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 가로세로 각 19개의 선, 361개의 돌. 마땅한 제약 없이 그저 선이 교차하는 점에 돌을 두는 방식의 게임은 무한한 수를 발생시킨다. 말이 제각기 다르게 생겼고, 그 역할도 다 다른 장기·체스와 달리 바둑은 모든 돌이 똑같이 생겼고, 어디든 둘 수 있다. 이 무한한 가능성. 그렇기에 아는 이에겐 우주와도 같고 반대로 모르는 사람들에겐 그저 ‘돌’일뿐인 바둑. 그렇게 상대적으로 거리감이 있는 바둑이 국민스포츠로 일컬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1989년, 조훈현 9단이 세계 대회에서 중국의 섭위평 9단을 누르고 우승한 직후의 1990년대다. <승부>는 바로 그 시점에서 이야기를 연다. 국민적 영웅의 탄생, 그리고 그의 절망과 재기를 담기 위해.

<승부>는 알려진 대로 조훈현 9단(이병헌)과 그의 제자 이창호 9단(김강훈·유아인)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세계 대회 우승 이후로도 전성기를 이어가던 조훈현은 동료에게서 ‘신동’ 소리를 듣던 이창호를 소개받는다. 꼬마 이창호에게서 웬만한 프로급과도 견줄 수 있는 실력, 그리고 승리에 대한 열망을 본 조훈현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뛰어난 기재(바둑에 대한 재능)을 가졌지만 그렇기에 때로는 건방진 이창호를 조훈현은 ‘상대방을 향한 예의‘로서의 바둑 또한 가르친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이창호는 점점 스승 조훈현의 방식이 아닌 자신만의 바둑을 찾기 시작하고, 조훈현은 그런 제자가 내심 못마땅하다. 그러나 어느새 이창호가 다른 프로들을 꺾고 결승국에 올라오며, 조훈현은 제자 이창호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사제 관계를 다룬 영화는 수두룩 빽빽이다. 특히 스포츠에서 훌륭한 스승과 탁월한 제자의 이야기는 영화뿐만 아니라 실제 사례에서도 굉장히 많다. 그럼에도 <승부>는 분명 차별화된 부분이 있는데, 바로 그 스승과 제자가 현역 시절에 맞붙을 수밖에 없는 구도를 가져온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시대의 흐름으로 밀려난 스승이 키운 제자가 세계 정상에 선다는 사제 관계 드라마의 전형에선 이 단어가 가장 행복한 결말일 테지만 <승부>에선 아니다. 당대 최고였던 스승에게도, 그리고 그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지만 결국 제 손으로 신화를 무너뜨려야 한 제자에게도 달갑기만 한 수식어가 아니다. 보기에는 정적이지만 바둑판이란 전장에서 치열한 전투를 거듭하는 기사(棋士)에게 이토록 뼈아픈 패배도, 이처럼 기뻐할 수 없는 승리도 유례없다.


꽤 정석적인 사제 관계 스포츠 영화로 달려오던 <승부>가 이 지점을 지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영화는 더 이상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동안 패배를 몰랐던 입지적 인물이 동시대에 나타난 라이벌에 끝없이 패배하고, 절망하는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관객 또한 조훈현과 이창호가 보낸 시간을 목격했고, 두 사람 모두에게 어떤 잘못이나 비난의 여지가 없음을 알기에 조훈현이 연이은 패배에 겪는 감정은 관객에게도 그대로 몰입할 수밖에 없다. 그 심정을 지레짐작이 아닌, 지난 시간에 켜켜이 쌓인 감정으로 그려내기에 훗날 재회한 두 국수(國手, 나라를 대표할 바둑 기사를 지칭함)의 대국에서 관객들도 다양한 층위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시사회 직후 이어진 기자간담회는 영화를 연출한 김형주 감독, 배우 이병헌, 조우진, 문정희, 고창석, 현봉식이 참석했다. 아무래도 실화,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였기에 참석자들 모두 여기에 내심 부담을 느꼈노라 토로했다. 김형주 감독은 “조훈현 국수는 이렇게까지 엄하게 (이창호를) 가르치지 않았다”, “이창호 국수가 자서전에서 ‘쾌활하다’고 말한 적이 있어 어린 시절 그런 성격을 부각시켰다”, “영화에서 두 사람의 대결이 처음인 것처럼 그려지지만 실제로 처음은 아녔다” 등을 언급해 영화적 허구가 가미됐음을 재차 강조했다. <승부>는 영화 도입부에도 실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허구적 사실이 있음을 미리 명시한다. 또 김형주 감독은 “저 또한 바둑을 모르는 입장이어서 모르고 봐도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게 1원칙이었다”고 말했다. <승부>는 바둑영화이기에 때때로 전문 용어가 나오지만, 자막이나 인물의 대사를 통해 해당 용어를 설명하고 그 상황을 정확하게 담아낸다.

