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우희라는 배우를 처음 눈에 담았던 영화가 뭐였을까? 이수진 감독의 <우상>을 본 뒤 문득 천우희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한공주>(2013)가 떠올랐다. <우상>의 이수진 감독과 함께 했던 영화다. 천우희는 <한공주>에서 한공주(주연 캐릭터 이름과 제목이 같다)를 연기했다. 공주는 이곳저곳 전학을 다녀야 했던 소녀다. 전학을 다녔던 이유는 영화의 말미에 충격적으로 보여진다. 천우희는 첫 주연작 <한공주>를 통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손예진(<공범>), 김희애(<우아한 거짓말>), 전도연(<집으로 가는 길>), 심은경(<수상한 그녀>) 등이 후보였다. 천우희는 울먹이며 수상 소감을 말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진행자 김혜수는 눈시울 붉혔다. 마라케시국제영화제에서 <한공주>를 본 프랑스 배우 마리옹 코티야르는 천우희의 연기를 극찬했다고 전한다. 천우희에 대해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한공주> 이전의 천우희는 어땠을까. 다시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렵지 않게 강형철 감독의 <써니>(2011)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아마도 <한공주>보다 <써니>로 천우희를 처음 본 사람이 더 많을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써니>에서의 천우희 연기가 또렷히 기억나지만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만큼 천우희가 연기한 상미 일명 본드걸의 모습은 강렬했다. 당시 언론시사회 후 기자들은 “그 본드 취한 배우 누구냐”며 서로 물어봤다. 영화주간지 ‘씨네21’에서는 ‘후아유’라는 꼭지에 그를 초대했다. 짧은 인터뷰지만 천우희에 대한 기억 찾기라는 이 글의 미션에 매우 부합하는 내용이다. 기사 가운데 하나의 질문과 답을 담아왔다.
-<써니> 촬영할 때 인상적인 일화가 있다면.
=교실신을 몰아서 찍었다. 어느 날 내 책상 위에 편지 하나가 놓여 있더라. 누가 보냈는지는 모른다. ‘여(자) 게리(올드먼)’가 되어달라는 내용이었다. 너무 감동적이었다. 누군가가 남몰래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에이. 그런 거 아니다. (웃음)
‘씨네21’
위의 인터뷰 내용 가운데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2009)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렇다. 천우희는 <마더>에 출연했다. 아마도 <써니>의 상미로 주목을 받은 뒤에 <마더>에 출연한 사실이 널리 알려졌던 듯하다. 엄청난 영화 마니아가 아니라면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당시 천우희는 소속사도 없이 활동했다. 오디션을 통해 <마더>에서 진태(진구)의 여자친구 미나를 연기했다. 만약 <마더>를 볼 계획이거나 혹은 다시 보게 된다면 천우희를 유심히 보길 바란다. 참고로 <마더>에 함께 출연한 원빈은 <써니> 개봉 이후 천우희에게 소속사를 추천해줬다고 한다. 천우희는 2014년 ‘라이징 스타 특집’으로 다시 한번 만난 ‘씨네21’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괜찮은 배우라면, 정말 원석이라면 누군가 먼저 연락해올 거라 믿었다.” 이 말은 사실이 됐다. <마더>에서의 파격적인 연기에도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던 천우희에게 <써니>는 대중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은 작품이다. 다만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 출연하지 않았더라면 <써니>의 상미도 없었을지도 모른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한공주>를 보며 처음 천우희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됐다. <써니>에서 진짜 본드에 취한 거 아닌가 싶을 어마어마한 연기를 봤으나 이름을 외우진 못했다. 뒤늦게 <마더>에 출연한 천우희를 찾아봤다. 천우희에 대한 기자의 기억은 여기까지다. 좀더 과거의 천우희가 궁금해져서 그 흔적을 찾아봤다.
2009년 개봉한 <사이에서>라는 옴니버스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떠나야 할 시간>과 <생수>로 구성됐다. 천우희는 <생수>에서 다방 종업원 전나리 역으로 출연했다. 주인공은 바닷가 절벽에서 자살하려는 남자 송장수다. 박철민이 이 캐릭터를 연기했다. <생수>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죽기 전에 물이 먹고 싶던 남자가 근처 다방에 커피를 주문했다. 당연히 생수도 같이 가져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종업원이 달랑 커피만 가져오면서 생기는 이야기다. <사이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런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가 안쓰러울 뿐이다”라는 평이 이 영화의 만듦새를 말해준다. 천우희의 열혈 팬이라면 <사이에서>를 찾아봤을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찾아보라고 추천하긴 힘든 영화다.
사실 천우희의 흔적은 꽤나 오래전에 시작됐다. 2004년 개봉한 영화 <신부수업>이 그의 데뷔작이다. <신부수업>은 한창 귀여니 소설 스타일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가 유행하던 시절의 영화다. 권상우와 하지원이 주연을 맡았다. 천우희는 네이버 영화에 등록된 내용에 따르면 깻잎 무리 2라는 배역을 연기했다. 위에서 잠깐 소개한 ‘씨네21’의 라이징 스타 특집 기사에 이때의 상황을 기억하는 천우희의 말이 등장한다.
-첫 촬영의 기억은?
=17살 때였나. <신부수업>에 불량학생으로 잠깐 출연했다. 대사도 없이 불량학생 중 한명으로 서 있는 거였는데, 현장에서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스크린에서 보는데 (머리를 감싸쥐며) 극장을 뛰쳐나가고 싶더라.
‘씨네21’
천우희는 강혜정, 배종옥, 정경호가 출연한 <허브>(2007)라는 영화에서도 단역으로 이름을 올렸다. 이때의 배역명은 깻잎 2. ‘깻잎’은 과거 불량 여학생 사이에서 유행한 머리 스타일이다. 앞머리를 깻잎처럼 이마에 붙였다. 실제 고등학생이던 천우희는 데뷔 시절 주로 불량학생으로 캐스팅 됐다. 이 첫단추 때문이었을까. 이후 천우희는 이른바 센 캐릭터를 많이 연기했다. <써니>가 특히 그랬다. 2004년 데뷔 이래 2013년 개봉한 <한공주>, <우아한 거짓말>까지 꽤 오래 교복 입은 모습으로 기억되기도 했다. 2014년 이후 천우희는 교복을 벗었다. 웹드라마 <출중한 여자>, <카트>, 2015년 <해어화> 등을 거치며 불량학생 이미지는 서서히 사라졌다. 2016년 <곡성> 이후 천우희는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 가운데 한 명이 됐다.
새삼스레 천우희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봤다. <우상>에 출연한 천우희는 최련화라는 조선족 여인을 연기했다. 이 여자는 앞뒤 가리지 않고 욕도 잘한다. 자신에게 해코지한 인물은 반드시 복수를 한다. 꽤나 거칠고 센 캐릭터다. 어쩌면 그 모습이 과거의 천우희를 생각나게 만들었지도 모르겠다. 앞서 소개한, 천우희가 <써니> 촬영장에서 받았다는 쪽지를 다시 떠올려보자. 그 누군가가 천우희에게 ‘여자 게리 올드만’이 돼라고 말했다. <우상>을 보고 나면 <써니> 촬영장의 그 누군가는 꽤나 배우 볼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거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