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하는 작품마다 격렬한 찬반을 이끌어내는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두 편이 2월 21일 극장가에 걸린다. 최신작 <살인마 잭의 집>(2018)과 18년 만에 재개봉 하는 <어둠 속의 댄서>(2000)다. "영화란 무릇 신발 속 돌멩이 같아야 한다"고 말했던 폰 트리에는 제 영화만큼이나 파격적인 행동으로 꾸준히 회자돼 왔다.
라스 폰 트리에는 덴마크 콩겐스 링뷔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라스 트리에'(Lars Trier)다. 독일식 단어 'von'은 20대 중반 흠모하던 감독 조셉 폰 스턴버그, 에리히 폰 스트라임의 이름을 따라 붙인 것이다. 폰 트리에는 첫 장편 <범죄의 요소>(1984)로 만하임 하이델베르크 영화제에서 조셉 폰 스턴버그상을 받았다.
11살부터 어머니로부터 받은 슈퍼 8mm 카메라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 1분 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해 점차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해, 대학에서 영화사를 공부하던 21세 땐 30분이 넘는 영화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13살엔 어린이용 TV 시리즈 <비밀의 여름>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역할 이름도 라스였다. 출연료로 단편영화에 쓸 소리를 만들기 위한 전자 오르간을 샀다고 한다. 80년대엔 자기 단편과 동료들의 작품에 얼굴을 비추기도 했다.
1984년, 장편 데뷔작 <범죄의 요소>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기술상을 받았다. 그해 황금종려상은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가 수상했다. 이후 폰 트리에가 내놓는 작품 상당수가 칸 영화제 경쟁부문 후보에 올랐다.
임종 직전의 어머니에게서 여태껏 친아버지라 믿어왔던 울프 트리에가 생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듣게 됐다. 그의 나이 33살의 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2차 세계대전 저항군이었던 독일인 아버지를 수소문해서 만났으나 그리 좋은 결과를 보진 못했다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1991년 작 <유로파>에 완전히 매료돼 폰 트리에에게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온갖 공포증에 시달렸던 그는 장시간 비행 역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칸 경쟁 부문에 오른 <유로파>가 심사위원상과 기술상을 받았다. 하지만 폰 트리에는 성에 차지 않았다.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걸 알게 되자 심사위원들에게 손가락 욕을 하며 식장을 뛰쳐나갔다. 로만 폴란스키가 심사위원장이었던 그해 칸 영화제에선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가 황금종려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독식했다.
폰 트리에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1995)의 주연으로 "잘 알려진 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만을 줄기차게 주장했다. 하지만 본햄 카터가 신체/감정적인 부담을 이유로 하차하자, 영화 경험이 전무했던 영국 배우 에밀리 왓슨을 주인공 베스 역에 캐스팅 했다. 현재까지 북미 시장에서 가장 큰 수익을 거둔 라스 폰 트리에의 작품으로 남아 있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로 에밀리 왓슨은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년간의 설득 끝에 <어둠 속의 댄서>(2000)의 주인공 셀마 역으로 비요크를 섭외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폰 트리에와 비요크의 관계는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폰 트리에는 촬영날 아침 종종 비요크가 "당신을 경멸한다"고 말하며 침을 뱉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비요크는 촬영 중에 갑자기 현장을 떠나 3일간 두문불출하다 돌아온 적도 있다.
5번째 노미네이트 끝에 <어둠 속의 댄서>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왕가위의 <화양연화>,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아오야마 신지의 <유레카>, 임권택의 <춘향뎐> 등 걸작과의 경쟁 끝에 얻어낸 수상. 한편 비요크는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후 <안티크라이스트>(2009)의 샬롯 갱스부르, <멜랑콜리아>(2011)의 커스틴 던스트가 폰 트리에의 영화로 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미국 워싱턴의 이주노동자를 그린 <어둠 속의 댄서>는 사실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촬영됐다. 비행 공포증이 있는 폰 트리에가 미국 로케이션 촬영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각각 콜로라도와 앨라배마를 배경으로 한 '미국 - 기회의 땅' 연작 <도그빌>(2003), <만덜레이>(2005) 역시 마찬가지.
폴 베타니는 <도그빌>에서 주인공 그레이스(니콜 키드먼)를 숨겨주고 보살펴주는 마을 청년 톰 역으로 활약했다. 허나 그는 폰 트리에와의 작업이 끔찍했다고 회고했다. 배우와 감정적인 교감을 나누는 법도 없이 그저 꼭두각시처럼 배우를 활용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한편 폰 트리에는 <도그빌>을 촬영하기 앞서, 호흡을 맞출 니콜 키드먼과의 첫 만남 전 베타니의 호텔 방에 포르노 잡지들로 채웠다고 한다. 톰은 결국 그레이스를 배신한다.
