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년이>가 막을 내렸다. 평균 시청률 16.5%의 높은 수치였다. 시청자와 관객의 관심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는 요즘 추세를 보면, ‘정년이’의 다음 회를 기다리는 열기는 기록적이었다. 드라마는 끝났지만, 여성 국극의 역사 한가운데 살았던 인물들의 에너지는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캐릭터로, 이야기로 남았다. 문소리 배우가 요즘 만나는 이들에게서 듣는 모든 첫인사는 “정년이 잘 봤어요”다. 희끗한 머리를 한 나이 지긋하신 분이 한참 어린 문소리의 손을 부여잡고 “우리 엄마가 생각나서요” 하고 눈물을 글썽인다. 사연을 들어보면, 자신을 뒤로하고 자식 건사하기에 바빴던 그 시절의 어머니 이야기들이다. 문소리가 불러낸, 소리의 꿈을 접고 살아갔던 1950년대 여성 서용례의 삶은, 그렇게 지금의 관객에게 시대에 가려진 여성의 삶을 되돌아볼 ‘울림통’이 돼준다.
<정년이>에서 문소리는 특별출연이었다. 온전히 지분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 짧은 등장이다. 그럼에도 문소리는 단 한 장면의 ‘추월만정’을 선보이기 위해 촬영 1년 전부터 소리를 연습했다. 노력 대비, 투자의 개념으로 접근하면 손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그런데 문소리의 셈법은 조금 달라 보인다. 그 투자로 결국 화면에는 드러나지 않은, 캐릭터의 질곡의 삶까지 유추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매달릴 만한 것이다.
배우 문소리는 최근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부터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2> 그리고 내년 상반기 공개를 앞둔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까지 매체와 장르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연기 톤과 스타일, 어느 하나 겹치지 않는 ‘문소리 멀티버스’의 운용 방식은 하나다. 바로 노력과 연구, 시간의 과감한 투자다. 문소리의 연기를 달라 보이게 하는 미세한 지점이다. 이게 말은 쉽지만, 해보면 모두 알듯이 실천은 영 어려운 방법론이다. 데뷔 때부터 등에 업은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수식에 머물지 않고 배우 ‘문소리가 오늘도’ 자신을 갱신하는 방법을 들어 봤다. 그와의 긴 단독 인터뷰를 2회에 걸쳐 전한다.

인터뷰 직전에 런던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어요. 아직 시차 적응이 안 됐을 텐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해요.
꽤 오래 11주 동안 ‘사운드 인사이드’ 공연을 했어요. 제 생애 처음으로 그렇게 길게 연극 공연을 한 거였어요. 공연 마치자마자 사실 남편 따라 기네스나 한잔 마셔보자, 한 일주일 동안 템스강변을 걸으며 좀 쉬어보자는 생각으로 다녀온 거죠. (웃음)
런던에서의 일정을 봤더니, 거기서도 그렇게 새벽부터 조깅하고 시간을 쪼개 쓰시더라고요. 배우 문소리는 제가 아는 가장 강력한 파워 J형 인간인데, 역시 어딜 가도 사람이 잘 안 바뀌는 것 같아요.
새벽에 할 게 없잖아요. 갤러리도 문을 아직 안 열었고, 뭐라도 해야죠. (웃음)
보통은 스케줄 끝나면 잠도 늘어지게 자고 그러는데, 늘 일이든 공부든 찾아 하시는 것 같아요. (웃음)
시차 때문에 5시면 눈이 떠져서요. (웃음) 어둑어둑할 때 뛰는 것은 좀 무서워서 뭐라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6시 반 넘어 해가 떠요. 그때 나가서 뛰어요. 템스 강변에서 뛰는 사람들이 저 말고도 진짜 많더라고요.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의 주연 벨라 역으로 지난여름 연습 때부터 매일 공연장과 집을 오가는 생활이었는데요. 그만큼 막이 내리고 오는 허한 마음도 컸을 것 같아요.
