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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승부〉 이병헌 “촬영장에서 과묵한 유아인, 몰입하고 있었구나 싶어”

성찬얼기자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승부>의 승부수는 유효했다. 포석을 차근차근 쌓던 <승부>는 주연 배우의 논란이란 악수로 오랜 시간 표류했다. 마침내 극장 개봉이란 정석을 묘수로 내세우는데, 어째서 <승부>를 그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또 거기서 승리의 가능성을 읽었는지 직접 본 관객으로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작부터 소문난 잔치는 다행히 맛집이었다.
 

​그중 한국 바둑의 전설 조훈현을 맡은 이병헌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병헌이 이병헌했다. 이병헌은 조훈현이란 국민적 영웅이 일련의 굴곡진 대국에서 느낀 감정적 고초를 그대로 펼쳐 보였다. 그곳엔 바둑기사 조훈현이, 남편 조훈현이, 스승 조훈현이, 그리고 인간 조훈현이 있었다. <승부>가 깔아놓은 이병헌이란 포석은 단수가 돼 불계가 될 뻔한 대국을 역전시켰다. 3월 21일, 서울 종로구 모처에서 만난 배우 이병헌과의 대화에서 <승부>의 열기를 만나보자.


 

바둑을 모르고 봐도 재밌었다. 벌써 끝났나 할 정도로 재밌게 본 것 같다.

상영시간이 짧았나.(웃음) 바둑영화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둑영화라기엔 감독부터 메인캐스팅까지 바둑을 모르는 사람이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라. 실화가 ‘어떻게 영화로 안 만들어졌지?’ 생각할 정도로 드라마틱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드라마가 강한 실화다 생각하고 영화를 시작했다.

 

실제 인물이 있는 캐릭터다. 실존 인물에게서 어떤 부분을 가져왔는지.

실제 인물이 있는 캐릭터는 기본적으로 자유로움이 많지는 않다. 반면 어떤 측면에서 기댈 데가 많다. 그분의 버릇이라던가 겉모습이라던가 그분의 생각을 많이 듣고 옮기면 되니까. 영화에서 픽션의 성격을 띤 부분, 이를테면 대사나 장면이라면 작가가 의도한 바를 잘 살려서 연기를 하면 되니까. 픽션에 창조된 인물을 할 때보다 제한된 것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의존할 곳은 충분하고, 조훈현 국수는 자료들도 많고 참고할 것이 많으니까 연기하는 데 참고가 됐다..

 

실제 인물이라도 <남한산성> 같은 과거 실존 인물과 동시대인물은 다를 것 같다.

(조훈현 국수는) 지금도 현역으로 계시니까 어쩌면 더 조심스러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과거 실존 인물을 연기한 영화들이 이때는 어떠셨을까 상상하면서 연기하니까 더 힘든 것 같다. 베이스는 실화인데. 정확한 답이 없다는 것이 고민되는 지점들이었다.
 

〈승부〉
〈승부〉


바둑이란 스포츠가 감정 표현이 많지 않은 스포츠다. 감정을 전달하는 입장에서 부담을 됐을 것 같다.

그런 부분이 매력이었다. 내가 바둑을 두면서 느꼈을 긴장과 환희, 절망감 그것들이 안에선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정적인 가운데 표현해야 하는 미세한 감정과 떨림들. 그게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캐치하기 위해서라면 극장에서 보셨으면 좋겠다.(웃음)

 

출연 전엔 바둑을 얼마나 알고 계셨고, 영화를 준비하면서 어느 정도로 배우셨나?

바둑을 배우고 레슨과 혼자 연습하고 그런 건 바둑기사들처럼 바둑돌을 딱 갖다 붙이는, 양면테이프가 있는 것처럼 두시지 않나. 그런 손짓과 프로다운 손놀림. 그런 것에 대한 훈련을 했다. 바둑의 실력은 상관이 없었다. 설령 내가 조훈현 국수님처럼 바둑을 둔다더라도. 예를 들면 악기를 연주하는 인물이라면 연주를 배워야겠지만, 여기선 돌 하나를 둘 때 그 포스, 그 울림이 얼마나 조훈현 국수처럼 보이고 느껴지느냐에 대한 부분이 숙제였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혹시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도 했나?

그러긴 어렵다. 정말 어렵더라. 집에 바둑판을 갖다 두고 아들하고 오목을 두기도 했지만, 제가 가르치니 제가 대부분 이겼는데(웃음) 간혹 아이하고 체스를 두면 백전백패였다. 이런 쪽에 재능이 없나 싶다.

