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승부〉 속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_next/image?url=https%3A%2F%2Fcineplay-cms.s3.amazonaws.com%2Farticle-images%2F202503%2F17827_205350_1033.jpg&w=2560&q=75)
바둑판은 종종 전쟁터에, 수읽기는 병법이나 무기에 비유된다. 돌을 놓는 두 사람의 손만이 오가는 점잖은 스포츠이지만, 상대의 집을 빼앗고 더 많은 영토를 확보하려는 수 싸움은 피만 튀지 않을 뿐 전쟁만큼 치열하다.
가로세로 열아홉 줄의 바둑판에서 벌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총 10의 760승 개에 달한다. 모든 변화 수를 계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대의 기풍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다.
이러한 바둑판에 스승과 제자가 마주 앉는다면 그 대국은 어떤 모습일까.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아끼는 두 사람의 대결은 치열함 속에 묘한 서글픔을 동반한다.
한국 최초의 프로 9단이자 '바둑의 황제'로 불린 조훈현 국수는 제자 이창호와 오랜 기간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1990년대 바둑이 전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시기, 두 사제 간의 대결은 각종 대회 결승전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김형주 감독의 영화 〈승부〉는 이 두 바둑 거장의 이야기를 모티프로 삼았다. 영화는 패배를 모르던 조훈현(이병헌 분)이 어린 시절부터 가르친 제자 이창호(유아인)와 희대의 라이벌전을 벌이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 〈승부〉 속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_next/image?url=https%3A%2F%2Fcineplay-cms.s3.amazonaws.com%2Farticle-images%2F202503%2F17827_205351_110.jpg&w=2560&q=75)
이야기는 조훈현이 바둑 신동으로 불리던 이창호를 제자로 받아들이면서 시작된다. 조훈현은 이창호를 자신의 집에 들이며 스승의 역할뿐 아니라 아버지의 역할까지 자처한다.
그러나 성장한 이창호는 스승의 뜻과는 다른 길을 걷는다. 조훈현의 화려하고 공격적인 전법과 달리, 이창호는 "절대로 지지 않는" 방어적 스타일을 고수하며 자신만의 바둑 세계를 구축한다.
각자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두 사람은 1990년 대회 결승전에서 운명적인 대결을 펼친다. 불같이 뜨거운 스승의 맹공을 제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인내로 막아내고 결국 승리를 거머쥔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조훈현은 충격에 빠지고, 이창호는 청출어람의 기쁨 대신 복잡한 감정으로 고개를 숙인다.
영화는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서사의 무게중심은 조훈현에게 더 기울어 있다. 작품은 그가 애지중지 키운 "호랑이 새끼에게 잡아먹힌" 후 경험하는 상실감과 수치심, 그리고 이를 극복하려는 과정에 주목한다.
최고의 자리에서 서서히 밀려나는 조훈현의 모습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할 수밖에 없는 세대교체의 순간을 담아내 더욱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을 이긴 제자를 더는 가르칠 수 없는 스승과, 자신에게 패한 스승에게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제자의 이별은 필연적 과정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바둑 자체보다는 사제 관계에 방점을 찍은 영화 〈승부〉는 바둑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으며, 체스를 소재로 한 넷플릭스 시리즈 〈퀸스 갬빗〉처럼 주인공들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시뮬레이션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해설위원의 해설을 더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영화 〈승부〉 속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_next/image?url=https%3A%2F%2Fcineplay-cms.s3.amazonaws.com%2Farticle-images%2F202503%2F17827_205352_1141.jpg&w=2560&q=75)
영화의 가장 큰 강점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이다. 조훈현 역을 맡은 이병헌은 제자에게 연패하며 느끼는 무력감과 좌절을 섬세하게 표현해 몰입감을 높였다. 당시 조훈현의 특징적인 2:8 가르마 헤어스타일부터 자세와 미세한 행동 패턴까지 재현했다. 이병헌은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프로 바둑기사에게 직접 지도를 받으며 바둑돌을 놓는 자세를 연습했다고 한다.
〈소리도 없이〉(2020) 이후 5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유아인은 이창호 역을 맡아 특유의 '너드' 같은 이미지와 대국 중 흔들림 없는 집중력을 탁월하게 표현했다. 이번 영화는 그가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은 2023년 2월 이후 처음으로 주연으로 나서는 작품이다.
![영화 〈승부〉 속 한 장면 [넷플릭스 제공]](/_next/image?url=https%3A%2F%2Fcineplay-cms.s3.amazonaws.com%2Farticle-images%2F202503%2F17827_205353_1229.jpg&w=2560&q=75)
유아인의 복귀를 반기는 팬도 있겠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영화 〈승부〉가 직면한 과제로 남아있다. 배급사 바이포엠스튜디오는 각종 홍보 행사와 예고편, 스틸컷에서 유아인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는 과거 음주운전 논란이 있었던 곽도원 주연의 〈소방관〉 개봉 당시와 유사한 접근법으로, 당시 영화는 흥행에 성공한 바 있다.
2021년 촬영을 마친 〈승부〉는 원래 2023년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유아인의 기소로 계획이 보류되었다가 최종적으로 극장 개봉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김형주 감독은 19일 시사회 후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영화가 개봉하지 못해) 지옥 같은 터널에 갇힌 느낌이었다. 막막했다"며 "개봉이라는 한 줄기 빛이 나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유아인에 대해서는 "주연 배우로서 무책임하고 실망스러울 수 있는 사건을 일으켰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영화는 있는 그대로 봐주셨으면 한다. 상처받은 영화에 연고를 발라주신다는 마음으로 따뜻하게 바라봐 주셨으면 좋겠다"고 관객들에게 당부했다.
영화는 오는 26일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