템스 강변에서 수동식 타자기로 시를 써주는 청년을 봤어요. ‘Poet for hire~’라고 쓴 작은 간판을 놓고, 타이틀을 주면 시를 써주는 거예요. 마치 그림 그려주는 것처럼요. 마침 연극에서 제 상대역인 크리스토퍼가 그런 타자기로 소설을 쓰는 캐릭터였어요. 보자마자 너무 크리스토퍼가 생각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배우들 단톡방에 “어머, 크리스토퍼가 런던에 와서 시 써주고 돈을 벌고 있어” 하고 올렸더니 배우들도 호응을 해주더라고요. (웃음) 그러다가 “내가 여기서 다 잊어버리고 가야지, 너네까지 다 잊어버리고 갈 거야!” 이런 카톡까지 주고받았죠. 물론 말은 그렇게 했어도, 헤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크죠. 그런데 또 잘 헤어져야 다음에 또 다른 멋진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생각해요.
물론 그중엔 유독 빠져나오기 힘든 작품들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질문을 꽤 많이 받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별로 힘들지는 않아요. 다음 캐릭터가 늘 기다리고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보통 한 작품과 캐릭터에 지긋지긋할 정도로 빠졌다가 나와야 할 때가 되면 ‘그래, 헤어질 때 됐다. 좀 놓자. 당장 내가 죽겠는데 놓아야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사실 더 많아요. 내가 매정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그보다 정들었던 배우나 스태프들과 한동안 못 보게 된다고 생각해서 아쉽긴 하지만, 사실 돌아서면 당장 또 내 현실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딸 밥도 해줘야 하고, 친구도 만나야 하고. 작품 하느라 미뤄뒀던 것들이 한꺼번에 다 몰려오잖아요. 그래서 작품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는 게 나한테도 좋겠다, 인간 문소리가 작품 속 캐릭터보다 별로라고 하더라도 빨리 현실과 맞닥뜨리자,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죠.

기술적인 관점으로 생각해도, 빨리 나오긴 해야겠다 싶었어요. 최근에는 ‘문소리 in 멀티버스’ 가설을 세워도 좋을 정도로 다양한 시대와 캐릭터, 플랫폼을 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작년에 바쁘게 맞물려 찍었던 작품들이 연극 공연 일정과 맞물려 차례로 공개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요. 작업했던 것들이 최근 한꺼번에 나왔어요. 주인공이 아니니까 여러 편을 할 수 있었죠.
‘배우 문소리’로 살아가는 고충을 연기한 주연작이자 장편 연출 데뷔작인 <여배우는 오늘도>(2017)가 생각나더라고요. 쏟아지는 특별출연 제안에 대해 곤란해하는 에피소드가 기억나는데요. 실제의 문소리 배우도 요즘 그런 특별출연 제안이 많을 것 같아요. (웃음)
그 말이 씨가 됐나. (웃음) 나의 미래를 생각하고 만든 작품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 적 있죠. 그런데 그때 쓴 ‘특별출연 해달라’는 것과 지금은 감정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요즘은 작은 역도 흥미로운 제안들이 많아졌어요. 꼭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서사를 다 끌고 가는 역할이 아니어도, 즐기면서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적극적으로 더 하는 것 같아요. 물론 그렇다 해도 많은 편이긴 하죠. 제가 특별출연할 때만 잘하는 게 아니고, 뭐든 다 잘해드릴 수 있으니까 더 다양한 제안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특별히 ‘어려운’ 역할에 대한 제안이라고 해석해도 될까요. <정년이>의 서용례도 출연 분량에 비해 연습 기간이 상당했어요. 작년부터 판소리를 배우고 연습하러 다니는 모습을 봤는데요. 솔직히 저는 특별출연인지 몰랐어요.