 

참고 자료가 많았다고 하셨는데, 캐릭터를 잡아가면서 본인이 볼 때 조훈현 국수의 코어라고 규정한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영화에서도 나오는데 남기철 구단(조우진)과 대국을 한 후 조 국수가 ‘거참 매너도 없이’ 하면 천승필(고창석)이 ‘네가 그런 말 할 입장이냐’ 그런 대사가 있다. 뉘앙스만 준 대사지만, 조훈현 국수는 매너에 대한 말이 많기도 했다. 양반다리로 앉거나 누워서도 하시고, 바둑에서 말하는 매너 예의 같은 것에서 파격적인 분이셨다. 다리 떨기, 노래 흥얼거리기… 상대 입장에서 심리전인가 싶을 정도로. 그런 부분이 재밌는 포인트다 싶어서 많이 보여주고 싶었다.

 

조훈현 국수의 실제 경기 모습(오른쪽)을 반영한 〈승부〉의 장면
조훈현 국수의 실제 경기 모습(오른쪽)을 반영한 〈승부〉의 장면


조훈현 국수와의 만남에서 어떤 조언을 주시던가.

조언은 농담처럼 돌을 막 이상하게 두지 말고 바둑돌 놓는 방식이 있고, 프로바둑기사다운 손 모양으로 놔달라고 하셨다. 대화를 나누면서 거의 대부분을 혼자서 하실 만큼 이야기꾼이시다. 거의 듣는 입장이었다.

 

〈승부〉 이병헌(왼)과 이창호의 어린 시절을 맡은 김강훈​
〈승부〉 이병헌(왼)과 이창호의 어린 시절을 맡은 김강훈​


촬영한지 4~5년이 된 영화다. 5년 전의 나와 동료들의 모습을 다시 본 소감은.

그냥 든든했다. 조우진 배우, 김강훈 배우는 만났었지만 고창석, 현봉식, 문정희 그분들은 메인 캐스트로 호흡을 처음 맞춰봤다. 연기했을 때 ‘재밌게 나오겠다’ 그 시너지가 좋았다. 김강훈 배우는 시사회에 와서 인사하는데 저보다 더 커서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클 수가 있다. 무대인사를 안 시킨 이유가 있구나.(웃음) 무대인사 같이 했으면 사람들이 진짜 옛날영화라고 생각할 수 있겠구나 했다.

 

모두가 잘했다고 해도 배우 입장에서 눈에 밟히는 장면이 있을 수도 있을 텐데.

걱정을 많이 한 장면이 있다. 처음 지는 날.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들어 대국을 끝내고 담뱃갑을 구기는 장면까지. 영화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해서 내가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유독 그 장면에 테이크를 많이 갔다. 며칠 뒤에 감독님께 다시 찍을 수 있냐고 물어볼 정도로 계속 욕심이 났다. 눈에 밟히거나 그렇진 않지만, 욕심을 가장 많이 냈다.

 

연기와 바둑이 물론 결은 다르지만, 이병헌 본인은 조훈현 같은 사람인지, 이창호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저는 그냥 딱 중간인 것 같다. 두 분이 극단적으로 공격적이고 극단적으로 돌부처 같기 때문에. 그야말로 창과 방패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저는 약간 중간인 것 같다.

 

조훈현 국수가 국민영웅으로 보이는 시점에서 시작하지만 화도 내고, 옹졸한 모습도 나오고, 굉장히 다면적인 모습으로 보여져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이런 다양한 모습들을 어떻게 연기하고자 하셨는지.

시나리오에서 잘 표현이 돼있었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수정하거나 아이디어를 내야겠다 생각이 하나도 안 들었다. 그만큼 적절하게 잘 그려져 있었다. 이런 감정이라면 내가 해볼 만하겠다 싶어서 그런 감정라인의 고조를 맞춰갔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창호 역의 유아인 배우와 스승과 제자로 시작해 라이벌로까지 발전한다. 연기 호흡은 어땠는지.

