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유력 음악 웹진 '피치포크'가 역대 사운드트랙 50선을 발표했다. 고전과 당대의 음악에 대해 꾸준히 주목하고 지지하던 평소의 방향대로, (음악가에는 편애가 보이긴 하지만) 시대를 골고루 배분한 티가 역력한 리스트다. 상위 20위 안에 든 작품들 가운데 여덟 작품을 선별해 설명을 곁들였다. 50개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50. <와호장룡> 탄 둔, 2000
49. <트러블 맨> 마빈 게이, 1972
48. <티스리 만질> 라훌 데브 버만, 1966
47. <배트맨> 대니 엘프먼, 1989
46. <핑크 팬더> 헨리 만시니, 1963
45. <소피에 대한 입장들> 시카고 아트 앙상블, 1971
44. <재키> 미카 레비, 2016
43. <코야니스카시> 필립 글래스, 1982
42. <서스페리아> 고블린, 1977
41. <블루 벨벳> 안젤로 바달라멘티, 1986
40. <죠스> 존 윌리엄스, 1975
39. <겐지 이야기> 호소노 하루오미, 1987
38.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엔니오 모리코네, 1984
37. <워크어바웃> 존 배리, 1971
36. <살인의 해부> 듀크 엘링턴, 1959
35. <세도> 마누 디방고, 1977
34. <티파니에서 아침을> 헨리 만시니, 1961
33. <판타스틱 플래닛> 알랭 고라게, 1973
32. <시카리오> 요한 요한슨, 2015
31. <전장의 크리스마스> 사카모토 류이치, 1983
30.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마이클 니만, 1989
29. <현기증> 버나드 허먼, 1958
28. <경멸> 조르쥬 델러뤼, 1963
27.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존 윌리엄스, 1980
26. <서던 리치: 소멸의 땅> 벤 살리스베리 & 제프 배로우, 2018
25. <하이어드 핸드> 브루스 랑혼, 1971
24. <아키라> 게노 야마시로구미, 1988
23. <카지노 로얄> 버트 바카락, 1967
22. <록키> 빌 콘티, 1976
21. <팬텀 스레드> 조니 그린우드, 2017
20. <아귀레, 신의 분노> 포폴 부, 1972
19. <드라이브> 클리프 마르티네즈, 2011
18. <솔라리스> 예두아르트 아르테미예프, 1972
17. <미시마> 필립 글래스, 1985
16. <이레이저헤드> 데이비드 린치, 1977
15. <데드 맨> 닐 영, 1995
14. <제3의 사나이> 안톤 카라스, 1949
13. <택시 드라이버> 버나드 허먼, 1976
12. <고스트 독> RZA, 1999
11. <소셜 네트워크> 트렌트 레즈너 & 애티커스 로스, 2010
10. <할로윈> 존 카펜터, 1978
9. <샤프트> 아이작 헤이즈, 1971
8. <싸이코> 버나드 허먼, 1960
7.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마일스 데이비스, 1958
6. <시계태엽 오렌지> 웬디 카를로스, 1971
5. <석양의 무법자> 엔니오 모리코네, 1966
4. <처녀 자살 소동> 에어, 1999
3. <데어 윌 비 블러드> 조니 그린우드, 2007
2. <언더 더 스킨> 미카 레비, 2014
1. <블레이드 러너> 반젤리스, 1982
아귀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 1972
포폴 부 Popol Vuh
베르너 헤어조그는 첫 장편 <싸인 오브 라이프>(1968)에 피아니스트로 출연한 뮤지션 플로리안 프리크와 그의 밴드 포폴 부가 음악을 담당한 일련의 작품들로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이뤄나갔다. <아귀레, 신의 분노>(1972)는 헤어조그와 프리크 콤비의 대표작이다. 포폴 부의 몽롱하면서도 웅장한 음악은 아마존을 정복하려는 인간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리는 영화의 절대적인 요소로서 작용했다. 성가대의 음성과 무그 신디사이저가 뒤엉키는 음악 아래 무수한 군중이 희뿌연 첩첩산중을 줄지어 이동하는 오프닝은 지옥행의 은유를 단적으로 제시한다.
