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4월 5일, 일본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비보가 들려왔다.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다. 향년 82세.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스튜디오 지브리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카하타 감독, 그를 기억하는 마음으로 그의 연출작들을 짚어봤다.


소녀, 소년, 동화
<늑대소년 켄> /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

TV 애니메이션 <늑대소년 켄>(1964), 극장판 애니메이션 <태양의 왕자 호루스의 대모험>(1968)을 연출한 다카하타는 즈이요 엔터프라이즈로부터 <알프스 소녀 하이디>(1974, 이하 <하이디>)의 연출을 의뢰받았다. 다카하타는 극중 배경을 묘사할 수 있게 반드시 해외 취재가 필요하다고 어필해 일본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의 해외 로케이션 취재를 성사시켰다. 당시 일본 분위기와 맞지 않는 기독교적 내용을 보편적인 일상 이야기로 수정했다. 다카하타 감독의 진두지휘 하에 완성된 <하이디>는 최고의 대박을 터뜨리면서 <플란다스의 개>, <소공녀 세라> 등으로 이어질 ‘세계명작극장’ 시리즈의 포문을 열었다.

<알프스 소녀 하이디>
알프스 소녀 하이디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개봉 1974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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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찾아 삼만리>

그의 차기작은 제목만 들어도 울컥하는 <엄마찾아 삼만리>(1976). <엄마찾아 삼만리>는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의 ‘아펜니노산맥에서 안데스산맥까지’를 바탕으로,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엄마를 찾아떠난 9살 소년 마르코의 여행을 그렸다. 워낙 마음 아픈 이야기라 그런지 지금은 그렇게 열정적인 팬층이 보이진 않지만, 방영 당시 시청률 30%를 돌파하는 저력을 발휘했고 1999년 극장판 <엄마 찾아 삼만리-극장판 마르코>가 제작되기도 했다.

엄마 찾아 삼만리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쿠스바 히로미

출연

개봉 1976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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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

‘세계명작극장’의 정점을 찍은 <빨강머리 앤>(1979)도 다카하타가 연출을 맡았다. 캐나다 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소설을 애니메이션화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꾸준히 사랑 받고 있다. 국내에도 여러 번 방영돼 ‘빨강머리 앤, 귀여운 소녀’로 시작하는 주제가가 유명하다. <하이디> 때처럼 제작진이 직접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방문해 애니메이션에 반영했고, 작중 시간의 흐름에 맞춰 캐릭터 디자인을 세세하게 변경하는 등 집요하게 완성도를 높여 극찬을 받았다.

<빨강머리 앤> 명대사.
빨강머리 앤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바바 켄이치, 코시 시게오, 쿠스바 코조

출연 야마다 에이코, 키타하라 후미에, 사이카치 류지, 아소 미요코

개봉 1979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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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추억, 전설
스튜디오 지브리
(왼쪽부터) 지브리 삼인방 미야지키 하야오, 스즈기 토시오, 타카하타 이사오.

1985년, 다카하타는 토에이 애니메이션 사에서 만나 자주 협업한 미야자키 하야오와 제작사 ‘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를 차렸다.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대명사가 된 지브리의 첫 작품은 <천공의 성 라퓨타>(1986). 미야자키가 각본과 연출을 맡고, 다카하타는 프로듀서를 담당했다. 소년소녀의 모험 활극과 자연과 인간의 대립을 접목한 이 작품이 성공하자 지브리의 행보에 이목이 집중됐다. 다카하타는 전쟁 속 일본을 그린 <반딧불이의 묘>(1988)를 차기작으로 공개했다.

<반딧불이의 묘>

<반딧불이의 묘>는 노사카 아키유키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한 남매의 피난 생활에 초점을 맞췄다. 제2차 세계대전 전쟁통에 곳곳을 떠돌다 마침내 보금자리 하나 없이 쓸쓸히 사라진 세이타, 세츠코 남매의 이야기는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다. 일반인의 비극을 묘사해 전범국이 피해자 행세를 한다는 비난과 군인의 자식들에 빗댄 자기반성적 이야기라는 반박이 지금도 이어지면서 때때로 문제작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반딧불이의 묘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타츠미 츠토무, 시라이시 아야노, 시노하라 요시코

개봉 1988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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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방울방울>