이창호 국수는 돌부처 같은 사람이다. 말이 없고 무슨 생각인지 알기 힘든 바둑기사로 유명하다. 저는 (유아인과) 처음 함께 호흡하는데 촬영장에서도 과묵한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자기 캐릭터에 빠져있으려고 애를 쓰는구나 그렇게 받아들였다. 영화를 보시면 아역 이창호(김강훈)와 성인 이창호(유아인)로 바뀌면서 돌부처의 성격이 보여지는 모습들이 나온다. 그런 것이 고증인지, 감독님이 드라마틱하게 보이고자 넣은 픽션인지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보여지는 순간 참 좋다 싶었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게 말이 돼?’ 싶을 정도로 이 이야기가 실화인가 싶었다. 한집에서 사는 스승과 제자, 제자에게 져서 바닥을 쳤다가 다시 올라온 스승 등.

저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런 정서가 이 영화의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내 아들처럼 키우는 제자이지 않나. 야단도 치면서 가르친. 그런데 함께 결승전에서 붙고 대국장까지 향하는 차 안의 공기, 1%도 생각지 못한 패배를 받았을 때의 당혹스러움. 거기에 사모님 입장에서 적막한 집에 복기를 하는 아들 같은 내제자와 담배만 피워대는 남편. 그 말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 이 드라마틱한 영화의 가장 핵심 정서가 아닐까 싶었다. 저도 문정희 씨도 유아인 씨도 그렇고 그런 정서를 연기하고 싶어서 (<승부>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싶다.

 

청출어람(靑出於藍)에 대한 스승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야기 같다. 조훈현 국수 입장의 서사는 삶의 슬럼프가 온 사람들에게 응원처럼 보일 것 같다. 이런 부분에서 조훈현 국수를 연기하며 메시지나 느낀 점이 있다면.

시나리오를 보면 명대사가 많다. 물론 실제 그분들이 남긴 말이지만, 어느 순간 대사를 들어보면 가슴에 빡 와닿는 말이 많다. 제 지인들도 명대사가 많다고 피드백을 줬었다. 그분들이 그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한 승부 속에서 겪어난 이후에 한 말이라 명언일 수밖에 없겠다 (싶었다). 좋은 말이 많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럼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무심(無心). (극 중 무심을 서예로 쓰는 장면은) 대역 아니다. 제가 했다. 자랑하고 싶어서 죽을 뻔했다.(웃음) 자랑할 만한 게 서예다. 초등학교 때 대회도 나갔었다.

 

〈승부〉
〈승부〉


방금 말한 차 장면에서 ‘승부에 연연하지 마’ 이 대사를 쳤을 때 많이들 웃으셨다. 그런 부분을 생각하고 연기하셨는지 궁금하다.

아니다. 배우가 느끼는 의외의 순간이다. 그전 장면이 조훈현이 스승의 약점을 쓴 창호의 노트를 보고 둘이 마주치는 장면이다. 얼마나 민망하고 당황스럽겠나. 제자도 죄지은 걸 들킨 느낌일 테고. 그 공기에 관객들도 얼굴이 빨개질 것 같았다. 그 뒤에 그 승부에 연연하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니, 드라마틱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심각하게 연기했는데, 관객들도 그 상황이 그렇게 이어지니 웃을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찍을 때는 그런 느낌이 아녔다.

 

실제가 드라마틱하니까 이것만으로도 가져가는 힘이 강해서 유머로서 가져가는 장면은 떠올리지 않는다. 매번 진지하게 했는데 시사회에 (많이 웃으셔서)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제 입장에선 <번지점프를 하다>(2001) 했을 때의 감정과 비슷하다. 진지하고 슬픈 영화라고 생각했다. 당시 기자시사회 때 맨끝자리에서 보는데 되게 심각한 장면인데 보시는 분들이 웃으시더라. 그리고 나중에 제일 심각한 장면은 빵 터지셨다. 큰일 났다 싶었다. 그때 당시 제 매니저한테 화장실 대변칸에 있을 테니 다 가시면 데려가라고 말하고 몇십 분 동안 숨어있었다. 어떡하냐 하면서. 당시 매니저도 절망하다가 ‘이상해, 사람들이 나오면서 너무 재밌대’ 그러더라. ‘이상한 데서 웃었잖아?’ 했는데, 그만큼 (영화에) 빠져서 보니까 저럴 법해서 웃으셨던 거다. 이 영화에서도 저는 웃기다고 생각하지 많았는데 웃음 포인트가 많은 걸 보니 (<승부>에) 빠지셨구나 싶어서 좋았다.

 

사실 연기의 신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연기에 조언을 구하는 후배들이 많을 것 같은데 어떤 조언들을 주는지.