여기에 영화 속 바둑에 생기를 더한 건 배우들의 힘이다. 남기철을 연기한 조우진은 두 국수에게 조언을 던지는 장면이 있는 만큼 “어떻게 해야 이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고 관객에게도 생각의 전환을 줄 수 있을까 고민”하며 연기에 임했다. 오직 바둑을 사랑하는 마음이 큰 천승필 역은 고창석이 맡았는데, 그는 천승필의 마음처럼 영화를 본 관객들이 바둑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캐릭터의 진심을 담았노라 밝혔다. 오랜만에 간담회 자리에 선다는 현봉식은 떨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실제 바둑을 두는 장면이 없었지만 바둑기사답게 보일 수 있도록 바둑알을 놓는 것부터 연습했다며 함께 한 배우들에게 누가 되지 않고자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조훈현의 아내이자 이창호를 아들처럼 아끼는 정미화 역은 문정희가 맡았다. 내제자(집에서 숙식하는 제자) 이창호와 남편 조훈현 사이에서 누구 못지않게 마음고생한 정미화 여사를 연기하며 실제로 그런 마음을 느꼈다는 문정희는 당차지만 두 사람 모두 품을 수 있는 그분을 담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작품에서 이창호를 연기한 유아인의 마약 투여 사실로 영화가 여러 차례 난항을 겪은 만큼 해당 배우에 대한 질문도 빠지지 않았다. 관련 질문에 김형주 감독은 “마음 같아선 따로 술 한잔하면서 말씀드리고 싶다”고 말로 다 못할 속내를 유쾌하게 드러낸 후 “(이병헌, 유아인 배우가 캐스팅됐을 때)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주연 배우로서 정말 실망스러운 일이었고, 배우이기 이전에 사회구성원으로서도 잘못을 했고. 처벌을 받고 있으니 제가 더 할 말은 없지만 개인적인 소회라면 영화에 나온 말처럼 지옥 같은 터널에 갇힌 느낌이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막막했다. 그래도 출구에 개봉이란 한줄기 빛이 보여서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저뿐만 아니라 배우분들, 스태프분들 모두 저만큼 개봉을 기다리셨다. 만감이 교차한다”고 함께 한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이병헌은 조훈현 국수와 이창호 국수의 이야기에 “이렇게 드라마틱한 일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흥미를 느꼈다. 그는 조훈현 국수를 연기하면서 “바둑판 앞에서 큰 변화 없이 지난 시간들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워 특히 신경썼다고 밝혔다. 그는 또 과거 조훈현 국수와의 나름의 인연이 있었다고 TMI를 꺼냈다. 바로 그의 출세작 <올인>의 실제 인물 차민수가 조훈현 국수의 절친이었던 것. 차민수 역시 포커플레이어이자 바둑기사로서 활동했었고 그 인연으로 군 복무 당시 조훈현과 만나 친해졌다고. 이병헌은 차민수에게 조훈현 국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바둑기사 또한 승부사이기에 둘 간에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구나 생각하며 촬영에 임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