다음 작품은 <추억은 방울방울>(1991).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배달부 키키>(1989) 다음 작품이라 판타지적인 미야자키, 현실적인 다카하타, 두 감독의 작품 성격이 더 뚜렷해졌다. 오카모토 호타루와 도네 유코의 만화를 옮긴 <추억은 방울방울>(1991)은 도쿄에서 일하다 휴가를 내고 야마시타현 시골에 온 타에코가 주인공이다. 현재(1980년대)와 추억(1960년대)의 이야기를 통해 과연 행복이란 무엇인지 되묻는 감성적인 작품이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나 <리틀 포레스트>를 생각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추억은 방울방울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이마이 미키, 야나기바 토시로, 혼나 요코

개봉 1991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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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은 원작 없는 오리지널 작품. 너구리가 머리에 나뭇잎을 얹으면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전설을 반영해 보금자리를 빼앗긴 너구리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도쿄 근방 타마 구릉지에 살던 너구리들이 개발 계획인 뉴타운 프로젝트로 인해 그들의 숲이 파괴되자 이에 대항하는 내용이다. 능청스러운 캐릭터와 여러 상황들이 웃음을 주는 코미디 영화지만, 인간에 대한 풍자와 냉소적인 시선도 곳곳에 스며들었다. 판타지를 이용해 현실을 비판하는 다카하타 감독의 특징이 돋보였다. 당시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과 흥행 다툼을 벌였는데, <라이온 킹>보다 6억 엔을 더 벌어들일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두 달여간 3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신초우 코콘데이, 노노무라 마코토, 이시다 유리코, 미키 노리헤이, 키요카와 니지코, 이즈미야 시게루, 아시야 간노스케, 무라타 타케히로, 카츠라 베이초우, 카츠라 분시, 야나기야 코산, 카미야 아키라, 하야시바라 메구미

개봉 1994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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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아날로그, 장인 정신
<이웃집 야마다군> 원작 만화
<이웃집 야마다군>

 콘도 요시후미가 <귀를 기울이면>(1995)을 공개하고, 미야자키 하야오가 <모노노케 히메>(1997)를 은퇴작으로 내놓을 때, 다카하타 이사오는 <이웃집 야마다군>(1999)에 도전했다. <이웃집 야마다군>이 ‘도전’인 이유. 하나, ‘아사히’ 신문에 연재된 4컷 만화를 극장판으로 만드는 것. 둘, 파스텔톤의 셀 애니메이션처럼 보이지만 지브리 사상 최초의 디지털 애니메이션이란 점. 도전은 다소 아쉬운 결과를 낳았다. 평론가들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디지털로 작업하면서 배로 들어간 제작비는 회수하지 못해 다카하타는 공백기에 접어든다.

이웃집 야마다군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마스오카 토오루, 아사오카 유키지

개봉 1999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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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케토리 모노가타리’ 설화를 바탕으로 한 그림.

2008년, 지브리는 다카하타가 2005년부터 기획 중인 <가구야공주 이야기>를 제작하고 있음을 밝혔다. 원래는 <반딧불이의 묘>와 <이웃집 토토로>처럼 미야자키의 ‘재’은퇴작인 <바람이 분다>와 동시 개봉하려 했으나, 제작 과정이 길어지면서 <바람이 분다> 개봉 1년 후인 2013년 말에야 개봉했다. 일본의 가장 오래된 구전 설화, 노부부와 빛나는 대나무 속에서 발견된 여자아이의 이야기 ‘타케토리 모노가타리’를 수채화 풍의 색채로 구현했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

8년의 제작기간 끝에 공개된 <가구야공주 이야기>는 지브리 역사상 처음으로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받고 2015년 87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장편 애니메이션 부분 후보로도 선정됐다. 또 ‘애니메이션의 칸국제영화제’라 불리는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장편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가구야공주 이야기>는 다카하타 감독이나 지브리에게 소기의 성과를 안겨줬다. 하지만 지브리에서 연상되는 모험·판타지 애니메이션이 아니어서였을까, 관객몰이에 실패하며 제작비의 절반만 회수하는 아쉬운 성적을 거뒀다. 다카하타 감독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연출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이 작품이 다카하타 감독의 유작이 됐다.

가구야공주 이야기

감독 다카하타 이사오

출연 아사쿠라 아키, 코라 켄고

개봉 2013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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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장은 건강 악화로 2017년부터 입원과 퇴원을 거듭하다 4월 5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번복하고 연출에 복귀한 현상황에,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타계가 더 크게 느껴진다. 지브리는 오는 15일 다카하타 감독 추모 장례 행사를 열 계획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장인이자 거장으로 많은 이들에게 추억을 남겨준 다카하타 이사오, 이제는 편히 쉬시길.

씨네플레이 에디터 성찬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