연기는 다른 분야처럼 이 일을 잘하기 위해 뭘 하면 실력이 늘 거야, 이런 게 없다. 특이하다. 저도 고민하는 부분이고 저도 알면 그것만 죽도록 열심히 할 것이다. 바둑도 그런 것 같다. 바둑은 그 어떤 방법이 (있어서) 노력하면 잘 될 것 같다 싶지만, 조 국수님께 여쭤봤다. 일본에서 살 때 어떤 얘기를 들으셨냐고. 스승님과 같이 살면서 레슨이랑 많이 들으셨냐고. 어린 시절 몇 년 살면서 두 판인가 세 판인가 뒀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그럼 나머지 시간에 뭘 배우셨냐 물어보니 삶의 방식, 태도, 생각, 이런 것들을 교육받았다고 하시더라.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영화 속 대사 중 단언컨대라는 말이 나온다. 아무래도 이병헌 배우에게 유행어 같은 말인데, 원래 있던 대사였나.

단언컨대(웃음) 제 친구도 같은 질문을 했다. 원래 대본에 있는 대사다. 저도 그래서 이 대사 빼면 안 되냐고 했다. 몰입에 방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빼는 게 맞았나 보다.(웃음)

 

<승부는> 국수가 미래의 국수를 알아보는 과정의 이야기다. 본인에게도 이렇게 미래의 고수를 알아보고 도와주신 분이 있는지, 아니면 본인에게 지금의 이병헌이 되도록 롤모델이 돼준 분이 있는지.

이게(연기) 뭘 열심히 하면 연기가 좋아질 것 같다고 말할 수가 없다. 뭘 해야 될지 모르니까. 많은 인생을 보여주고 표현하는데도 그걸 훈련하는 방법. 저는 모르겠다. 전공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교수님들이 어떻게 가르치는지, 그런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그러다보니 후배에게 질문이 들어오면 명확하게 대답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연기 잘하는 보석 같은 후배들, 동료들은 누굴 1등이다 2등이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제는 누군가의 연기를 보며 ‘내가 저걸 할 수 있을까’ 싶을 때가 많다. 긴 시간 연기했음에도 처음 만나는 배우들이 많다. 그때마다 경쟁심은 아니고 ‘좋은 영화 나올 거 같다’는 들뜬 감정으로 출연했던 것 같다. 롤모델이라고 하실 분은 따로 없다. 이제는 누가 더 연기 잘한다고 얘기 못하는 시대가 돼버린 것 같다. 골고루 연기를 잘하는 거 같다. 탐나게 연기를 잘하는 분이 정말 많다.

 

평소에 캐릭터를 찾을 때, 캐릭터에 파고들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하나.

관찰이다. 관찰을 시나리오로도 하지만 실존 인물 캐릭터는 현역으로 계시는 분이니 관찰의 대상이 눈앞에 계시니까 저에겐 용이한 부분이 있었다. 물론 제가 그분을 다 담아내지 못하겠지만 관찰대상이 있고 실제로 직접 뵙고, 우리나라 레전드시니까 자료화면이 정말 많다. 다른 작품에 비해 기댈 데가 많았다. 정적인 가운데 이 영화의 매력이자 포인트라고 생각했다. 결승에서 내제자(숙식을 같이 하는 제자)에게 지고 그러면서 나는 다시 또 도전해야 하고. 조훈현 국수의 이 마음은 어떤 스포츠 경기를 하는 사람보다 극단적인 감정 상태였을 것이다. 승리를 확신하는 어떤 환희건 떨림과 긴장이건 아주 극단적인 마음의 상태일 텐데 정적으로 바둑돌 하나를 이렇게 딱 놓고 눈빛 하나로 그 감정들을, 우리는 표현해 내야 되는 직업이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 하더라도 관객들한테 안 보여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 지점들이 이 영화의 포인트이자 표현해내기 어려웠던 부분들, 저한테 가장 숙제였다.

 

그럼 연기자 입장에서 만족스러웠던 장면을 뽑는다면.

제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박찬욱 감독님과 통화했다. 감독님이 좋았던 부분은 이창호와의 결승전에서 처음으로 패배를 확신하고 “안되나”라는 대사를 하는 부분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아까 어떻게 했었는지 다시 생각해봤다. 좋은 거 같다.(웃음)

〈승부〉
〈승부〉


캐릭터를 연기하다가 막히는 순간이 있을 텐데, 어떻게 돌파하는지.

