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린 북>

영화의 제목인 동시에 그 자체로 묵직한 화두를 던지는 <그린 북>은 “흑인 운전자를 위한 그린 북” 혹은 “흑인 여행자를 위한 그린 북”이라 알려진 책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책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출간돼 유색인종 여행자들이 미국 남부지역을 여행할 때 숙소와 식당, 그리고 필요한 서비스들을 제공할 가게들에 대한 정보들을 담아냈다. 이 영화는 1962년 이런 ‘그린 북’을 길잡이 삼아 남부로 8주간의 긴 연주 여행을 떠나는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와 그에게 고용된 백인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의 실화를 바탕 삼아 만들어진 작품으로, 토니의 아들인 닉 발레롱가가 직접 각본과 제작에 참여해 실화의 무게감을 더한다.

그간 <덤 앤 더머>나 <킹핀> 등 독특한 코미디로 대표되던 패럴리 형제 중 피터 패럴리가 처음 동생 바비와 떨어져 홀로 감독한 영화로, 그간의 자극적이고 수위 높던 웃음과 달리 마치 <레인맨>의 여정에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관계를 거꾸로 녹여낸 듯한 감동과 웃음으로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조금은 전형적이라 할 만큼 익숙한 로드무비를 따라가지만, 뛰어난 배우들의 호연과 여유로운 연출 그리고 황홀한 음악이 조화를 이루며 다수의 영화제에서 30개가 넘는 상을 휩쓸어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 월요일에 있었던 골든 글로브에서도 5개 부문에 올라 뮤지컬/코미디 작품상과 각본상, 남우조연상을 거머쥐었다.

<그린 북>의 두 천재, 돈 셜리와 크리스 보워스

무엇보다 <그린 북>을 돋보이게 만드는 건 음악의 힘이다. 천재 피아니스트라 불렸던 돈 셜리의 투어 공연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만큼 이 영화에서 음악을 빼놓고 얘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1927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2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고, 9살의 나이에 흑인으론 최초로 레닌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했으며, 18살에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대중들에게 알려졌던 돈 셜리는 클래식을 연주하고 싶었던 바람과 달리 흑인들을 꺼리던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음반사의 요청으로 재즈로 선회하고 만다. 뛰어난 기교와 섬세한 연주 솜씨를 갖췄던 덕에 5-60년대 다양한 앨범들 취입하며 인기를 누렸지만 70년대 초 그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크리스 보워스

시간이 지나 그의 앨범들이 하나둘 절판되고, 대중에게도 거의 잊혀진 상황에서 돈 셜리의 음악을 생생하게 재현하기 위해 영화 제작진들은 뛰어난 음악가를 수소문하는데, 그 레이더망에 포착된 게 바로 1989년생의 젊은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이제 막 영화음악에 뛰어든 크리스 보워스였다. 그 역시 돈 셜리처럼 어린 나이인 4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고, 9살에 개인 클래식 교육을 받는 등 천부적인 음악 감각을 발현한 인물로, 줄리어드 음대를 나와 재즈와 팝, 영화음악을 넘나들며 전방위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보워스는 흔쾌히 영화에 합류했으며 돈 셜리의 음악을 현대적으로 복원하는 한편, 영상에서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연기와 음악으로 돈 셜리를 환생시키다

촬영 전부터 돈 셜리 역을 맡은 마허샬라 알리에게 직접 피아노를 가르쳤고(알리는 굉장히 뛰어난 제자였다고 한다), 고도의 테크닉이 드러나야 하는 부분에선 손가락 대역도 자처했다. 무엇보다 영화에 쓰일 돈 셜리의 레퍼토리를 반복해 들으며 편곡하고 연주해 1960년대의 그를 2018년에 환생시켰다. 너무나 유명한 어빙 벌린의 히트곡 ‘블루 스카이스'(Blue Skies)를 비롯해, 전통적인 부기우기 스타일 ‘워터보이'(Water Boy)와 리처드 로저스가 작곡하고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가 작사한 뮤지컬 <남태평양> ‘해피 토크'(Happy Talk), 엘라 피츠제럴드가 불러 유명해진 ‘룰라비 오브 버드랜드'(Lullaby of Birdland) 그리고 마치 돈 셜리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한 나타니엘 시크렛의 ‘더 로운섬 로드'(The Lonesome Road) 등 이 흘러나온다.

라벨과 거쉰 등 클래식에서 영향을 받은 돈 셜리 스타일에 흑인영가와 가스펠적인 터치를 더해 그의 고뇌와 정체성을 드러나게 설정했다. 하지만 원곡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의 해석이었다. 아쉽게 잊혀가는 비운의 천재 피아니스트에 대한 예우와 경의를 담아 복원한 보워스의 시도는 가히 <그린 북> 영화음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 보워스는 이 새롭게 재현된 돈 셜리 트리오의 음악 때문에 오스카를 비롯한 여러 시상식 음악상 부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자신이 작곡한 곡보다 돈 셜리 트리오의 음악이 영화 내에서 더 비중 있게 쓰였다는 이유에서 실격된 셈이다.

스코어와 돈 셜리, 삽입곡의 황금 트라이앵글

<그린 북> 사운드트랙 표지

하지만 그가 만든 짧은 곡들은 여러 삽입곡들 사이에서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의 여정에서 생겨나는 여러 상념과 감정, 그리고 상충되는 각자의 문화를 이해하게 만드는 심리적 공감대를 훌륭하게 조성해냈다. 재즈를 넘어 서정적이고 묵직한 심포닉 사운드와 피아노가 어우러진 스코어는 마치 투명한 깊은 토머스 뉴먼의 영화음악을 떠올리게 만든다. 물론 시대적 배경을 가늠할 수 있는 다양한 올드 팝의 향연도 빼놓을 수 없다. 오프닝의 포문을 화려하게 여는 건 ‘댓 올드 블랙 매직'(That Old Black Magic)이고, ‘쿠킨'(Cookin)이나 ‘왓츠 고나 두'(What’cha Gonna Do), ‘렛츠 롤'(Let’s Roll)같은 신나는 곡과 ‘소 롱 러버스 아일랜드'(So Long Lovers Island)나 ‘유 툭 어드밴티지 오브 미'(You Took Advantage of Me), ‘음 러브'(Mmm Love)같은 감미로운 넘버도 성탄절을 앞둔 영화의 분위기를 적절히 띄우는데 제격이다.

<그린 북>의 영화음악은 이런 점에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크리스 보워스가 작곡한 오리지널 스코어와 연주 여행에서 흐르던 크리스 보워스가 재현한 돈 셜리 트리오의 곡 그리고 당시 유행하던 스탠다드 팝. 이 황금비율이 딱 맞아떨어지며 벅찬 감동과 따스한 웃음, 은은하지만 긴 울림을 남긴다. 추운 겨울, 관객들에게 일말의 훈훈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는 이들의 음악 여정에 동참하기에 이 사운드트랙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승차권이 될 것이다.


사운드트랙스 / 영화음악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