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5일(한국시각) 열린 2018년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주목받은 감독이 있습니다. 바로 데뷔 25년 만에 감독상을 수상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입니다. 그의 신작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시작으로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휩쓴 데 이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 등 4관왕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름부터 특이하고, 영화도 독특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보실까요?


왜 이렇게 괴물을 잘 만들어요?
<판의 미로>의 판, <셰이프 오브 워터>의 어인

델 토로 감독의 트레이드 마크는 바로 ‘괴물’이죠. 그의 영화에는 괴기하고도 인상적인 괴물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가 이토록 괴물을 잘 그리는 건 괴수 영화를 사랑하는 본인의 취향 덕이자, 스스로 특수분장의 위력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엑소시스트> 메이크업과 특수효과를 담당하고 <아마데우스>로 아카데미 분장상을 수상한 딕 스미스에게 분장과 특수효과를 배우며 영화계에 입문했거든요. 10년가량 메이크업 슈퍼바이저로 일했으니 자연스럽게 그의 영화엔 괴물을 잘 구현할 노하우가 녹아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 / <미믹>

또 델 토로 감독은 어릴 적부터 곤충에 관심이 많아 그런 형태의 괴물을 항상 상상해왔습니다. 영화 현장에 뛰어든 20대 때부터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현재 <기예르모 델 토로의 창작 노트>라고 출간된) 글과 그림으로 남기며 자신의 영감을 끊임없이 자극했죠. 델 토로 감독은 굉장히 신실한 가톨릭 신자인 할머니와 유년기를 보냈다는데요, 그래서 델 토로 감독의 작품에선 기괴함과 성스러운 신화적 이미지가 동시에 발현된다고 평가받습니다.


이 사람 미국 사람/스페인 감독 아녀요?

국내에서도 <판의 미로>가 워낙 유명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이 할리우드 감독인지, 스페인 감독인지 헷갈려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델 토로 감독은 멕시코 출신이지만 할리우드와 멕시코를 오가며 활동했습니다. 멕시코에서 1993년 불사의 기계 장치 ‘크로노스’를 둘러싼 뱀파이어 영화 <크로노스>로 데뷔했습니다. 이 영화가 칸 영화제 비평가 주간 대상을 수상하면서, <미믹> 연출로 발탁돼 할리우드에서 첫 영화를 만듭니다. 하지만 당시 제작자(와인스타인 형제)의 월권으로 예상과 완전히 달라진 완성본에 질려 다시 멕시코로 돌아오죠. (이후 2011년에서야 <미믹> 감독판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크로노스> / <미믹> 현장의 델 토로 감독


이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도움을 받아 <악마의 등뼈>를 내놓습니다. 스페인 내전 중 고아원을 그린 이 잔혹동화가 성공을 거두면서 할리우드에서 다시 <블레이드 2> 연출을 제안합니다. 세련된 액션과 그 특유의 괴수 디자인을 혼합시킨 델 토로 감독은 자신의 드림 프로젝트, 마이크 미뇰라의 어반 판타지(도심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헬보이> 영화화에 도전하죠.

<악마의 등뼈>


델 토로 감독은 무조건 론 펄먼을 헬보이로 출연시켜야 한다는 조건을 걸면서 <헬보이>를 구현하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흥행 결과는 썩 좋지 않아서, 차기작에 바로 돌입하진 못하고 새로운 작품을 집필합니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이하 <판의 미로>)입니다. 미국, 멕시코, 스페인 삼국 합작에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제작자로 나선 <판의 미로>는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한 소녀의 눈을 빌린 동화로 승화시켰습니다. 빠듯한 촬영 일정에 델 토로 감독은 체중이 20kg나 줄었지만, 덕분에 자신의 최고작이자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완성시킵니다.

<판의 미로>

<판의 미로>로 입지가 높아진 델 토로 감독은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와 원작자인 마이크 미뇰라와 함께 <헬보이 2 : 골든 아미>(이하 <헬보이 2>)를 만들어갑니다. 1편의 어반 판타지 호러 대신 트롤 마켓과 요정 세계를 그리면서 특유의 미적 감각을 과시했지만, 이번에도 흥행에 실패하면서 한동안 연출이 아닌 제작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스플라이스>, <비우티풀>, <가디언즈> 등에 창작 컨설턴트나 총괄 제작으로 이름을 올렸죠.