서용례는 과거 전설적인 소리꾼 캐릭터다 보니, 그 판소리 한 대목을 하기 위해서 거의 1년 동안 레슨을 받았어요. 근데 판소리라는 게 사실 몇 년을 해도 정말 그 목을 갖기가 어려워요. 최소한 7년 이상 한 10년은 연마해야 ‘소리꾼 목’을 가질 수 있거든요. 1~2년 해서는 어림도 없죠. 그렇지만 처음부터 최대한 내 목소리로 작품에 임하고 싶었어요. 좀 도움이 됐던 건 제가 대학교 다닐 때 1년 반 정도 판소리를 열심히 배웠던 적이 있어요. 그때 ‘수궁가’를 거의 절반 정도 배웠었거든요. 판소리 수궁가 보유자로 무형문화재셨던 명창 남해성 선생님이 저를 굉장히 예뻐하셔서 많이 가르쳐 주셨어요. 그래서 솔직히 말하면, 이제 고인이 되신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과 보답하는 마음 때문에, 판소리가 들어가는 국극을 소재로 한 <정년이> 출연을 결심한 이유가 커요. 또 이번에 용례가 판소리에서 음색이 지나치게 탁하고 텁텁해 별다른 조화를 내지 못하는 성음인 ‘떡목’이 된 소리로 부르는 ‘추월만정’을 제게 가르쳐주신 노해현 선생님의 도움도 정말 컸어요. 그런 가르침과 고생으로 그 장면을 만들 수 있었던 거죠. 이전에도 제가 국극이라는 소재에 관심이 컸지만 <정년이> 때문에 국극에 대한 책을 더 찾아보고 공부할 수 있었어요.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걸 생각하고, 그 가르침을 이제야 하나의 장면에 넣을 수 있어서 특별히 더 감사한 작품이죠.
한편으로는 매번 자신을 몰아치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영화 <세자매>(2021)에서 연기한 맏딸 미연이 교회 합창단 지휘를 하는 장면이 생각나요. 당시 제가 마침 교회 장면을 촬영하는 현장에 보조출연자로 가서, 그 연기를 직관했던 게 기억나요. 굉장히 단기간에 지휘 연기를 익히고 그 장면을 완수하셨는데요. 배역에 대한 집착, 완수했을 때의 희열 같은 것들을 느끼게 해주는 연기였어요.
최근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에 나온 안성재 셰프가 그런 말을 했더라고요. “노력한다는 말이 그냥 열심히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진짜 노력은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거다. 그게 진짜 노력이다.” 정말 내 생각이랑 똑같았어요. 열심히 했지만 안 됐다면 그게 무슨 노력을 한 거지? 라고 생각하거든요. 본업이 아닌 건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제가 요즘 요가도 하고 아르헨티나 탱고도 하고 그러는데 잘하지 못해도 부끄럽지 않아요. 그건 나의 주 종목이 아니고 직업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해 온 이 일, 더구나 돈을 받고 하는 이 일은 끝없이 노력해야 하는 일이죠. 언제나 가짜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진짜로 노력해서 그걸 기어이 되게끔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거죠. 물론 그래도 안 될 때가 많아요. 모자랄 때도 많지만 안성재 셰프가 얘기한 그 지점까지 갈 수 있게끔 쉬지 않고 몰아붙여 보는 거죠.

단순히 판소리하겠다고 나선 정년이(김태리)를 말리는 엄마에서 벗어나, 시청자들에게 그 이상의 서용례의 서사를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건 확실히 배우의 몫이 컸다고 생각해요. 판소리를 하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용례의 삶에 공감해 주시는 분들을 많이 접하셨을 텐데요. 짧은 등장으로도 그걸 만들어 내는 것이 노력이라면 노력일 테고요.
저도 어렸을 때 그런 기억이 있어요. 바이올린을 정말 계속 더 하고 싶었는데, 고1이 되니까 부모님이 이제 그만하라고 하시더라고요. 가정 형편이 받쳐줄 만큼 넉넉하지도 않았어요. 그래도 엄마 지인의 지인의 지인이 저를 예쁘게 봐줘서 오랫동안 레슨을 받았는데, 그분께서 “소리야, 내가 음악을 해보니 아직 우리나라 음악이 그렇게 실력으로 승부하는 사회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 공부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아”라고 하셨어요. 뭐라고 더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네” 하고 접었죠. 그리고는 정말 밤마다 이불 뒤집어쓰고 엄마 몰래 많이 울었어요. 계속해서 대학에서도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도 있을 텐데, 거기서도 비싼 악기를 갖고 있는 친구들에게 열등감을 느낄 수도 있고, 그런 문화 자체가 싫은 것도 있었죠. 그래서 연극반에 가게 됐고, 또 우리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데 가서 가야금을 배웠어요. 고 남해성 선생님도 그렇게 알게 된 거고요.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시간을 지나 <정년이>로 다 수렴됐다고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일이죠.