제일 힘든 게 그거다. 작품을 제가 다 이해하고 설득당해 선택했는데도, 그 장면을 마주했을 때 ‘나 왜 안되지?’ ‘지금 왜 확 안 오지’ 걸림돌이 생기기도 한다. 감독님이 새로운 것을 주문하기도 하고. 그럴 때 부딪히는 경우가 있다.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고. 그런 부분이 있고. 감독님하고 계속 얘기를 하는 편이다. 내가 설득이 되고, 감독님이 내 생각에 설득이 될 때까지. 어쨌든 간에 합의점을 찾아야, 틀리건 맞건 생각이 같아져야, 관객들에게 전달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 작품 두세 번은 그런 상황들이 있다.

 

현실에 발붙인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장르물은 손이 잘 안 가는 건지.

장르라서 피하는 건 없다. 생각해보면 안 해본 장르도 직업군도 많다. 해보고 싶다. 다만 저는 장르도 아니고 시대성도 아니고, 그냥 나를 설득시키고 재미도 있는, 이야기가 주는 힘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이병헌 (사진 제공=바이포엠 스튜디오)

 

아들이 뽑은 재밌는 영화 1위로 <승부>를 뽑았다고 했다. 다른 순위도 알려줄 수 있는지, 아니면 꼭 보여주고 싶은 출연작이 있는지.

아들이 극장에서 본 게 이거 <광해, 왕이 된 남자>(2012)와 <공동경비구역 JSA>(2000)고, TV로 보다 만 게 <그것만이 내 세상>(2018)이다. 제가 물어보지 않았는데 순위 매겨볼까 하더라. <승부>를 1등으로 뽑고 <공동경비구역 JSA> <광해, 왕이 된 남자> <그것만이 내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것만이 내 세상>은 왜 다 안 보고 4등이야 그랬더니 엄마(윤여정)가 아픈 부분이 있지 않나. 그게 너무 충격이어서. 아픈 건 초반에 알았는데 그걸 비주얼로 보니까 충격을 받은 것 같더라. 암이나 아픈 상황 이런 걸 알아도 그걸 받아들이긴 어린 것 같다. 너무 슬퍼서 못 보겠다고. 그럼에도 ‘그래도 영화라는 건 중간에 끊고 안 보면…’.(웃음) 난 안타까워서 그랬다.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있으니까. 남은 스토리 못 보는 거 아깝지 않냐 그래도 끝까지 안 보겠다더라. 제 아버지가 저에게 영화를 보여줬듯이 (아들에게 보여주게 된다). 내가 틀어줘서 봤던 건데 거기서 못 보겠다고 울더니 다음날도 얘기하면서 또 울었다. 이건 아이가 매긴 순위니까….(웃음)

 

아버지가 보여주셨던 영화 중 기억나는 게 있는가.

네다섯 살 때부터 절 무릎에 앉히고 ‘주말의 명화’ 이런 걸 보여주셨다. 배우 얘기도 하시고. 대부분 흑백에 서부영화가 대부분이었다.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총싸움하고 말 타고 다니고, 통조림 콩 찍어 먹고. <매그니피센트 7> 때 에단 호크에게 물어봤다.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이 빵에 찍어 먹는 그게 뭐냐고. 영화에서 그 장면이 실제로 나왔다. 그래서 식탁에서 계속 그것만 먹었다.(웃음) 아버지는 극장에도 저를 데려가시곤 했다. 생각해보면 배우가 된다는 생각도 안 했었는데 아버지의 영향이 되게 컸구나 싶다. 콩은 맛은 별로였다.(웃음)

 

<내마음의 풍금> 때도 아버지의 재킷을 입고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이번 영화도 시대극이라서 혹시 아버지의 물건을 쓴 것이 있는지.

아버지 옷이 이제 한두 벌만 남았다. 그중 하나가 <내 마음의 풍금>에서 입었다. 또 하나 남아있는 건 이 영화와 맞지 않아서 생각도 못 했다. 아버지는 서부영화 마니아셨고 어쩌면 아버지가 영화를 하셨어야 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셨다. <매그니피센트 7>에 제 캐릭터의 아버지로 사진으로나마 데뷔를 하셨는데, 감독님이 엔딩크레딧에도 배우로 이름을 넣어주셨다. 살면서 가장 큰 감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