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들의 섬>을 어느 서구 영화감독이 일본에 대해 갖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평가하는 건 무리수이다. 여전히 일본에 대한 어떤 판타지가 작동한다면, 사실 그것은 일본자체(국가, 문화, 전통)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영화들, 더 정확히 한정한다면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생산해낸 이미지들에 대한 외부인의 종합적 정리가 옳을 것이다. <개들의 섬>에 등장하는 사건들, 그것들의 묘사, 때로는 극중 미디어의 재생산(TV 뉴스 중계부터 종합상황실의 모니터 영상까지) 등은 모두 우리가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익숙하게 접했던 것들이다. 모든 소동의 저변에 깔려 있는 음모에는 권력지향적 정치인, 폐쇄적이면서도 무능한 군과 경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추구하는 기업,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행동대장인 야쿠자가 어울려 한패를 이룬다.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소년, 그리고 소녀! 어느 사회, 국가에나 흔히 있는 요소들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것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의 시스템으로 너무나 정교히 작동하면서 현재의 체제를 단단히 구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른바 경제적 선진국에서 백주에 벌어지는 정치적 후진성을 말이다.
물론 웨스 앤더슨은 그렇게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을 치밀하게 설계하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부분과 전체가 하나의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를 꿈꾸는 자가 결국 맞닥뜨리게 될 종착지의 풍경이 대개는 처음 그렸던 모습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는 예감이 있다. 바로 역설, 아이러니. 애니메이션 속 세계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공적으로 통솔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배우들의 무표정, 엇나간 대화 사이에 끼어드는 침묵의 타이밍, 서로 떠밀고 소외시키는 장소와 인물의 상황 등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일일이 개입하려는 감독에게 애니메이션은 매력적인 세상이다. 더구나 스톱모션을 제작기법으로 선택했다면, 그에게는 ‘빛’마저도 다스릴 수 있는 권능이 주어진다(이 영화에서 털과 눈동자는 ‘빛’을 부각시키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이러한 전지전능한 권력을 창작자는 꿈꾼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이 현실세계에서 한 인간에게 주어졌을 때 세상은 더없이 끔찍해진다. 깐깐하고도 새침한 감독은 자신이 만든 가공의 세상 속에 현실의 어두운 면을 담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