<정년이>에 비하자면,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시즌2의 경우는 연결 고리가 약하죠. 연상호 감독의 세계 안에서 배우 문소리의 리얼리즘 연기를 보는 건 그만큼 의외여서, 선택의 고민이 컸을 것 같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 크리처물을 그렇게 좋아하는 편은 아니에요. 어디 가겠어요, 이창동의 딸이니까. (웃음) 1999년 <박하사탕>부터 리얼리즘으로 승부를 보며 연기를 시작했잖아요. 태어나서 보고 배운 게 그거였죠. 그런데 제가 연상호 감독 작품 중에서는 시리즈 <지옥>을 가장 좋아해요. 마침 시즌2를 궁금해하던 차에 제안받은 거죠. 그래도 꽤 오래 고민하긴 했어요. 왜냐하면 시나리오만 봤을 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새로운 교리를 만들려고 하는 정무수석 이수경 캐릭터가 그렇게 재밌지가 않았어요. 보세요, 정진수(김성철)는 정신착란처럼 막 가고 민혜진(김현주)의 액션은 난리가 났고 박정자(김신록)도 완전히 미쳐서 저세상으로 가고 있어요. (웃음) 저만 마치 선생님처럼 세계관을 다 설명하고 있잖아요. 시나리오에는 딱히 동선도 없고, 오직 대사만 길게 한바닥 씩 있는 거예요. 요즘처럼 호흡이 빠른 세상에 시청자들이 이 대사를 잘 들어줄 수 있을까 불안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쉽게 “할게요”라는 말이 잘 안 나왔는데, 한편으로 이 독특한 세계관 안에서 한번 놀아보는 것도 배우로서 새로운 경험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최대한 무슨 말인지 알아듣게, 보는 사람들이 이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내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할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이수경을 한 번 잘 만들어보자, 하는 생각에 시작했죠. 막상 현장에 갈 때는 내내 고민이 많아서, 단어 하나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신경 쓰고 있으면 연상호 감독님이 “선배님이 현장에 오시면 제작진이 너무 긴장해요” 그러더라고요. 그러니 그냥 즐겁게 오라는 얘기인데, 아니, 그렇게 대사를 많이 줘놓고는 즐겁게 오라니. (웃음)
압도적 대사량과 귀에 꽂히는 정확한 딕션은, 배우 문소리의 연기를 규정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강점이기도 한데요. 앞서 연극 ‘사운드 인사이드’는 100분 동안 지문까지 거의 대사로 소화하더니 말씀하신 것처럼 <지옥> 시즌2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특히 5화에서 김성집(홍의준)을 향해 정무수석으로서 이수경의 계획을 설명할 때는 독무대처럼 공간을 대사로 채우는데요. 왜 연극, 영화, 시리즈 다 망라해서 모든 연출자들은 대사의 압박이 있을 때 문소리 배우를 찾을까, 일종의 구명조끼 같은 걸까요? (웃음)
우리 할머니가 참 말씀을 재밌게 잘 하셨거든요. 어릴 때 어느 분께서 “너는 할머니 닮아서 입으로 성공할 거다” 말씀하셨던 것도 기억나요. (웃음) 그래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어요. 연기라는 것도 트렌드가 있거든요. 메소드 연기가 유행했던 시절이 있고, 또 제가 데뷔했을 즈음인 1999년부터 2천년대 초반까지는 한국영화에서 배우들이 그렇게 또박또박 말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약간 자연스럽게 흐르는 듯한 연기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후시 작업을 정말 많이 해요. 관객이 귀로 즐기는 요소, 정확하게 들리는 걸 정말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생각도 들고요. 연기의 트렌드도 그에 맞춰 예전과 달라진 것 같아요. 시기마다 선호하는 연기가 있고 연출의 디렉션도 달라진다는 걸 느껴요. 저도 그 트렌드에 맞춰 변화해 가야 하고요. 그런데 3주 동안 연극을 하면서, 관객에게 잘 들리게끔 너무 또박또박 연기를 하다보니, 이제는 아무렇게나 얘기하는 작품도 좀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그런데 이런 스타일이 나한테 너무 배어서, 문소리는 그렇게밖에 말 못 하는 사람 아냐?라고 생각하게 될까 봐 두려운 것도 있어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배우로서 그 캐릭터에 정말 편하게 녹아들어 가야 한다는 점이에요.

가령 어떨 때 그런 두려움이 드셨나요.
