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고 나면 더 잘 보이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팬이라면 반드시, 그의 작품 세계가 낯설다면 더더욱 주목해야 할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이 개봉했다. <꿈과 광기의 왕국>(2013), <미야자키 하야오의 19년>(2019), <미야자키 하야오와 왜가리>(2024) 등 미야자키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는 여러 편 있었지만, 굴곡진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감독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그가 창조한 작품 세계를 '자연'이라는 일관된 주제를 중심으로 촘촘히 엮어낸 방식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출을 맡은 레오 파비에 감독은 지난해 미국 매체 '애니메이션 월드 네트워크'와의 인터뷰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매우 자전적”이라며 “그는 자신의 기억과 이야기를 영화에 담는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그의 삶을 알게 되면 영화가 더 잘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이 단순한 회고를 넘어, 자연과 인간, 기억과 상상력 사이에서 미야자키가 구축해온 세계관의 지층을 탐색하는 훌륭한 입문서이자 사유의 지도가 되는 이유다.
깊이 새겨진 전쟁의 상흔

2차 세계대전이 한창 격화되던 1941년, 전쟁의 포화 속에 태어난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참혹한 시대의 상흔은 지을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그는 네 살 무렵 겪은 우쓰노미야 야간공습과 이어진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로 반전의식을 키웠지만, 동시에 군용기 부품 제조공장을 운영하던 집안의 영향으로 아름답고 정교한 기계로서의 비행기에 매혹되기도 한다. 이 상반된 감정은 그의 주요 작품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와 <천공의 성 라퓨타>(1986)의 폭격 장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에 등장하는 공습 이미지는 전쟁의 하늘 아래에서 자란 어린 미야자키의 시선을, <붉은 돼지>(1992)의 비행정, <바람이 분다>(2013)의 전투기는 그가 동경한 비행의 이상을 떠오르게 한다.

이후 자국 애니메이션 <백사전>(白蛇伝, 1958, 야부시타 타이지)에 매료되어 애니메이터가 되고자 결심한 10대 시절을 지나, 미야자키는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1979)을 완성하지만 상업적으로 실패를 맛본다. 재기에 어려움을 겪던 그는 주변의 권유로 만화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82년부터 12년에 걸쳐 이어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시작이었다. 동명의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된 이 작품은 오늘날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세계의 원형으로 평가받는다. 산업 문명 붕괴 이후 황폐해진 자연과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소수 인류의 이야기를 다룬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는 환경보호와 평화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후 미야자키 작품 세계의 윤곽을 결정짓는 기점이 된다. 이 흐름은 <이웃집 토토로>(1988)에서도 이어진다. 일본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신비로운 생명체 토토로가 등장하는 이 작품은 자연의 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려내며, 미야자키 특유의 생태적 세계관을 대중적으로 각인시킨다.
스튜디오 지브리 설립 이후 - 동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예술적 책임을 끌어안은 행보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의 성공으로 미야자키는 평생 동료 다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1985년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한다. 창립기념작인 <천공의 성 라퓨타>(1986)를 시작으로 스튜디오 지브리가 걸작들을 쏟아내던 시기, 미야자키 하야오의 창작 여정은 단순한 애니메이션 연출을 넘어 동시대의 역사적 맥락과 예술적 책임을 끌어안은 행보였다. <이웃집 토토로>(1988)를 통해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을 그려낸 그는, 90년대 초 소련 해체, 일본 버블경제의 붕괴,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 세계 곳곳의 격변을 목도하며 반전주의 색채가 짙은 <붉은 돼지>(1992)를 내놓는다. 원래는 유쾌한 단편으로 기획했으나,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해 대폭 수정되며 반(反)파시즘과 자유에 대한 예찬을 담은 장편으로 확장되었다. 1995년에는 옴진리교의 도쿄 전철 사린가스 테러, 고베 대지진 등 재난이 잇달아 발생하며 일본 사회는 불안과 선동으로 흔들린다. 군국주의 망령이 다시금 우경화의 그림자로 드리우던 이 시기, 그가 구상한 '은퇴작'은 <모노노케 히메>(1997)로 집대성된다. 자연과 문명의 충돌, 애니미즘적 세계관,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는 복합적 내러티브는 일본을 넘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며 감독의 미학이 전 지구적 감수성과 맞닿아 있음을 증명해낸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성공에 도취되기보다는 현실 세계의 암울한 징후에 대한 경각심을 더욱 분명히 한다. 개천 정화 활동에 나서고, 아카데미 시상식 불참을 통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을 표명하는 등의 실천은 그의 윤리적 일관성을 뒷받침한다. 이후 <벼랑 위의 포뇨>(2008)에 이르러선 파괴적 자연의 형상화를 통해 인간 중심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미야자키 세계의 핵심이 자연에 대한 경외와 질문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각인시킨다. 이는 2023년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까지 이어진다.
지적 자극이자 윤리적 제안으로 뻗어가는 미야자키의 작품들

영화는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를 비롯해 미야자키의 장남 미야자키 고로, 동료 애니메이션 감독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등 감독 곁에서 함께 작업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에 정통한 비평가들과 평론가들의 목소리를 통해 그의 예술적 위상과 사회문화적 의미를 다채롭게 조명한다. 국내에서 2013년 출간된 미야자키의 에세이와 대담 등을 담은 책 『출발점 1979-1996』, 『반환점 1997-2008』 또한 인용되어 작품의 맥락과 내면의 서사를 풍성하게 보완한다.
미야자키는 판타지를 빌려 세계의 구조를 응시하고, 그 안에서 인간이 감당해야 할 몫을 끝내 외면하지 않는 창작자로 우리 곁에 존재해왔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끝까지 껴안고자 했던 이 노(老)거장의 궤적은 오늘날 생태계 파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 문명이 맞닥뜨린 결정적 변곡점 앞에서 인류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조용히 되묻는다. 한 예술가의 삶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가 어떤 감각으로 세계를 마주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지적 자극이자 윤리적 제안으로 깊이 뻗어나가는 다큐멘터리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은 5월 28일 CGV 단독 개봉해 현재 상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