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한국영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충무로 제작진은 로케이션 헌팅에 전국을 누비고도 불필요한 전봇대 등등을 컴퓨터로 빼내느라 밤을 지새웠다. 컴퓨터로 배경을 합성하면 여지없이 표가 났던 때였다. 지금은 블루스크린을 쓰지 않는 한국 상업영화가 없다시피하고 봉합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블루스크린 작업은 곧 더하는 일이다. 레이어 대여섯장 정도를 겹치는 건 기본이다. 파랑 또는 녹색 막 위에 일렁이는 바다를 얹고, 일본 군함 수백척을 추가한 다음, 병사들을 더하고 또 더하면 최민식 배우는 명량해협의 전장으로 옮겨진다. 대형 세트장을 블루스크린으로 뒤덮은 뒤 포니 택시와 브리사, 제미니 몇대를 가져다놓고 십수명의 인원을 불러모아 촬영하면, 이제 송강호 배우를 80년 5월 금남로에 데려다놓는 것은 레이어의 몫이다. 배우도 ‘은막의 스타’가 아니라 ‘청막(靑幕)의 스타’로 불러야 할까. 현대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은 피사체를 촬영하는 행위인가 아니면 레이어를 얹는 작업인가. 예전의 세트와 현재의 디지털 배경을 바라보는 일을 같은 행위라고 말해도 될까.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면 대개 더하기를 하고 싶어진다. 세트였다면 엄두도 못 낼 표현들이 디지털로 가능해지자 많은 감독들은 건물 한채라도 더 부수고 싶어졌다. 그런데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보자. 숱한 건물이 파괴되는 동안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화면에서 제거된다. 진짜(에 가깝게 재현)였다면 피와 살이 튀는 하드고어영화가 돼버릴 테니까. 스펙터클의 규모가 더해질수록, 그러니까 레이어가 여러 장일수록, 더하면 안 되는 레이어도 많아지는 모순이 생긴다. 관객은 은연중에 가짜를 지각하게 된다. 디지털 복제 시대 영화의 딜레마다.
<신과 함께> 시리즈를 보자. 거대하고 현란하며 엉망진창인 지옥이 여럿 펼쳐지지만 그 속에서 벌받는 망자들의 표정이나 근접숏은 제거돼 있다. 육안으로 나지 않는 ‘CG 티’가 마음속에서 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한국영화가 못하던 걸 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감독들이 더하기를 하고 싶어진 이 시점이, 적지 않은 관객이 ‘마이클 베이 피로감’을 호소한 이후라는 점이다. <신과 함께-인과 연>(2017)에서 느닷없이 공룡이 출현했을 때 내가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물감 탓이 아니라 이 시차 때문이었다. 한국영화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할리우드의 뒤를 좇아 그들이 한 것을 1년 뒤 할 수 있게 되면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쾌재를 부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