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기사 카테고리

Movie & Entertainment Magazine from KOREA
>영화

국내 개봉한 디즈니 실사 영화 〈백설공주〉, 씨네플레이 기자들의 리뷰

씨네플레이
〈백설공주〉 포스터
〈백설공주〉 포스터


드디어 <백설공주>가 국내에 공개됐다. 지난 19일 개봉한 영화 <백설공주>(2025)는 디즈니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자 세계 최초의 풀 컬러 극장용 애니메이션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의 실사 리메이크로,<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시리즈, <500일의 썸머>의 마크 웹 감독이 연출하고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2021)의 레이첼 지글러, <원더 우먼>(2017)의 갤 가돗 등이 출연한다. 제작 단계에서부터 수많은 화제를 낳은 실사 영화인 만큼, 개봉 후에도 벌써부터 가지각색의 의견들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그렇다면, 씨네플레이 기자들은 <백설공주>를 어떻게 봤을까. 아래에 씨네플레이 기자 5인의 단평을 첨부한다.


〈백설공주〉
〈백설공주〉

 

주성철 편집장 ★★☆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아름답니”라는 대사가 불변이라면,

이미 PC가 힘든 원작이라는 걸 고백.

 

1937년부터 시작하는 ‘디즈니 공주’의 변천사는 시대상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모습의 1기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와 <신데렐라>(1950), 긴 세월을 보내고 2기 <미녀와 야수>(1991)의 ‘벨’과 <인어공주>(1991), 백인이라는 고정관념을 벗어던진 3기 <알라딘>(1992)의 ‘자스민’과 <포카혼타스>(1995), 그리고 완전히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준 4기 <라푼젤>(2011)과 <겨울왕국>(2013)의 ‘엘사’로 이어졌다. 그리고 각각 2019년과 2023년에 <알라딘>과 <인어공주>가 실사영화로 만들어졌다. 왜 전자는 흥행하고 후자는 폭망했을까. 일단 3기와 4기는 애초의 원작 애니메이션 자체가 지금의 시선으로 봐도 위화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반면, 1기와 2기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형을 줄 필요가 있는 요소가 공교롭게도 그 작품의 ‘킥’이라는 것. 가령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라는 대사가 시대착오적이지만 서사의 분수령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예쁘다’를 ‘아름답다’로 바꿨다고 해서 과연 뭐가 달라질까. 돌이켜 보면, 개봉하기도 전에 엄청나게 욕먹었던 백설공주 역 레이첼 지글러의 여러 발언 중 솔직히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 않나. 말하자면, 1기와 2기 작품들은 호평과 흥행 중 하나라도 얻으려면 원작에 별다른 변형을 가하지 않는 편이 낫다. 디즈니의 원조 공주를 실사화한 <백설공주>는 <알라딘>에 앞서 만들어진 케네스 브래너의 실사영화 <신데렐라>(2015)가 왜 무난하게 흥행하고 좋은 평가도 얻었을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케케묵은 원작의 리메이크보다 오히려 <라푼젤>의 실사화가 더 보고 싶다. 이처럼 ‘혁신’은 너무나도 어렵다.


〈백설공주〉
〈백설공주〉

 

 

성찬얼 기자 ★★☆

뮤지컬 넘버와 시퀀스는 '디즈니 클래식' 반열에 들만한데.... 서툰 메시지 전달에 아찔

 

<백설공주>의 비전은 확실하다. 원작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의 이야기를 현대에 맞게 살려내는 것.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여러 설정이나 인물 구성을 변경하고, 동화 속 세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린다. 문제는 이 원작 애니메이션의 골자가 ‘동화’라는 것이다. 동화는 기본적으로 동심을 기반으로 한 비현실적인 상상의 산실이다. 그것을 이 고도화된 문명인의 시각에서 납득이 가게 만들어야 한다니, 처음부터 얼토당토않은 임무였다. 동화의 낭만과 진보적 메시지의 결합의 실패. 동화의 유치함은 여전하고, 반대로 현대에 맞춰 각색한 부분은 메시지와 목적성만 도드라진다. 디즈니 팬보이를 자처하는 입장에서 그나마 건졌다 싶은 건 뮤지컬 넘버다. 작곡가 콤비 파섹 앤 폴은 그 유명한 ‘하이-호’(Heigh-Ho) 등 원작 넘버, 여왕 그림하일드의 단독 넘버(‘All Is Fair’)를 비롯한 오리지널 넘버 모두 훌륭하게 디즈니 감성으로 꽉꽉 채워 넣었다. 특히 오프닝 곡 ‘Good Things Grow’은 노래도, 시퀀스 연출도 무척 청량해 만족스러웠다(그만큼 뒤로 갈수록 실망스러웠다는 말이지만). 레이첼 지글러는 뮤지컬 배우 출신답게 깔끔한 가창력을 선보이는 반면, 그림하일드를 맡은 갤 가돗의 가창력은 아쉬운 편. 솔직히 영화를 꼭 보라곤 못하겠지만, 가급적 OST 만큼은 필청을 권하고 싶다.


