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남자가 죽었다. 죽음이 도처에 깔린 시대라지만, 영화는 그 남자의 죽음을 듣고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다른 남자의 뒤를 따른다. 이 남자는 추기경 토마스 로렌스. 오늘 세상을 떠난 남자는 가톨릭의 수장 교황이다. 성직자 중 가장 높은 자리와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교황의 죽음. 성스러운 광경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자리에 모인 누구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기도를 읊고자 모인 추기경들의 시선엔 어딘가 긴장감이 맴돈다. 장례 기도를 마친 추기경이 교황에게서 ‘어부의 반지’를 꺼내려 하는데, 이미 사후경직이 시작된 교황의 손에서 반지는 쉽게 빠지지 않는다. 힘을 줘 간신히 반지를 빼내고, 어부의 반지를 분해해 교황의 공석을 공식화한다. 그제야 토마스 로렌스 추기경이 눈물을 흘린다. 이 5분 남짓의 오프닝에서, <콘클라베>는 성직자 가득한 이곳에 신성함을 거둬내고 인간 토마스 로렌스의 시선으로 관객들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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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콘클라베’는 교황이 서거한 후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투표를 가리킨다. 세계의 추기경들이 모여 외부와의 교류를 단절한 채 참석인 3분의 2를 초과한 표를 얻는 차기 교황이 나올 때까지 콘클라베는 끝나지 않는다. 매 투표가 끝난 후 색 연기를 피워 투표 결과(선출, 미선출 등)를 알린다. 신자들에겐 앞으로의 가톨릭을 이끌 리더의 탄생으로, 비신자들에겐 선출이 없다면 끝나지 않는 투표 시스템으로 콘클라베는 종교적 지도자의 서거라는 슬픔에서 이어지는 전 세계적 이벤트로 취급받기도 한다.

영화 <콘클라베>는 이 콘클라베의 진행을 담당한 추기경단 단장 토마스 로렌스(랄프 파인즈)를 중심인물 삼아 콘클라베를 세심하게 묘사한다. 원작 소설을 집필한 로버트 해리스는 언론계 출신답게 콘클라베의 진행 과정을 상당히 촘촘하게 담았고, 영화 또한 이를 시각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치중한다. 외부와의 단절을 위해 모든 창문을 막고, 개인전화를 수거하는 등의 과정을 간결하게라도 담아낸다.
교황의 서거 3주 후, 콘클라베 기간 모든 시중을 책임질 빈센트 수녀회와 차기 교황 선출에 호출된 추기경들이 현장에 도착한다. 이들 사이에선 이미 차기 교황 후보자와 지지 세력 간의 묘한 신경전이 팽팽하다. 로렌스 추기경은 그 와중 교황의 마지막 면담에 관한 어떤 제보를 받는다. 바로 교황이 트랑블레 추기경(존 리스고)을 해임했다는 것이다.
담담하게 콘클라베를 준비하던 로렌스 추기경의 마음에 파문이 인다. 트랑블레 추기경은 차기 교황 유력 후보 중 한 명. 그런 그가 해임이 됐다면 이 사실을 공표해야 한다. 하지만 교황,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엔 외부 교류를 최소화 해야 한다. 거기에 한 술 더 떠 의중 결정 추기경(교황이 공식 발표 없이 선임한 추기경) 임명장을 가져온 빈센트 베니테스 추기경(카를로스 디에즈)까지 나타난다. 갑작스러운 교황의 서거에 이런 미스터리한 상황이 이어지는 콘클라베에서 로렌스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대응할지 고민에 빠진다.


이처럼 <콘클라베>는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성스러운 의식으로 콘클라베를 지켜보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 와 알 수 없는 개인(교황)의 의중이 세상에 남겨졌을 때, 그것을 처리해야 하는 인물에게 던져진 미스터리 그 자체로 콘클라베를 그린다. 이는 신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성직자의 시선과도 일맥상통한다. 콘클라베를 진행할 책임이 있어 의문스러운 현안들을 무시할 수 없는 로렌스 추기경은 누아르의 탐정처럼 움직이게 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자신이 몰랐던 인물들의 면모를 직면한다. 거기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서받기 힘든 참담한 현실도, 세력의 권력을 붙잡고자 옳지 않은 일마저 강행하는 비열함도 공존한다. 미스터리, 탐정추리극, 마지막은 군상극까지. <콘클라베>는 콘클라베 하나를 경유하며 관객들에게 지적 흥미를 충족한다.
의심하는 교황을 뽑기 위한 여정

