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를 즐기고 사랑하는 한국에서 ‘시네필(영화 애호가)’의 별칭이 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무릇 시네필이란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남다른 심미안과 폭넓은 경험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 높은 허들에 ‘영화 기자’라는 직업의 필자도 스스로 손사래를 치는 바이다.
배우 홍경은 (본인은 부인하지만) 분명한 시네필이다. ‘영화를 떼고 산 시간보다 붙이고 산 시간이 더 길다’는 홍경은 그간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영화에 대한 사랑을 감추지 못했다. ‘영화를 추천해 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예상치 못한 작품을 내놓으며 자신의 취향을 덧붙이는 그에게서 확실한 시네필의 향취를 느꼈다. 이하 홍경이 추천한 작품 중 일부를 갈무리했다. 1960년대 일본의 흑백 영화부터 2021년 미국의 흑백 영화까지 홍경의 취향이 잔뜩 묻어난 영화는 무엇인지 살펴보자.
<컴온 컴온>(2021)

영화 <컴온 컴온>은 어린이를 인터뷰하는 라디오 저널리스트 조니(호아킨 피닉스)가 갑작스럽게 9살 조카 제시(우디 노먼)를 돌보게 되며 시작한다. 어머니 투병생활 중 의견 차이로 사이가 멀어진 여동생 비브(가비 호프만)는 조니에게 남편을 돌보기 위해 자리를 비워야 한다며 제시를 맡긴다. 삼촌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시는 어린이를 대하는 것에 프로인 조니마저도 감당이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아이로 자랐다. 가족이기에 오히려 남보다 더 불편한 이들은 비브의 일정이 길어지면서 함께 인터뷰를 위한 여정을 떠난다.
영화는 조니와 제시의 소통에 초점을 맞추며 두 인간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다. 어른은 아이에게, 아이는 어른에게 귀를 기울이고 서로를 독려하면서 그간 머물렀던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두 인물의 성장이 외연적인 사건이 아닌 긴밀한 역학관계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영화는 휴먼 드라마의 진가를 발휘한다.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요즘, 9살 아이의 "Come on(힘 내)"이라는 한마디에 마음을 뺏긴다.
<팬텀 스레드>(2017)

1950년대 런던, 영국 패션계를 사로잡은 의상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강박적인 루틴 아래 일에만 몰두한다. 그에게 사랑(여성)이란 영감을 주지만 아주 성가신 존재이다. 그런 레이놀즈 우드콕 앞에 맑고 순수한 영혼의 알마(비키 크리엡스)가 나타나고 둘은 서로에게 완전히 빠지게 된다. 하지만 역시나 자기 자신과 예술만이 중요한 레이놀즈 우드콕은 알마의 행동이 계속해서 거슬리고 알마는 레이놀즈 우드콕을 완전히 소유하기 위해 그를 무너뜨리기로 한다.
영화 <팬텀 스레드>는 소름 돋게 아름답고 잔인한 사랑의 속성에 대해 다뤄낸다. 통제적인 생활 속에서 스스로 ‘강하다’고 말하는 남자 레이놀즈 우드콕과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면서 레이놀즈에게 ‘강한 척하지 말라’며 관계에서 제 몫을 하려는 여자 알마의 만남은 그 자체로 비극적이다. 이런 두 사람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결국 그들을 더욱 끈적한, 불가분의 관계로 만들었다. 가학과 피학을 넘나드는 이들의 병리적인 사랑을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우아한 연출로 담아냈다.
<바람난 가족>(2003)

개봉한지 무려 20여 년이 지난 <바람난 가족>은 지금 봐도 놀라울 정도로 파격적이다. 배우 문소리의 세미누드 포스터에서 예상할 수 있듯 영화는 '날 것' 그 자체의 모습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그때 그사람들>(2005), <하녀>(2010) 등 시대를 뛰어넘는 문제작을 연출해 온 임상수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가족'이라는 뻔한 영화적 소재의 이면을 파헤쳐 많은 이들이 외면해 왔던 가족의 어두운 면을 조명한다.
영화에는 두 부부가 등장한다. 변호사 주영작(황정민)과 그의 아내 은호정(문소리) 그리고 주영작의 부모 주창근(김인문)과 홍병한(윤여정). 두 부부는 서로에게 질릴 대로 질려 무심하지만 가족 제도에 매여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삶의 무료함과 좌절감에 젖은 이들은 혼외 관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결국 가족은 무너지고 만다.
한 가정이 붕괴하는 과정을 그린 <바람난 가족>은 한편으로는 일그러진 관계 속에서 벗어난 인간이 자신을 찾아가는 시간을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영화는 인간과 인간, 그 관계로 만들어지는 가족의 모습을 다각도로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개인과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펀치 드렁크 러브>(2002)

‘Punch-Drunk Love(펀치 드렁크 러브)’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랑에 한 방 맞아 얼얼해질 정도로 푹 빠진 사랑을 의미한다. 그 자체로 낭만적인 이 사랑의 주인공은 배리(아담 샌들러). 7명의 누나를 둔 이 남자는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아가지만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등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배리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여자 레나(에밀리 왓슨)에게 빠져 허우적댄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주인공 배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간이다. 푸딩을 사서 마일리지를 모은다거나 갑자기 벽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등 비합리적인 행동 패턴을 반복한다. 배리의 이러한 모습은 오히려 레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 후 이해 가능한 범주로 들어오게 된다. 원래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합리성을 잃는다는 걸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영화 <팬텀 스레드>의 감독이기도 한 폴 토마스 앤더슨은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전작 <매그놀리아>(1999)에 이어 이 작품으로 칸국제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어 2012년 영화 <마스터>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은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 3대 영화제를 석권한 거장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흐트러지다>(1964)

영화 <흐트러지다>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1964년작으로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여성 레이코(다카미네 히데코)가 시동생 코지(가야마 유조)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는다. 결혼한 지 반 년 만에 남편을 잃은 레이코는 18년간 홀로 가장 노릇을 하며 시어머니를 모신다. 레이코의 시댁은 그의 희생으로 어엿한 가게를 가지게 되었지만 결정적인 순간 레이코를 외면하며 출가를 종용한다. 이런 레이코의 편이 되어준 유일한 사람은 시동생 코지. 코지 역시 대학을 졸업했지만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신세이다. 시댁의 반목과 코지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속에 레이코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소위 ‘막장’이라고 할 수 있는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유려하게 느껴지는 것은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 덕이다. 나루세 미키오 감독은 가정과 사회의 외톨이로서 동질감을 느끼며 점점 가까워지는 레이코와 코지의 사랑을 간접적으로 담아낸다. 야간열차에서 코지가 천천히 레이코에게 다가가는 장면은 영화 <흐트러지다>의 이러한 성격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신이다. 더해 레이코 역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는 아역시절부터 약 30여 년간 쌓아온 연기 공력의 끝을 선보이며 제17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