제가 교수를 하다가 그만뒀어요. 초빙과 전임 등 다 하면 8년 정도 되죠. 나름 꽤 길게 한 거죠. 제일 두려웠던 건, 내 말투가 ‘선생님 말투’가 되는 거였어요. 평소에 내가 말할 때도 마치 학생들한테 강의하듯이, 어떻게 설명하면 잘 전달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정말 현실과 작품을 초월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좀 바뀌더라고요. 예를 드는 방식도 그렇고, 말할 때 나도 모르게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이렇게 분류를 한다던가, 혹은 되묻는다던가, 그렇게 되더라고요. 한번은 지나가는 말로 아는 분이 “너 되게 선생님같이 말해”라고 한 적 있는데, 그 순간이 제게 좀 충격이었어요. 다양한 캐릭터를 담아서 연기해야 하는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내게는 1순위인데, 그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고민이 학교를 떠났던 여러 이유 중 하나였어요. 배우로서 굳어지면 안 된다, 머무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죠.
지금이야말로 전혀 다른 스타일의 연기 제안이 오면 오히려 선뜻 도전하기에 가장 좋은 때인 것 같네요.
네, 뭐든 잘 소화해 드리겠습니다. 말씀만 해주세요. (웃음)


그동안 연기해온 캐릭터들을 보면서, 넷플릭스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정체를 숨긴 야매 침술원 원장 ‘화수 언니’가 떠올라요. 당시 큰 화제가 된 독특한 설정인 화수 언니의 ‘아치 눈썹’ 같은 걸 항상 발견하게 되는데요. 예전부터 내 캐릭터가 어떤 옷을 입을 것인가, 어떤 외양의 캐릭터로 표현될 것일까에 대해서 탐구하길 즐기는 것 같아요. 문소리가 연기한 캐릭터에서 그런 요소들을 보는 게 신선한 충격이자 상당한 즐거움인데요. <지옥> 시즌2에서는 등산복 차림에 텀블러 들고 등장하면서 정무수석 이수경 캐릭터에 의외성을 더하는데요.
<보건교사 안은영> 때는 이경미 감독과 그 ‘야매 월드’ 탐구를 열심히 했어요. 정말 신이 나서, 그럼 그렇게까지 가 볼까요? 하게 되는 거죠. 그런 탐구나 연구 과정 없이 그저 ‘설정’으로만 가면, 내가 눈썹을 이렇게까지 해도 되나, 불안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심층적으로 탐구해서 고민 끝에 착 붙이면 아무런 불안함 없이, 신나게 갈 수 있는 거죠. 그 눈썹을 착 붙였을 때의 쾌감이 있었어요. 우리가 긴 시간 헛된 고민을 한 게 아니구나, 하는 확신이 들 때 오는 쾌감이요. 이수경의 등산복 차림을 만들 때도 그런 재미가 있었죠. 이수경이 사실 겉으로는 굉장히 따박따박 모든 걸 조리 있게 말하는 사람이지만, SNS에 ‘텀블러에 이수경이 술 넣고 다니는 거 아니냐, 맨 정신에 저러고 다닐 것 같지 않다’라는 반응이 뜰 때 정말 재밌더라고요. (웃음) 연상호 감독님이 먼저 제안해주신 건데 “트레이닝복 말고 ‘츄리닝’이랑 등산복 중에 뭘 하실래요?”라고 물으셔서 등산복을 택했죠. 정무수석이라고 하면 의상이나 이미지가 뻔하잖아요. 포멀한 공무원 룩이 떠오르는데, 등산복 차림으로 캐릭터의 위선적인 모습을 더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런 가운데 의외로 굉장히 자연 친화적이고 산을 좋아하고 오히려 명상 같은 걸 좋아할 것 같기도 하고요. 텀블러를 들고 다니면서 환경에 신경 쓰는 척하지만 정작 자기 주변 환경은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죠. 그런 대비가 흥미로울 것 같았어요.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 때 <청설>의 홍경 배우를 만났는데요. 마리끌레르 아시아스타어워즈에서 수상할 때 ‘<바람난 가족>(2003)을 본 후부터 존경해 온 문소리 선배가 시상자로 상을 주셔서 너무 뜻깊었다’고 하더라고요. 이제는 어느덧 많은 배우들이 선배 배우 문소리의 선한 영향력을 거론해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동안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작업할 수 있었어요. 데뷔 때부터 그랬고 그 이후로도 정말 훌륭한 감독과 제작자들을 만나왔어요. 데뷔 이후 한동안 매니저도 없었고 스타일리스트도 없었는데 믿고 의논할 만한, 선생님이 될 만한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 사람들과 작업하다 보니 ‘아, 내가 조금 더 과감하게 도전해도 크게 다치지 않겠구나. 설사 조금 다친다 하더라도 금방 회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겁먹지 않고 도전할 수 있었어요. 물론 그때는 많이 어렸으니까 두려움이 많았지만, 그분들 덕분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꼭 직접적인 교류가 없는 분이었다고 해도 힘이 되는 분들이 많았어요. 저도 그런 식으로 힘이 되는 존재가 된다면 더없이 기쁘죠.