<콘클라베>는 정치드라마의 성격까지 띤다. 종교인들의 이야기이나 ‘지도자를 뽑는 투표’라는 부분은 민주주의 시민이 경험한 그것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콘클라베>는 이런 정치적 색을 외면하지 않고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낸다. 콘클라베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로렌스 추기경과 벨리니 추기경(스탠리 투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차기 교황으로 지지를 받는 벨리니가 “나 스스로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요?”라고 말하자 로렌스는 웃으며 “누구보다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럼 지지자들에게 뽑지 말라고 선언하세요”라고 받아친다. 이에 벨리니는 테데스코 추기경을 잠시 쳐다보곤 “그럼 저자에게 주라고요? 그렇겐 못합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심지어 그는 나중에 지지자들에게 “나는 모든 면에서 테데스코와 반대라고 전하세요”라고 밝힌다.

이 장면은 앞으로 <콘클라베>가 제시할 군상, 단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근본주의자로 가톨릭의 전통적인 계율을 다시 세우려는 테데스코와 시대에 발맞춘 개방적인 가톨릭을 지향하는 벨리니를 대비해 현재 극단적으로 흐르는 사회 양상을 보여준다. 동시에 자신은 결코 리더가 될 수 없다면서도 반대를 위해 표를 얻으려는, 벨리니의 이중적 태도를 내비쳐 현실 정치를 들여다보게 한다. <콘클라베>는 무엇이 옳은가 웅변하진 않지만 극중 바오로의 말을 인용하는 로렌스를 통해 현대 사회의 다양성과 자기 확신의 위험성을 분명하게 전한다.
로렌스 추기경의 미스터리 추적이 계속되면서 콘클라베의 판도는 끊임없이 변동한다. 이 지점에서 유권자임과 동시에 후보인 로렌스의 딜레마는 강화되고, 이는 미스터리를 해소하고자 ‘탐정’을 자처한 그에게 영향을 미친다. 자신도 유권자이기에 외부의 영향을 받아선 안되고, 그럼에도 차기 교황에 올바른 사람을 세워야 하는 양가적 상황은 로렌스와 관객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거듭 고민하게 한다.

적/흑/백의 하모니, 모던함의 불협화음


이렇게 <콘클라베>는 소설 원작 영화답게 텍스트, 혹은 콘텍스트로 읽는 재미가 있다. 물론 거기에 영화적 재미까지 확실히 챙긴다.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일개 병사가 바라보는 전장의 참혹함과 부조리를 드러냈던 에드워드 버거 감독은 <콘클라베>로 보다 정갈한 미적 형식을 과시한다. 사제복을 이루는 세 가지 색상, 붉은 색-검은 색-흰색을 아우르는 미술은 모던함을 극도로 끌어내며 콘클라베의 폐쇄적인 환경을 비주얼로 승화한다. 에드워드 버거의 파트너이자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한 볼커 베텔만은 이번에도 반복적인 음률, (특히 해당 영화와 안 어울릴 법한) 악기를 활용한 음악으로 로렌스가 당면한 현실의 어려움을 부각한다.
그리고 이 정갈하기에 불협화음으로 변모하는 영화의 마침표는 역시 배우들이다. 이번 영화로 <잉글리쉬 페이션트> 이후 28년 만에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로 지명된 랄프 파인즈는 로렌스의 딜레마와 올곧은 성격을 성직자 특유의 엄숙한 표정으로 녹여낸다. 벨리니 역 스탠리 투치, 트랑블레 역 존 리스고, 아그네스 역 이사벨라 로셀리니 등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들은 물론이고 아데예미 역 루시안 므사마티, 베니테스 역 카를로스 디에즈(Carlos Diehz) 등 다소 낯선 얼굴들까지 로렌스의 행적을 탄탄하게 받쳐주며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콘클라베>는 이렇게 다양한 장르, 특징을 경유하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어쩌면 반전일 수도,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는 이 최후의 투표 결과는 영화에서 거의 암시하지 않은 ‘신’ 혹은 ‘운명’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이 결과가 이로움으로 이어질까? 콘클라베 투표 전 기도처럼 올바른 교황에게 간 것이 맞을까?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영화 내내 이곳에서 저곳, 이 공간에서 저 공간으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했던 수많은 문들처럼, 극중 콘클라베의 결과는 세계의 문이 될 것이다. 영화 <콘클라베>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는 ‘문’이 될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