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또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한나는 아들을, 남편을, 그리고 자신마저 알지 못한다. 한나가 겪는 고독의 근본적인 이유다. 한나의 연극은 이런 고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한나는 연극 수업이 끝난 뒤 지하철에서 맞은편 여자의 몸짓을 관찰한다. 연극은 한나를 세상과 연결해주는 수단이다. 또는 이렇게 볼 수도 있다. 한나는 세계를 하나의 연극으로 보기 시작했다. 영화의 말미에서 한나는 아들에게 문전박대 당했으며 다시는 찾아오지도, 연락하지도 말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남편에게, 아들에게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아들이 곧 면회를 올 것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한나는 마치 실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연기한다. 그리고 남편에게 (범죄의 증거인) 사진이 담긴 봉투를 찾았노라고 말한다. 한나의 거짓말은 위로가 아니라 복수다. 남편은 이전에 자신이 누명을 쓴 피해자인 양 거짓말을 했고, 한나는 그대로 되갚아주었다. 이제 남편은 아들과의 화해라는 희망을 가질 것이고, 그 희망은 남편을 파괴할 것이다. 한나도 남편도 모두 무엇인가를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나가 연극을 통해 깨달은 것은 삶 자체가 연극이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연기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여러 배역을 맡은 연극배우와 다름없으며, 배역 없는 배우란 존재할 수 없듯이 모든 역할을 떠난 ‘나’라는 존재는 없다. 그래서 삶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린 한나는 더이상 연극을 할 수 없게 된다.
고정된 ‘나’라는 존재는 없으며, 역할을 수행하는 배우만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다른 배역을 수행함으로써 타인이 될 수 있으며, 타인 또한 내가 될 수 있다. 영화는 한나의 연극뿐만 아니라 지하철에서 버스킹을 하는 사람을 보여주거나 지하철 안에서 춤을 추는 사람 등 예술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여준다. 또한 한나도 자신이 돌보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의 예술은 근원적인 고독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몸짓이며, 세계와, 다른 몸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예술의 역량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역량이기도 하다. 한나가 연극을 시작하며 타인의 몸짓을 관찰하듯이, 우리는 한나의 몸짓을 관찰함으로써 한나와 연결된다. 또한 한나가 될 수 있는 수많은 다른 한나들과 연결되며, 궁극적으로 수많은 나 자신들과 연결된다. <한나>는 이해만이 타자와 함께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