<퍼시픽 림>

마침내 2013년, 5년 만에 <퍼시픽 림>을 연출합니다. 괴수물이라면 동서양 가리지 않고 섭렵한 감독답게 괴수 묘사나 메카닉 액션 등 거대괴수·거대메카닉물의 로망을 다 보여주면서 소원 성취합니다. 이후 2015년, 시나리오, 연출, 제작까지 1인 3역을 소화한 고딕 호러 <크림슨 피크>를 내놓습니다. 스스로 “최고작”이라 칭할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었지만, 역시 흥행 결과는 본전치기도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합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

그리고 심기일전해 연출한 영화가 이번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입니다. 그동안 흥행 면에서도, 비평 면에서도 계속 내리막길이란 평가를 받던 델 토로 감독이 단번에 다시 호평 세례를 받게 됐습니다. 아카데미 최다 노미네이트라는 영광까지도요! 현재 그는 알폰소 쿠아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에 이어 감독상 후보로 지목된 세 번째 멕시코인 감독입니다.


이 감독님을 왜 성덕이라고 하죠?

영화 팬들은 델 토로 감독을 ‘성덕’(성공한 덕후)이라고 부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영화뿐만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분야가 정말 폭넓고, 영화감독이 된 지금도 여전히 다른 분야에 대한 덕질을 멈추지 않고 있거든요.

블리크 하우스의 델 토로 감독

그래도 영화인이니까 영화 덕질부터 볼까요? 본인의 영화 소품이나 의상은 물론, 자신이 좋아하던 고전 호러 영화 물품을 수집하던 델 토로 감독은 수집품을 둘 곳이 부족해 집을 따로 마련했습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하우스, 또는 ‘블리크 하우스’라 불리는 이곳엔 약 600여 점의 전시품이 있습니다. 실제로 2016년에는 전시전을 열어 관람객들에게 오픈하기도 했습니다.

2013년, 일본 방송 출연 당시 모습

델 토로 감독은 일본의 괴수물, 메카닉물에도 상당한 덕력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아키하바라에 가서 관련 물품들을 잔뜩 구매하는 걸로 유명하죠. 방송에 출연해서도 가뿐히 40만 원 가량의 물품을 구매하고, 자신이 인터뷰 중 언급한 괴수가 현장에 등장하자 해맑게 웃는 모습에서 덕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 블리자드사에서 일본 메카닉물을 패러디한 영상을 공개하자 이를 공유하면서 "너무 아름답다!"고 트윗을 날린 적도 있습니다.

코지마 히데오의 ‘코지마 프로덕션’에 방문한 인증샷들.

여기서 끝일 리가요! 델 토로 감독은 ‘메탈 기어’ 시리즈의 일본 게임 제작자 코지마 히데오와도 상당히 가깝습니다. 최근 일본 방문했을 때도 함께 식사하는 인증샷을 공개했을 정도로요. 두 사람은 <사일런트 힐즈>라는 공포 게임을 함께 기획했었지만, 제작사와의 불화로 아쉽게 완성시키지 못했습니다. 현재 델 토로 감독은 코지마 히데오의 프로덕션에서 제작 중인 <데스 스트랜딩>에 자신을 스캔한 캐릭터가 나오게끔 허락해줘 게임 트레일러에 등장하기도 했죠. 물론 연기는 다른 사람이 했다지만요.

<데스 스트랜딩> 속 델 토로 감독의 모습

그가 만든 괴수 디자인을 보여주세요!

백문이 불여일견. 그의 영화 속 수많은 괴수 중 델 토로 감독의 창작 노트에서 나온 괴수들을 모았습니다.

제프 빅터가 요약한 델 토로 감독의 작품 연대기
<헬보이 2>
<헬보이 2>
<블레이드 2>
<헬보이 2>
<판의 미로>

이 감독의 취향을 알려주세요!

크라이테리온에서 소개한 델 토로 감독이 선정한 10편의 영화는 이렇습니다.

