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말이 되면 거의 반강제적으로 봐야 하는 영화 몇 편이 있다. <러브 액츄얼리>(2003)가 그 중 하나다. 이 영화, 그 동안 너무 많이 말해졌다. 줄거리를 요약한 영상도 유튜브에 널려 있다. 그러나 핵심이 되는 음악 중심으로 논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다.
<러브 액츄얼리>는 우리나라에서 2003년 첫 개봉한 후 무려 7회나 재개봉한 로맨틱 코미디의 고전이다. 이 영화를 ‘고전’이라 부르는 게 영 어색할 수 있지만 올해가 2024년이라는 걸 기억하자. 영화적 평가도 높고, 20년이 넘게 사랑받고, 등장 이후 어떤 흐름(옴니버스 구성)을 흥하게 했다면 고전 맞다. 아브릴 라빈(Avril Lavigne)이 ‘올드 팝’ 취급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참고로 에이브릴 라빈 아니다. 아브릴 라빈이다. 프랑스어에 뿌리를 둔 이름이라서 그렇다. 본인도 소개할 때 아브릴 라빈이라고 한다.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할 장면과 음악은 아무래도 ‘공항 신’이다. 나는 지금도 이 신을 보면 울컥하면서 눈물 흘리는데 JTBC 영화 프로그램 <방구석 1열> 녹화 준비하면서 처음 알았다. 이 신, 정말 대놓고 그냥 찍은 거다. 일단 카메라로 찍은 뒤 카메라에 걸린 일반인에게 제작진이 달려가서 촬영 동의서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헤어져있다가 마침내 만나 격하게 포옹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길 수 있었다.

영화에서 공항 신은 총 2차례, 오프닝과 엔딩에 등장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역시 후자를 꼽을 수밖에 없다.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의 ‘Pet Sounds’(1966)에 수록된 명곡 ‘God Only Knows’가 흐르기 때문이다. 가사에서 화자는 “당신이 없는 삶은 신만이 헤아릴 수 있다”고 노래한다. 그중에서도 독특한 노랫말은 시작과 함께 등장한다. “당신을 항상 사랑하지는 않을 수도 있어요(I may not always love you).” 그렇다면 이 문장은 물리적으로 서로 떨어진 상태를 뜻하는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곡이 좀 더 진행되면 화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별이 떠 있는 한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공항에서 사랑하는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다가 만난 사람의 감정이 이러할 것이다.

이 곡은 특히 당대 동료 뮤지션, 그중에서도 비틀스(The Beatles)의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와 프로듀서 조지 마틴(George Martin)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66년 가을 비틀스와 폴 매카트니는 오랜만에 안식년을 가졌다. 이 기간에 폴 매카트니는 곡이 실린 음반 ‘Pet Sounds’를 더욱 깊게 감상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곡인 ‘God Only Knows’를 들으면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인터뷰에서 폴 매카트니는 다음 같은 찬사를 보냈다. “큰 감동을 받았어요. 교육을 위해 아이들에게 한 장씩 사줬죠. 세기의 고전이이에요.” 조지 마틴의 경우, “팝 음악의 살아있는 천재로 한 사람을 꼽으라면 비치 보이스의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이라는 말로 존경을 표했다.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나 ‘All You Need Is Love’, ‘God Only Knows’가 관객에게 기쁨, 사랑, 감동 같은 감정을 선물했다면 관객을 가장 분노케 한 에피소드는 캐나다 출신 싱어송라이터 조니 미첼(Joni Mitchell)과 관련 있다. 그렇다. 여러분도 알고 있다시피 사장인 남편이 부인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CD 한 장 달랑 사주는 그 장면이다. 일단 분노는 잠시 식히고, 그 장면에 흐르는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에 주목해보자. ‘Both Sides Now’는 조니 미첼이 비행기에서 솔 벨로(Saul Bellow)의 「비의 왕 헨더슨」(Henderson the Rain King, 1959)을 읽다가 ‘구름’을 바라보며 쓴 노래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1969년 발표한 원곡을 2000년에 직접 커버한 버전으로 나온다.