데드 맨
Dead Man, 1995
닐 영 Neil Young
뮤지션 톰 웨이츠와 존 루리에게 연기와 음악을 청하며 차곡차곡 필모그래피를 채워가던 짐 자무쉬는 야심작 <데드 맨>의 음악을 얼터너티브 록의 거목 닐 영에게 맡겼다. 녹음은 하루 만에 완성됐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조니 뎁)의 여정을 따라가는 환각적인 서부극에 즉흥연주로 화답한 것이다. 닐 영은 완성된 영화를 보며, 수십 년간 애용한 깁슨 사의 레스 폴 기타를 비롯한 단출한 악기 구성으로 꿈결을 헤매는 듯한 기묘한 모험극 곳곳을 채웠다. 노랫말도, 또렷한 멜로디나 그루브도 없는 일렉트릭 기타 노이즈와 무엇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채로 완전히 홀려버리다 결국 죽음만을 덩그러니 남겨놓는 영화가 너무 닮았다. 자무쉬는 1997년 닐 영의 콘서트 투어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이어 오브 더 호스>를 내놓았다.
소셜 네트워크
Social Network, 2010
트렌트 레즈너 & 애티커스 로스 Trent Rezor and Atticus Ross
나인 인치 네일스의 수장 트렌트 레즈너는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1997)로 처음 영화음악을 작업한 이래 13년 만에 데이비드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의 사운드트랙을 만들었다. 2005년부터 협업해온 애티커스 로스와 함께 구축한 사운드는 온기와 냉기를 동시에 머금고 있다. 키보드와 기타의 낮고 음울한 선율과 이를 감싸는 앰비언트 그리고 글리치의 질감이 역력한 비트가 어우러지는 19개의 트랙은, 페이스북이라는 디지털 매체가 탄생하는 과정이 마크 저커버그가 겪는 지극히 인간적인 갈등과 맞물리는 영화에 유일무이한 공기를 부여한다. <소셜 네트워크>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 콤비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2011), <나를 찾아줘>(2014) 등 핀처와의 협업을 이어나갔고, 최근 넷플릭스의 <버드 박스>(2018)의 음악도 작업했다.
할로윈
Halloween, 1978
존 카펜터 John Carpenter
공포영화의 거장 존 카펜터는 대부분 작품의 음악을 직접 만든다. "악보는 전혀 볼 줄 몰라도 어느 건반이든 연주할 수 있다"는 그가 작곡한 음악은 꽤나 단순하다. 지금의 존 카펜터를 있게 한 걸작 <할로윈>의 사운드트랙은 건반 악기로만 이루어져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피아노와 신디사이저의 톤과 속도가 어긋난 채 진행되는 심플한 아이디어가 순식간에 오싹함을 퍼트린다. 알람음을 잘게 쪼개 놓은 소리가 쫓기는 듯한 감정을 부추기는 메인 테마는 수많은 대중매체에서 긴장을 조성하는 BGM으로써 인용됐다. 2010년대 들어 감독으로서 활동은 부쩍 뜸해진 카펜터는 음악에 매진해 앨범을 발매하고, 이를 바탕으로한 콘서트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
싸이코
Psycho, 1960
버나드 허먼 Bernard Herrmann
알프레드 히치콕과 버나드 허먼. 영화사에 길이 남을 감독-영화음악가 콤비다.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1941)으로 영화음악 작업을 시작한 허먼은 조셉 L. 맨케비츠, 로버트 와이즈, 니콜라스 레이, 마이클 커티스 등 할리우드 명장들과의 협업을 거쳐 1955년 <해리의 소동>으로 히치콕과 만났다.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새>(1963) 등 황금기 히치콕의 걸작들은 허먼이 도움이 없었다면 이만큼 완벽하지 못했을 것이다. <싸이코>는 단연 그 으뜸이라 할 만하다. 재즈 스코어를 써달라는 히치콕의 요청을 거스르고 만든 음악은, 영화의 흑백 색조를 따라 현악 오케스트라의 소리에만 철저히 집중했다.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부터 잇따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귀를 찢을 듯한 현악음에 그대로 노출되다 보면 관객들은 어느새 노먼 베이츠의 손아귀에 완전히 포박당한다.