<도그빌> 촬영 현장에서 폰 트리에는 배우들을 도발하고 뒤흔들기 위해서 벗은 채 연출에 임하려 했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따라 나체주의자 캠프에 참석해 한여름을 보낸 적이 있다고 알려졌다.
<만덜레이>에 조연으로 참여하던 존 C. 라일리는 당나귀를 실제로 죽이는 장면에 분개해, 촬영 중에 현장을 떠났다. 당시 제작자는 그 당나귀가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충분히 인도적인 방식이었다고 주장했다. 라일리의 캐릭터 헥터 박사 역은 결국 젤리코 이바넥으로 대체됐다.
조지 큐커 감독의 로맨스 코미디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는 평소 신작들은 챙겨보지 않는 폰 트리에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한편 자기 영화 속 수난 당하는 여성의 서사가 덴마크의 전설적인 감독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작품에서 영향 받았다고 말했다. 폰 트리에는 드레이어가 생전에 남긴 시나리오를 각색해 TV영화 <메데아>(1988)를 연출하고, 드레이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자 시도한 바 있다. 2009년 작 <안티크라이스트>의 마지막에는 "(러시아 최고의 감독으로 회자되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바친다"는 자막을 띄우기도 했다.
<안티크라이스트>는 본래 2005년에 촬영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제작자가 실수로 결말을 밝혀버렸고, 화가 난 폰 트리에는 촬영을 연기하고 시나리오를 다시 썼다. 이후에도 <안티크라이스트> 프로덕션은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폰 트리에의 우울증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신병원에 두 달간 머무르며 치료 받았던 그가 퇴원하자마자 촬영이 시작될 수 있었다. 폰 트리에는 촬영 초반에 제 상태가 결코 좋지 못했지만 배우들의 조력 덕분에 큰 무리 없이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난 삶의 모든 것이 두렵다. 영화 만드는 것만 빼고"라던 그의 말이 떠오른다.
2011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멜랑콜리아> 기자회견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린 장본인. 바로 라스 폰 트리에였다. 영화 속 바그너 음악을 사용한 것에 대한 질문에 그는 “오랫동안 내가 유대계인 줄 알았는데 실은 순수 나치계더라. (...) 히틀러가 이해된다. 그는 분명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벙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에게 약간 동정심을 느낀다"라고 대답해 파문을 일으켰다. 곧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영화제는 사상 최초로 폰 트리에를 '비우호적 인물'(persona non grata)로 규정했다. 충격과 공포를 감추지 못하는 커스틴 던스트의 표정이 당시 상황을 대변한다. 한편 2014년 <님포매니악> 1부가 최초 상영된 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해 3년 전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티셔츠를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3부작'을 좋아한다. <범죄의 요소>, <에피데믹>, <유로파>는 '유로파'(Europa), <브레이킹 더 웨이브>, <백치들>(1998), <어둠 속의 댄서>는 '찬란한 마음'(Golden Heart) 3부작으로 분류된다. <도그빌>, <만덜레이>에 이어 워싱턴을 배경으로 한 작품까지 '미국 - 기회의 땅'(USA - Land of Opportunities) 3부작으로 기획됐으나 마지막 편은 제작되지 않았다. 근작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은 '우울증'(The Depression) 3부작에 속한다.
우도 키에르와 스텔란 스카스가드는 폰 트리에가 특히 선호하는 배우다. 1994년 TV 시리즈 <킹덤>부터 연을 맺었던 스카스가드는 <님포매니악>(2014)까지 총 6편에 출연했다. 폰 트리에의 딸의 대부이기도 한 키에르는 15개의 장편 가운데 10개에 크고 작은 역할로 참여했다. <안티크라이스트>, <멜랑콜리아>, <님포매니악>에 모두 주연을 맡은 샬롯 갱스부르 역시 폰 트리에 영화의 단골 배우가 됐다. 세 배우 모두 <님포매니악>에 출연했다.
영화계 미투 운동이 한창 번지던 2017년 10월, 비요크가 페이스북 페이지에 함께 작업했던 '덴마크 감독'에게 성추행 당했던 경험을 밝히며 운동을 지지한다는 포스팅을 남겼다. 폰 트리에와 그의 오랜 프로듀서 페테르 알베크 얀센은 곧장 "우리는 피해자"라며 이를 극구 부인했다. 이틀 뒤 비요크는 당시의 상세한 정황이 담긴 글을 게재했다.
최신작 <살인마 잭의 집>은 2018년 칸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됐다. 나치 발언 파문 이후 7년 만에 또 다시 칸에 초청된 것이다. 자신의 살인은 곧 예술이라며 뻔뻔스럽게 말하는 연쇄살인마의 행적을 따라가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약 100여 명의 관객이 참지 못하고 극장을 나갔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