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에 대해 가장 깊은 생각에 잠기는 때는 극장을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영화에 대한 감흥이 깊으면 때론 버스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 그럴 때면 돌아오는 길은 점점 더 멀어졌다. 그리고 하나를 더 꼽자면 영화의 장면에 배경처럼 스며든 영화음악을 들었을 때다.


<이주연의 영화음악>.

지난 4 8일을 끝으로 MBC라디오 <이주연의 영화음악>이 막을 내렸다. 심야 라디오의 간판 같은 프로그램이 사라졌다는 허탈함은 영화를 좋아했건 아니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영화음악 방송의 기억은 <정은임의 FM영화음악>부터다. 1992 11월 시작한 이 방송에는 독서실 마지막 귀가 셔틀을 타고 돌아와 이유 없는 불면의 밤을 보냈던 고등학생 때의 추억이 담겨있다. 당시는 문화의 지평이 문학에서 영화로 급격히 옮아가던 시대다. 소위 말하는 유럽의 예술영화를 만날 기회가 늘어났고, 군부 독재의 종말로 온갖 금지된 것들의 해방이 영화계에도 흘러들어왔다. 관객들은 영화정보에 대한 갈증이 넘쳐났고, <정은임의 FM영화음악>은 그 목마름을 해갈하는 샘물과도 같았다.

정은임은 달랐다.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정성일의 명료한 영화해석과 감독 이전에 평론가로 유명했던 박찬욱 같은 이들이 그녀와 함께했다. 정은임은 오프닝 멘트에 한국전쟁 중 일어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언급하고, 영화 <파업전야>(1990)에 삽입된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방송에 내보내는 등 변화된 시대가 추구하는 정신에도 귀를 기울였다. 영화의 낭만에 머물지 않고 영화와 사회의 연결고리에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은임 (사진 씨네21).

1995 4월 정은임은 프로그램에서 하차한다. 팬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려진 석연치 않은 결정이었다. 이후 배우이자 동시통역가인 배유정, 1998년에는 홍은철 아나운서, 2002년부터는 최윤영 아나운서가 프로그램을 이어갔다. 그럼에도 팬들은 여전히 정은임 아나운서를 그리워했고, 그 소망은 결국 이루어졌다. 하차 8년 만인 2003년 가을 정은임은 영화음악으로 돌아왔다. 고공 크레인에 올라간 노동자의 아픔을 말했고, 스페인 내전을 다룬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랜드 앤 프리덤>(1995)에 삽입된 혁명의 노래 인터내셔널가가 전파를 탔다. 정은임의 생각은 더 단단해졌고 영화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다.

랜드 앤 프리덤

감독 켄 로치

출연 이안 하트, 로자나 패스터, 이시아 볼레인, 톰 길로이, 마크 마르티네즈, 프레드릭 피에롯

개봉 1995 스페인, 영국,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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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대는 변화했다. 라디오의 인기는 예전 같지 않고, 영화 정보는 온라인에 넘쳐났다. 오랜 팬들의 기쁨은 결국 6개월 만에 사라져버렸다. 2004 4<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는 폐지됐다더한 아픔은 그 뒤에 몰려왔다. 정은임 아나운서가 그해 8월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 것이다. ‘라디오 시대의 마지막 DJ가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난 것이다. 그녀와 함께했던 수많은 이들의 청춘은 슬픔을 담고 기억 속에 박제되었다.

<FM영화음악 정은임입니다>.

<영화음악>의 재건은 몇 년이 흘러서야 가능했다. 2006년 이주연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으며 부활했다.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약 1년간 <영화음악>을 진행한 인연이 있는 이주연은 2006년부터 지난 4 8일까지 무려 11년 간(2012년부터 1년간 잠시 방송을 떠난 적이 있다) 프로그램을 이끌었다. 2010, 2012년 등 MBC 노조 파업 등에 참여하며 잠시 진행자가 자리를 뜨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이주연 아나운서의 <영화음악>은 다양한 전문가들이 출연해 특색있는 요일별 코너를 선보이며 오랫동안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주연 아나운서 (사진 MBC라디오).

인터넷의 시대에 라디오는 구식일지 모른다. 언제 어디서나 보고 싶은 영화 장면을 꺼내볼 수 있는 지금 소리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을지 모른다. 오리지널 사운드트랙(Original Soundtrack)에는 음악은 물론이고, 배우의 대사, 연기의 배경이 된 장소의 갖가지 소음도 들어있다. 귀에 들리는 소리를 이미지로 바꾸는 마법은 눈을 감으면서 시작된다. 음악으로 소환된 영화의 기억은 배우의 대사와 주변을 메운 소리들을 통해 이미지로 떠오를 것이다. 즉각적인 시각 반응보다 기억을 더듬어 상상력으로 쌓은 이미지에 나는 더 감동을 느낀다. 영화음악 같은 것이 여전히 유효한 영화감상의 방법이라 주장하는 이유다.

벽에 걸린 시계 초침 소리가 점점 더 뚜렷해지는, 한밤의 꼭대기를 넘은 시간이 새벽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그때 항상 만날 수 있었던 <영화음악>을 다시금 청해본다. 언제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 MBC라디오 <영화음악>은 4월 개편에 따라 저녁 8<FM영화음악 정은채입니다>로 편성되어 방송 중이다. MBC는 본 편성이 두 달간 한시적으로 진행되고, 이후의 진행자에 대해서는 정해진 바가 없다 밝혔다.


씨네플레이 심규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