사형대의 엘리베이터
Ascenseur pour l'échafaud , 1957
마일스 데이비스 Miles Davis
재즈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마일스 데이비스가 처음 담당한 영화음악은 프랑스의 신인 감독 루이 말의 데뷔작 <사형대의 엘리베이터>다. 조감독의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된 이 프로젝트는 공연을 위해 파리를 방문한 데이비스가 제안을 수락하면서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데이비스와 그의 4인조 세션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스튜디오로 와 편집을 마친 영화를 보면서 즉흥적으로 스코어를 채워나가 불과 이틀 만에 작업을 마쳤다. 작전이 꼬이고 꼬여가며 펼쳐지는 이야기에 따라 다양한 분위기의 재즈 넘버들이 만들어졌지만, 무엇보다 선명히 남는 건 갑자기 사라진 연인을 기다리는 플로랑스(잔느 모로)의 쓸쓸한 심정을 닮은 마일스 데이비스의 트럼펫 연주다.
처녀 자살 소동
The Virgin Suicide, 1999
에어 AIR
감각적인 이미지로 아버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그늘에서 점차 벗어난 소피아 코폴라는 음악 또한 잘 쓰기로 정평 나 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2003)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완벽주의자 케빈 실즈를 초대했고, <마리 앙투아네트>(2006)와 <블링 링>(2012)은 뉴 웨이브와 힙합의 명곡들로 꽉꽉 채웠으며, <썸웨어>(2010)와 <매혹당한 사람들>(2017)은 남편인 토마스 마스의 밴드 피닉스가 사운드를 관장했다. 코폴라는 데뷔작 <처녀 자살 소동> 음악을 첫 앨범 <Moon Safari>으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 프랑스의 일렉트릭 듀오 에어에게 맡겼다. 몽환적인 소리들을 포근히 쌓아 '낭만'을 제시하는 특유의 방식은 에어의 두 번째 앨범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친숙한 결과물을 낳았다. 알토 색소폰 연주와 토마스 마스의 관능적인 보컬이 곁들여진 "Playground Love"는 사운드트랙의 백미다.
언더 더 스킨
Under the Skin, 2015
미카 레비 Mica Levi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의 조나단 글레이저는 9년 만에 내놓은 신작 <언더 더 스킨>을 미카추(Micachu)라는 명의로 활동하는 미카 레비에게 음악을 청했다. 런던 신포니에타와 함께 한 프로젝트 <Chopped & Screwed> 속 한껏 늘어진 비올라 소리에 반했던 것 같다. <언더 더 스킨>의 사운드트랙을 이루는 주된 악기 역시 비올라이기 때문이다. 글레이저는 처음 음식을 먹고 섹스를 나눴을 때의 감정을 표현해주길 바라며 "불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사운드는 어떨까요?" "탐탁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그들의 반응이 부자연스러웠을 때를 상상해봐요" 같은 디렉션을 던졌다. 그리고 미카 레비는 디즈니 영화와 스트립 클럽의 음악에서 영감을 얻은 사운드로 인간의 육체를 저 우주에 숙주로 바치는 외계인이 감정을 깨달아가는 살풍경을 완벽하게 수식했다. 나탈리 포트만이 재클린 케네디를 연기한 <재키>(2016)에도 미카 레비의 음악이 담겼다.
문동명 / 씨네플레이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