〈백설공주〉
〈백설공주〉

 

김지연 기자 ★★☆

차라리 혁명의 붉은 망토를 두른 백설공주였다면

 

각색이 너무나 빈약하다. 난쟁이, 독사과, 거울, 왕자(도적으로 변화하긴 했지만) 등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1937)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의 아이코닉한 요소들을 모두 살리려다 보니 각본이 힘을 잃었다. 그러니 오리지널 각본을 바탕으로 한 작품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하다. 만약 <백설공주>가 새롭고도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면 난쟁이, 독사과, 거울, 왕자 등의 요소를 모두 살릴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취사선택했어야 한다. 그러나 <백설공주> 실사 영화는 파격적인 플롯의 변형 대신 음악과 미술, 영상미에만 힘을 주는, 너무나 쉽고 게으른 길을 간다. 실사 영화만의 새로운 재미와 원작 애니메이션의 오리지널리티를 둘 다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그저 그 중간에서 부유하다가 맹숭맹숭해져 버린 꼴이다. 그렇다고 ‘백설공주’ 역에 주체성을 부여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백설공주> 측이 내세우는, 새로운 시대의 공주가 가진 주체성이라는 것도 미적지근해 오히려 수동적이라고까지 볼 수 있을 법하다. ‘차라리 혁명의 붉은 망토를 두른 백설공주였다면’이라고 한 게 웃자고 한 얘기가 아니다. ‘주체적이다’라는 말과 ‘공주’라는 말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 말인가, 싶지만 적어도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이야기를 들고 왔다면 관객으로서는 당연하게도, 구시대의 요소들을 어떻게 재해석했을지를 기대하게 된다. 주체성 대신 그저 ‘온화함’을 택한 백설공주가 이 시대에 더욱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백설공주〉
〈백설공주〉

 

추아영 기자 ★★☆

매뉴얼만 따른 듯한 각색, 안 될 것 같은데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수 없이 하는 직장인의 속사정이 엿보인다

 

<백설공주>는 디즈니의 실사화, 구색만 갖추려는 PC주의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애초부터 PC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원작 동화의 기본 설정까지 뒤엎고, 라틴계 배우인 레이첼 지글러를 백설공주 역으로 캐스팅한 디즈니가 시오니스트로 유명한 배우 갤 가돗을 출연하게 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레이첼 지글러와 갤 가돗의 캐스팅은 디즈니의 PC주의가 다분히 편의적인 발상과 모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디즈니가 실사화와 PC주의를 놓지 못하고 있는 이유에는 원작 애니메이션의 현대적 재해석을 시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설공주>는 원작의 매력을 살리지도 못하고, 현대적 재해석에도 실패했다. 이번 작품에서는 백마 탄 왕자가 사라지고, 숲속의 도적단을 이끄는 리더 조나단(앤드류 버냅)이 왕자 인물의 빈자리를 대체한다. 조나단은 독재 정치를 펼치는 왕비의 횡포를 지켜보고 있는 백설공주의 각성을 끌어낸다. 하지만 조나단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레이첼 지글러의 백설공주는 새로운 영웅상, 매력적인 영웅 캐릭터를 형성하지 못한다. 이는 존 추 감독이 영화 <위키드>(2024)에서 자연 파괴로 일궈낸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독재자이자 마법사(제프 골드블룸)에 맞서는 엘파바(신시아 에리보)를 에코 페미니스트 캐릭터로 형성해 새로운 영웅상을 만들어낸 것과 지극히 대비된다. 무엇보다 <백설공주>의 마지막 시퀀스는 백설공주의 온화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그 기회마저 저버린다. 마크 웹 감독은 백설공주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캐릭터성도 부여하지 않은 채 백설공주의 배경으로만 세워두어 지극히 기능적으로 활용한다. 디즈니는 새로운 흥행작을 만들려는 야욕으로 가득하나 이미 그 동력을 잃어버린 듯하다. 성은 또 무너졌다.


〈백설공주〉
〈백설공주〉

 

이진주 기자 ★★☆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갔다면 사과부터 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공주님.

 

재미, 의미, 효용. 대중의 사랑을 받는 모든 것들은 이 세 갈래 중 하나로 수렴한다. 셋 모두를 충족시키는 건 희귀종에 가깝고, 하나만 제대로 해도 충분히 빛난다. 디즈니는 그간 재미와 의미의 교집합을 탁월하게 확장해왔다. 전형적 '공주' 서사에 다층적 페르소나를 입혀 글로벌 시장을 장악했고, 시대적 흐름과 브랜드 정체성 사이의 미학적 균형을 유지하는 데 능했다.

 

그러나 창립 100주년을 목전에 둔 현재, 디즈니는 방향성을 상실한 듯하다.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이 논쟁에 휩싸이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백설공주> 실사화 영화는 디즈니의 근본적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었다. 중요한 것은 변화의 부재가 아닌, 변화의 본질적 모순이다.

 

원작과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디즈니가 선택한 전략은 '뒤집기'다. 과거의 디즈니에 'No'라고 말하는 것. 꽤 급진적인 시도지만, 정작 디즈니는 자신들이 구축한 성벽 밖으로 나갈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백설공주라는 안전한 IP를 선택하면서도, '백설'이라는 핵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인종우월주의, 외모지상주의 같은 원작의 한계를 타파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전복만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진보적 이미지'를 획득할 수 없다.

 

"원작의 어떤 부분을 지키고, 무엇을 바꿔야 할까? 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디즈니는 밤새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다 정작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구축해온 문화적 유산과 현대 사회에 기여해야 할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간과한 듯하다. 결국 <백설공주>는 새로운 공주도, 새로운 세계도 만들지 못한 채 익숙한 이름만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