한편으로는 문소리라는 사람 자체가 가진 유연함이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둘 수 있게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해요. 보통은 상대에게 질문할 때 이미 자신의 답을 정해놓고 확인받으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소리 씨와 대화를 하다 보면 ‘오히려 이 사람이 내게 훌륭한 질문을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게 돼요. 상대방의 조언을 받아들일 마음을 가지고 있고, 주변의 조언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늘 자신을 업그레이드하는 데 게으르지 않은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제가 걱정도 많고 고민도 많은 편이에요. 전혀 안 그렇게 보인다는 사람이 더 많은 것도 알아요. 오히려 굉장히 무서워 보인다고 하죠. (웃음) 전 일단 결론을 내리면 굉장한 확신을 가지고 직진하는 편인데, 그전까지는 정말 치열하게 의심하고 고심하는 편이죠. 제가 금방 이 질문을 들으면서 한 생각인데 유연함과 질문, 그리고 경청하는 것, 이 세 가지는 배우에게 정말 중요한 필수 요소예요. 저는 제가 그래야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어요. 배우는 몸을 쓰는 직업이니 몸도 유연해야 하고, 마음과 생각의 유연함이 캐릭터를 소화하는 데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질문을 하는 건 캐릭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작품에 대해서 분석하고 그렇게 조금씩 완벽하게 나아간다는 거죠. 답을 얻기까지는 질문의 연속이거든요. 연극을 하면서 좋은 연출가들과 작업하면서 질문하는 방식을 많이 배운 것 같아요. 스스로한테도 그래요. 이 캐릭터에 대해서 계속 질문하는 거예요. 그 질문이 끊이지 않아야 캐릭터가 풍부해지고 레이어가 생기거든요. 질문을 다각도로 하기 위해서는 유연함이 필요하죠. 그리고 질문에 대한 답을 내 안에서도 찾지만 다른 여러 사람들로부터 듣는 것, 듣고 이어서 다시 맞추는 것, 이 과정이 정말 배우한테 너무 중요한 작업인데 그것들을 계속해 나가는 것, 그것이 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본능적으로 그걸 캐치하는 뛰어난 배우들도 있을 거예요. 그냥 느낌대로 해도 연기가 너무 훌륭한 배우도 있죠. 그러니 앞서 얘기한 건 제가 하는 방식일 수 있는데, 배우로서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이들에게도 유효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내년 상반기에 역시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도 공개를 기다리고 있어요. 제주를 배경으로 운명에 맞서는 여성 애순을 연기하는데요. 아이유와 문소리가 나이대를 나눠 같은 인물 애순을 연기한다고 해서 화제죠. 그 이후 또 어떤 작품으로 만나게 될지 궁금한데요. 일단 ‘구강액션’ 말고도 대사의 압박을 벗고 몸을 활용하는 ‘바디 액션’도 기대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웃음)
저 정말 전신 액션 좋아해요. 그게 꼭 액션영화의 액션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조커>(2019)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몸짓이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내 몸도 죽기 전에 저렇게 한 번 써보자,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몸 쓰는 작업을 많이 했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에서는 핸드볼을 했고 <오아시스>(2002)도 대사보다 몸을 써야 하는 연기였어요. <바람난 가족>에서도 무용을 하는 캐릭터였네요. 최근에는 그럴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때를 기다리며 개인적으로 열심히 쓰고 있어요. 언젠가 보여드릴 기회가 반드시 찾아오겠죠. (웃음)
씨네플레이 이화정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