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론 사가>는 1990년대 중반 <에이지 오브 아포칼립스> 스토리라인과 함께 당시 마블 코믹스 역사상 유례가 없던 긴 스토리와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 대서사시이다. 연재 당시 판매량은 마블 코믹스의 다른 모든 타이틀들을 합해놓은 것보다 많을 정도로 높은 판매 부수를 기록하였다. 하지만 후세에는 별로 좋은 의미로 기억되지 못하고, 일부 평론가들은 마블 코믹스의 격동기에 저지른 가장 큰 실수 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클론 사가>라 명명되는 이 스토리는 스파이더맨과 스파이더맨의 클론 벤 라일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다룬다. 어느 날 스파이더맨과 유사한 형태와 능력의 스칼렛 스파이더라는 히어로가 등장하는데, 알고 보니 배후에 엄청난 음모와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원래는 길어야 딱 1년 정도 연재 분량으로 기획하였으나, 초반에 독자층의 호응이 너무 좋고 책이 잘 팔리자 TV 드라마 등의 관행대로 억지로 스토리를 연장했다. 그렇게 해서 장장 2년간의 연재 기간 후 종결된 <클론 사가>는 당시까지 존재했던 마블 코믹스의 그 어떤 스토리라인보다 방대한 스토리가 되었다. <클론 사가>의 전체 분량이 3000페이지를 넘겼는데, 이는 당시 경쟁사 DC 코믹스의 장기 연재물 <슈퍼맨의 죽음>이나 <나이트폴>에 비등할 정도였다.

<클론 사가>가 인기를 얻자, ‘스파이더맨의 클론이라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49(1975년 발간)도 덩달아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스파이더맨의 적수이자 유능한 생명공학 박사인 악당 재칼은 죽은 그웬 스테이시의 클론에 이어 스파이더맨의 클론을 만들어낸다. 이 스토리의 클라이맥스에서 서로가 진짜라 믿고 있는, 외형적으로는 똑같은 스파이더맨과 스파이더맨의 클론은 스타디움에서 최종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재칼이 설치한 폭탄 때문에 둘 중 한 명은 사망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이 스토리에서는 과연 죽은 것이 가짜인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남기지 않는데, 그웬 스테이시의 클론이 당신이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라고 묻자 살아남은 스파이더맨은 증명할 길이 없다고 대답한 것이다.

<클론 사가>의 후반부, 제작진은 독자들의 흥미를 고조시킬 만한 스토리의 반전을 고심하다 이 결말을 약간 변형시킨 무리한 내용을 집어넣는데, 이로 인해 독자들의 공분을 사게 된다. 피터 파커와 벤 라일리 중 누가 진짜이고 누가 클론인지 궁금해 유전자 검사를 해보는데, 벤 라일리가 진짜로 나온 것이다. 충격적이긴 하지만 주워 담기 힘든, 너무 황당하게 심한 설정 파괴였던 이유로 그때까지 열심히 <클론 사가>를 읽던 독자층 대다수가 등을 돌리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스토리 리부트가 연중행사처럼 이루어지고 수많은 평행우주 세계관이 존재하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거의 40년 동안 연속성 있게 연재되던 스파이더맨 간행물들을 읽어 오던 독자들을 기만하는 행동에 가까웠다.

<스파이더맨>(2002) 속 스파이더맨과 그린 고블린

다시 급격히 판매량이 떨어지고, 연재 기간 2년을 바라볼 정도로 길어지며 피로감이 찾아들자 편집부는 잘못된 결정들을 수습하고 스토리를 빨리 마무리하기 위해 또 하나의 무리수를 두는 최악의 결정을 내리게 된다. 더욱 황당무계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집어넣은 것이다. 스토리의 종반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은 스파이더맨의 적수 그린 고블린이 꾸민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유전자 검사 결과도 그린 고블린이 조작한 것이고, 심지어는 악당 재칼도 그린 고블린에게 속아 넘어간 것이라는 결말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스토리를 지탱해 온 축 중 하나였던 벤 라일리도 마지막 회에서 죽여버린다. 한 마디로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은 꿈이었습니다에 가까운 결말인데, 당연히 독자들은 분개하고 이후 출간된 마블 코믹스의 타이틀들에 대한 불신감, 그리고 나아가서는 90년대 후반 마블 코믹스의 도산 위기에까지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시리즈는 후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일단 이 시리즈 이후에 작가들은 스토리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거리낌 없이 갖다 쓰기 시작하였으며, 죽은 캐릭터들이 아무 설명 없이 되살아나는 것도 관행이 되었다. 그린 고블린은 1973년 유명한 “그웬 스테이시의 죽음스토리라인 이후 계속 죽은 상태였는데, 그린 고블린을 갑자기 별다른 설명 없이 부활시켜버리며 마블 유니버스의 죽은 다른 캐릭터들도 편집부에서 필요로 한다면 별다른 논리적 설명이나 해명 없이 부활시켜 쓸 수 있다는 선례를 마련했다.

또한 이후에 나온 많은 스토리들에 영감이 되었는데, 수많은 스파이더맨의 클론들과 유사 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스파이더 아일랜드스토리나 이러한 설정을 우주 범위로 확장한 <스파이더버스> 등은 <클론 사가>에서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스토리들이다. 또한 <클론 사가연재 전후로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던 캐릭터들도 현대에 와서 재조명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캐릭터가 1998년 만들어진 스파이더 걸이다. 실제로 <스파이더맨: 홈커밍>의 주연 톰 홀랜드는 추후 스파이더맨 영화에 스파이더 걸과 맞붙는 장면이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한 적이 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감독 존 왓츠

출연 톰 홀랜드, 마이클 키튼

개봉 2017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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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서 / 그래픽 노블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