 건 아리아나 데보스 그 자신에게도 있다. 그는 본인이 양성애자라며 일찌감치 성 정체성을 밝혔다. <더 프롬>에서 함께 호흡을 맞춘 조 엘렌 펠먼과 함께 LGBTQ+ 청년들을 지원하는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는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사람 대 사람으로 관계가 맺어질 수 있도록 본인의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무작정 소수자이기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극단적인 이념 설파를 떠나 그는 자신조차 퀴어, 라티노, 아프로-라티나 등 특정하게 분류되는 것보다 “인간”으로 대해지길 바란다 밝혔다. 각자의 인간성을 다양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건 각자가 인간이란 사실을 토대로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아리아나 데보스는 현세대의 화두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에서 가장 건강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소수자이기에 그만큼 배려를 바란다는 이상적인 관점보다 실력으로 인정받고, 대신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평등한 관심과 사랑이 행복한 세상을 이룩한다는 의견을 밝히며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카데미 무대 수상 소감에서도 "성 정체성에 대해 혼란이 있거나 스스로 '회색지대'에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말하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자리는 있습니다"라고 배척하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아닌 그들 자신을 독려하는 메시지를 전하며 뜻을 이뤘다.

배우는 엔터테이먼트를 위한 직업이긴 하나 대중 앞에 선다는 특성상 롤 모델의 역할도 수행하곤 한다. 때문에 배우의 행보는 이후의 세대에서 이정표가 되곤 한다. 아리아나 데보스를 지금 당장 '대배우'나 '명배우'라면 어불성설이다. 그에게 이런 칭호를 붙이기에 그는 앞으로도 실력과 선구안을 증명해야 하는 숙명을 겪어야 한다. 그럼에도 그는 퀴어, 라티노 등 소수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얼굴이 되길 자처하고 있다. 앞서 말한 배우의 역할에 있어서, 그처럼 자신을 드러내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배우의 중요도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