<오니바바>
<거미의 성> (구로사와 아키라)
<제7의 봉인> (잉그마르 베르히만)
<미녀와 야수> (장 콕토)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린)
<시간 도둑들> (테리 길리엄)
<오니바바> (신도 카네토)
<스파타커스> (스탠리 큐브릭)
<설리반의 여행> (프레스턴 스터지스)
<뱀파이어>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벌집의 정령> (빅토르 에리세)

갑자기 성덕에서 급격히 멀어지는 느낌이 조금 들지만, 델 토로 감독이 선정한 영화는 이렇습니다. 물론 그의 개인 취향이 더 강하게 들어간, 공포영화 BEST 6는 또 다릅니다.

<프릭스>
<프릭스> (토드 브라우닝)
<언인바이티드> (루이스 앨런)
<공포의 대저택> (잭 클레이튼)
<죠스> (스티븐 스필버그)
<에이리언> (리들리 스콧)
<샤이닝> (스탠리 큐브릭)

더불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자 생명체는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괴물과 <해양 괴물>의 아가미 인간이라고 합니다. 좋아하는 음반은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The Wall)>과 피터 가브리엘의 <시큐리티(Security)>라는 것도 참고!


또 다른 소소한 이야기를 알려주세요!

엠버, 호박색을 가장 잘 쓰는 감독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판의 미로>, <헬보이 2> 시절엔 ‘호박색=판타지 세계’라는 원칙이 굉장히 철저했습니다.


(시계방향) 론 펄먼, 더그 존스, 페데리코 루피

영화에서 론 펄먼, 더그존스, 페데리코 루피를 자주 출연시킵니다. 론 펄먼과는 지금까지 6편을 같이 했고요, 더그 존스는 (드라마 <스트레인> 포함) 7편, 페데리코 루피는 할리우드 영화를 제외한 세 편에 모두 출연했습니다.


델 토로 감독이 연출할 뻔했던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호빗>

만들 ‘뻔’했던 작품이 많습니다. <블레이드 2> 이후 <블레이드 트리니티>, <에이리언 대 프레데터>,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연출 제안을 받았으나 <헬보이>를 위해 포기했고요, <나는 전설이다> <착신아리>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를 거절하고 <헬보이 2>를 만들었습니다. 원래 <호빗> 삼부작의 연출로 발탁됐지만 제작사가 파산하면서 촬영 일정이 불투명해지자 연출을 포기했습니다(대신 각본에 이름이 올라갔죠). 이외에도 <엔드 오브 데이즈>, <헬레이저 4>의 연출로 거론됐으나 거절했답니다.


다큐멘터리 <러브크래프트: 피어 오브 언노운>에 출연한 델 토로 감독

코스믹 호러의 원류인 H.P.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을 영화화할 뻔했습니다. 하지만 예산의 문제로, 등급의 문제로 투자사가 계속 바뀌면서 점차 미뤄졌죠. 그러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프로메테우스> 예고편을 보고 “저 영화랑 비슷하겠다”며 영화화를 중단했었는데요, 본편을 본 후 다른 영화가 나올 수 있을 거라며 언젠가는 영화화할 것이라고 했다네요.


이냐리투, 쿠아론, 델 토로 감독

멕시코 출신 감독들과 친합니다. 알폰소 쿠아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의 친분은 물론이고, 미국인이지만 멕시코 영화로 데뷔한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과도 절친이라고 하네요.


Treehouse Of Horror XXIV Couch Gag By Guillermo Del Toro | Season 26 | THE SIMPSONS

<심슨 가족> 시즌 25의 할로윈 특집 오프닝을 연출했습니다. 델 토로 감독의 공포영화 덕력이 무한정 발휘된 오프닝이라 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퍼시픽 림> 촬영 당시, 일본 아역 배우 아시다 마나가 자신의 이름을 어려워하자 “토토로상이라고 불러”라고 친절한(!) 모습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역시 덕력이 상당하죠. 

덕분에 촬영장 뒷모습을 담은 오른쪽 움짤엔 <My Neighbor Guillermo Del Toro(이웃집 델 토로)>란 제목이 붙었습니다.

토토로… 델 토로 감독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잔혹한 동화, 괴기하면서 아름다운 괴수의 대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1년간 연출을 쉬겠다고 밝혔습니다. 대신 75회 베니스영화제 심사위원, 개봉을 앞둔 <퍼시픽 림: 업라이징>의 총괄 제작 등으로 꾸준히 얼굴을 비출 예정이라 하니, 푹 쉬시고 앞으로도 좋은 영화 많이 만들어주시길!

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