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십 년간 토종 씨앗을 심어 온 농부들의 24절기를 고스란히 담은 영화 <씨앗의 시간>이 11월 20일에 개봉한다. 설수안 감독이 연출한 영화 <씨앗의 시간>은 사라져가는 우리의 토종 씨앗을 오랜 시간 지켜온 농부들, 그리고 그들이 지켜온 소중한 씨앗을 찾아 다시 순환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함께 담아냈다. <씨앗의 시간>은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등 국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제14회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대상을 수상하면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설수안 감독은 자연의 시간에 따르는 농부들의 노동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며, 사계절도 충분히 누리기 어려운 현대인들을 입춘, 우수, 경칩 등 더 촘촘한 자연의 시간인 24절기로 데려간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양동이에 물과 함께 들어 있는 호박씨를 신문지 위로 옮긴다. 물에 젖은 호박씨는 햇빛에 고이 말린 후 보관한다. 평택에 거주하는 윤규상 할아버지는 옛날부터 받아온 씨앗을 심어 농사를 짓는다. 화순의 농부 장귀덕 할머니도 정성스레 분류하고 보관해 온 토종 씨앗으로 밭을 일군다. 윤규상 농부와 장귀덕 농부는 수십 년간 토종 씨앗을 지키고 심어 온 씨갑시(씨앗) 할아버지, 씨갑시 할머니다. 사라지고 있는 토종 씨앗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토종씨드림’은 이들의 토종 씨앗을 받아 사람들에게 나눠준다. 중년의 이경희 농부도 이들의 토종 씨앗을 받아 농사짓는다. <씨앗의 시간>은 특별한 사명감이 아닌 그날 그날에 충실해 온 삶의 태도로 토종 씨앗을 지켜낸 이들의 수고로운 노동을 담아낸다.
절기로 나누어진 자연의 시간을 따라서

윤규상 농부는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을 이렇게 말한다. “흙이 풀리면 고르고, 씨앗이 있으니께 심는 거지”. 하늘이 맑아진다는 청명은 장귀덕 할머니에게 그저 “어찌 될지 몰릉께, 돔부(동부콩의 방언)를 여기저기 많이 숭궈야” 될 때다. 수십 년을 허리가 굽도록 같은 자세와 마음으로 땅을 일구어 온 이들은 쑥국새가 울면 쑥이 나고, 아까시꽃(아카시아꽃)이 피면 깨를 심는 자연의 시간에 따라 씨앗을 심고 열매를 수확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절기 별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농부들의 분주한 노동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윤규상 농부가 사는 평택은 급격히 도시화하여 고속철도가 들판을 가로질러 지나가고, 물류센터가 들어선 지 오래된 곳이다. 달리는 기차의 소음 옆에서도 윤규상 농부는 변함없이 씨앗을 한 알, 한 알 고르며 갈무리하고, 그것을 다시 심는 과정을 반복한다. 장귀덕 농부가 사는 화순의 작은 마을에는 아직 농사 공동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대세를 따라 지역 농협에서 보급하는 개량종을 심고 있지만, 전해 내려온 토종 씨앗을 버리고 싶지 않아 밭 한편에 계속 심고 있다. 중년의 여성 농부 이경희 씨는 알록달록 예쁜 토종 씨앗의 매력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부지런히 밭일을 하면서도 씩씩하게 내뱉는 그녀의 말들에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에 대한 애정이 듬뿍 묻어 있다. 이들은 저마다 열매의 맛과 경제적 이유 등 각기 다른 이유로 토종 씨앗을 심어 왔다. 어디 그뿐일까. 눈 뜸과 동시에 시작되는 농사일을 거르지 않고 꾸준히 해온 삶의 결과로 토종 씨앗을 지켜 냈다.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짓는 일은 종자 회사가 판매하는 상품화된 씨앗을 심는 일보다 더욱 고되다. 씨앗의 증식과 채종의 고단함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토종 씨앗을 심는 일은 다소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윤규상 할아버지의 말마따나 “요즘 젊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어도 관심 없어 하는” 일이다. 토종씨드림은 전국을 수소문해 이런 고생스러운 일을 도맡아 하는 씨앗시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낸다. 또 오랜 시간 씨앗을 지켜낸 어르신들의 지혜도 귀담아듣는다. 토종씨드림의 두 여성 농부이자 활동가는 바삐 움직이며 농부들의 느린 삶 사이사이를 누빈다.

설수안 감독은 <씨앗의 시간>을 구상하며 텃밭 농사를 시작해 6년째 이어오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 살았던 전일적인 삶의 형태에 무수한 관심을 가져온 그의 시선은 농부들의 반복되는 노동으로 향한다. 감독은 농부의 노동에 애정과 존중을 표하고 있으면서도 농업을 신성시하는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또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농업을 힐링의 소재로 삼거나 낭만화하지 않는다.

설수안 감독은 “당연한 줄 알았던 씨앗을 받고 심는 과정이 현재의 농업에서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충격을 받았다. 씨앗을 찾으러 다니는 분들을 만나 함께 다니며, 씨앗이 없어지는 것은 그 맛과 냄새, 그것을 인지했던 우리의 감각이 함께 획일화되는 일이며 씨앗을 정리해 보관하고 심어왔던 어르신들의 삶의 모습도 사라지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점점 저의 관심은 우리와 다른 것에 가치를 두는 듯한 어르신들의 삶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자신의 삶과 주변 생명들의 삶과 연결된 행위였던 그들의 노동과 삶의 리듬을 담아보고 싶었다"며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를 전했다.
대안적인 농업 방식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짓는 일은 생산성과 효율성을 극대화한 플랜테이션 농업과 대비된다.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업은 자본가의 자본과 기술,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결합해 작물을 대규모로 단일 경작하는 농업 방식이다. 다국적 기업과 같은 자본가가 소유한 경작지에서 이루어지는 플랜테이션 농업은 정작 농업에서 농부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소유권이 명확한 플랜테이션 농업과 달리 토종 씨앗을 보존하는 일은 세대를 거듭하며 대물림되거나 이웃 간에 씨앗을 주고받는 공동체성이 중심에 있다.

또 현대에 이르러 무수히 이루어지고 있는 품종 개량이 우수한 작물만을 남기고, 그렇지 않은 종은 사라지게 하는 것과 달리 토종 씨앗을 심는 일은 생태계의 다양성을 보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플랜테이션 농업, 품종 개량 등은 농사를 단순히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제조업으로 바라본다. 토종 씨앗 보존은 그런 시각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씨앗의 시간>은 생산성이라는 미명하에 경시되어 온 삶의 노동을 24절기에 펼쳐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