단언컨대 이 곡은 팝 역사상 가장 시적인 노랫말을 담고 있다. 씨네플레이는 분량 제한 따위 없는 호방한 매체이므로 이 곡의 해석을 밑에 붙인다. 번역은 직접 했다. 꼭 한번 읽고, 곱씹어봐야 할 가사다.
흘러내리는 천사의 머리카락
천상의 아이스크림 성채
사방에 존재하는 깃털의 협곡
나에겐 구름이 그렇게 보였지
하지만 지금 구름이 해를 가리고는
비와 눈을 뿌려대고 있지
구름이 내 앞길을 막지 않았다면
정말 많은 걸 했을 텐데
이제 나는 구름을 양쪽에서 바라보네
위쪽에서 아래쪽에서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건 구름의 환영
실체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지
6월에 뜬 달과 대관람차
모든 동화가 현실이 될 때
당신이 느끼는 어지럼증
난 사랑을 그런 식으로 바라봤지
하지만 이제 사랑은 또 다른 쇼가 됐지
모두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당신은 퇴장하네
그게 싫다면 그들이 알지 못하게 해야 해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돼
이제 나는 사랑을 양쪽에서 바라보네
사랑이란 주고받는 것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사랑은 환영이야
사랑이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네
눈물과 두려움,
“널 사랑해” 크게 외칠 때의 벅찬 가슴
꿈, 계획, 서커스의 관중
나는 삶을 그런 식으로 바라봤지
하지만 옛 친구들은 이상하게 행동하네
고개를 저으며 내가 변했다고 말하지
뭔가를 얻으면 뭔가를 잃는 법
삶이라는 게 그렇지
이제 나는 삶을 양쪽에서 바라보네
승리와 패배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건 삶이라는 환영
아직도 삶을 잘 모르겠네
이제 나는 삶을 양쪽에서 바라보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지
하지만 여전히 내가 기억하는 건 삶이라는 환영
아직도 삶을 잘 모르겠네
어떤가. 이것은 차라리 한 편의 시다. 커튼 뒤에 가려진 삶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엿본 자만이 쓸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삶이라는 게 이렇다. 조니 미첼이 노래한 것처럼 그 자체로 역설이다. 모순덩어리다. 엉망진창이다. 조니 미첼의 목소리에서는 청아하면서도 지적인 도도함이 느껴진다. 그리하여 감정 과잉이나 뻔한 통속, 청승 따위와는 끝내 거리를 둔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조니 미첼의 ‘Both Sides Now’와 함께 한 엠마 톰슨(Emma Thompson)의 눈물이 없었다면 <러브 액츄얼리>는 좀 시시한 작품이 됐을 것이다. 마지막 공항 신에서의 감동이 훨씬 덜했을 게 분명하다. 사랑은 언제나 슬픔을 이고 오는 법이니까. 살면 살수록 삶에 대해 알 수 있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는 삶에 대해 영원히 알지 못할 거라는, 바로 그 점일 테니까.

마지막으로 덧붙인다. 영화의 배경은 영국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다. 이걸 영국에서는 ‘박싱 데이(Boxing Day)’라고 부른다. 권투를 한다는 게 아니라 ‘박스’에 크리스마스 선물 담아서 준다는 뜻이다. 연휴인 까닭에 축구를 일주일에 3게임씩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영화가 개봉한 2003년 이전까지만 해도 국내나 해외나 크리스마스 선물로 뭘 제일 많이 줬나. 영화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CD를 선물한 사람,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영국 싱글 차트에서 박싱 데이에 속하는 ‘크리스마스 주간 차트 1위’는 거의 틀림없이 그 해 가장 많이 팔린 싱글이었다. 이걸 역사상 2번이나 해낸 유일무이한 싱글이 있다. 바로 퀸(Queen)의 ‘Bohemian Rhapsody’다. 발매된 해인 1975년 크리스마스 주간에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했고, 이후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가 1991년 11월 24일 세상을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크리스마스 주간에 또 1위를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