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남>

2001년 여름, 하이퍼덱 나다였는지 씨네씨티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개관 기념으로 여러 독립영화들과 그 해 개봉한 한국영화들을 한꺼번에 무료 시사회 형식으로 상영해 준 적이 있었다. 그 때 <와니와 준하>, <철남>, <철남 2: 바디 해머>를 같은 날 동시에 보았는데 철남의 경우 예전부터 이름만 들어 왔을 뿐, 실제로 관람한 적은 처음이라 매우 기대가 되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브로드밴드 인터넷이 상용화되었던 시절도 아니고, 아직 리얼미디어나 퀵타임 무비가 주로 사용되던 시절이었던 만큼 사전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시청하였다.

<철남 3: 불릿 맨>

<철남>은 일본의 영상 미디어를 접한 적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본 작품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이전 시청했던 데이빗 린치의 <이레이저헤드>나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파이>, 엘리아스 메리지의 <비가튼>과 비슷한 스타일이라 느꼈으나 편집 방식이나 속도감이 좀 더 다이나믹했고 뮤직 비디오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말 공들여 만든 것으로 보이는, 엄청난 디테일의 분장과 특수 효과들이었다.

<철남>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은 엉뚱하게도 뮤지션 <나인 인치 네일즈>의 뮤직비디오를 모아 놓은 사이트에서였다. 90년대 중반 <클로서>, <번> 등의 뮤직비디오를 접하고 시각적 충격을 받은 후 조악한 화질의 뮤직비디오 파일들을 인터넷으로 찾는 도중 우연한 발견이었다. <해피니스 인 슬레이버리> 뮤직 비디오 파일에 붙은 부연 설명에 <아키라>와 <철남>이 연상된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사이버펑크 문화와 관련 작품들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된 계기였다.

<엑스트라> 뮤직비디오, <도브 러브스 덥> 앨범 표지

아마도 미국 관객들이 디테일한 기계적 묘사,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냉랭한 정서, 그리고 장인 정신이 느껴질 정도로 수준 높은 작화와 연출 수준으로 대표되는 일본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을 처음 접한 것은 원작 만화 <아키라> 작가 오토모 가츠히로가 감독과 총 제작까지 맡은 극장판 애니메이션 <아키라>를 통해서일 것이다. 당시 각종 만화 관련 매체에서 특집으로 다룰 정도로 미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미국 내에서 '망가' '아니메'라는 용어가 만화 팬들 사이에서 익숙해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토모 가츠히로가 그린 표지가 인상적인 타큐 이시노의 <도브 러브스 덥> 앨범, 코지 모리모토가 감독한 <공각기동대>가 연상되는 <엑스트라> 뮤직 비디오 등을 통해 음악 쪽으로도 일본 사이버펑크 작품들이 급격히 확산되던 시기가 90년대 초반이고, 이는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재는 마블 스튜디오 영화들의 대 성공으로 인해 미국의 서브컬쳐 문화인 코믹스 문화를 전 세계인들이 즐기는 상황이지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미국 만화 문화는 미국인들이나 주로 즐기는 것이었다. 미국 못지 않게 유구한 역사가 있는 일본 만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그 때만 해도 <드래곤볼> 등의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된 만화들조차 미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미국에서 일본 만화를 즐기는 계층은 분명히 그 때도 존재했으나, ‘코스플레이(코스프레)’ 등의 일본에서 유래한 용어들이 지금처럼 일반 미국인들에게도 익숙한 것이 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한 시절이었다. 지금은 일본식 신조어이자 엄밀히 말하면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인 ‘메카(인간형 로봇을 의미)’까지 미국에서도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으니 세월이 무상하다 할 수 있다.

만화판 <아키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세계 각국의 크리에이터들이 작품 제작 상황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하고 팬들의 피드백 또한 실시간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재에 와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작품들이 마지막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90년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당시 미국 팬들에게 일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OVA들을 활발하게 소개하던 회사가 바로 1991년 설립된 <망가 엔터테인먼트> 라는 회사로서, 사실 ‘망가’와 ‘아니메’라는 용어가 미국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회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회사는 90년대 초반, <아키라>를 수입, 배급하는 것을 기점으로 해서 이후 <공각기동대>, <수병위인풍첩>, <바이올런스 잭>, <크라잉 프리맨> 등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작품들을 미국과 영국 관객들에게 수입하였다.

역시 인터넷이 없었던 시대였던만큼, <아키라> 등의 작품들은 미국 관객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만화판 <아키라>는 마블 코믹스의 산하 회사인 <에픽 코믹스>를 통해 미국에 정식 출간되었는데 일본과 다른 제철 방식을 미국식으로 바꿈과 동시에, 자체 채색을 하여서 발매되었다. 이 좌우 제철 방식이 바뀐 판본은 2000년대 초반 역으로 일본에 수입되어 디럭스 판형으로 출간되었고(플라스틱 슬립케이스까지 씌워진 최고급 판형이었다) 이 판형은 다운그레이드되어 2013년 국내에도 세미콜론 출판사를 통해 발매되었다.

일본인들의 미국 문화 사랑은 종전 이후부터 지속되어 온 것이고, 음악, 패션, 영화 등 다방면에걸쳐 있지만, 미국인들이 일본 문화에 대해서 지금처럼 관심을 보인 적은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것 같다. 넷플릭스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 TV판을 2019년부터 서비스한다고 예고편이 몇 주 전 올라오자 각종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채널들에는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만화사적 의미와 전문가적 분석글이 우후 죽순으로 올라왔는데, 2000년대 말 신극장판이 개봉했을 때 올라오던 리뷰들과는 깊이와 분석력에서 수준이 다르다. 근 몇 년 사이에 팬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철남>은 결국 2009년 전 세계 개봉을 목표로 영어로 <철남 3: 불릿 맨>이 제작되었지만 이 작품을 보고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철남>에서 느껴졌던 에너지와 낯설음이 전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엔드 크레딧에 나인 인치 네일즈의 테마곡이 삽입된 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는데 감독은 수십 년 전부터 고대해오던 나인 인치 네일즈와의 협업이 드디어 이루어져서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철남

감독 츠카모토 신야

출연 타구치 토모로오, 후지와라 케이, 카나오카 노부

개봉 2004.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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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남 2

감독 츠카모토 신야

출연 카나오카 노부, 이와타, 토미오카 케이노스케, 김수진, 데즈카 히데아키, 아사다 토무, 우타자와 토라에몬, 타구치 토모로오, 츠카모토 신야, 시오타 도시토키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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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츠오: 총알 사나이

감독 츠카모토 신야

출연 츠카모토 신야, 에릭 보식

개봉 미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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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

감독 오토모 가츠히로

출연 이와타 미츠오, 사사키 노조무

개봉 1991.01.12. / 2017.08.31. 재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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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서 / 그래픽 노블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