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테러가 벌어진 지 벌써 15년이 지났다. 그동안,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은 사살된 지 5년이 지났고, 부시에 이은 대통령 오바마까지 재선해 임기말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 아니 세계는 뉴욕 쌍둥이빌딩을 여객기가 들이받는 그 순간의 충격과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다. 역사를 뒤흔든 사건인 만큼, 911테러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제작됐다. 그리고 그 하나의 사건을 담아내는 시선과 방식은 모두 저마다 달랐다. 다시 9월 11일 맞아, 911테러에 관한 영화 다섯 편을 모아봤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
(World Trade Center, 2006)

올리버 스톤이 한때 가장 정치적인 감독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플래툰>(1986), <월 스트리트>(1987), <JFK>(1991), <닉슨>(1995) 등 줄곧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로 논쟁적인 영화를 만들던 시기다. 하지만 911테러 발생 후 5년이 지나 올리버 스톤이 발표한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휴머니즘으로 가득한 ‘재난’영화였다. 뉴욕을 순찰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경찰 존 맥라글린(니콜라스 케이지)은 여느 때처럼 도시를 돌던 중 테러 소식을 듣는다. 다급한 구호 지원요청에 현장으로 달려간 그는 윌 히메노(마이클 페나) 등 3명의 대원들과 함께 건물로 들어간다. 하지만 순식간에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존과 윌 둘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뉴욕의 경찰이었던 존 맥라글린과 윌 히메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포스터를 보면 언뜻 위험을 무릅쓰고 총대를 멘 공무원의 구조기처럼 보이지만, 두 주인공은 잔해더미에 깔려 구조를 기다린다. 매몰된 그들의 모습과 이 소식을 들은 가족이 교차되면서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신다. 이처럼 ‘가족’과 ‘재난’이 조합된 드라마엔 끝내 살아남았다는 승리의 정서가 감돌기 마련이지만,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감싸는 건 무력함이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는 중에 피신하는 사람들을 쳐다볼 뿐이고 현장에서도 이렇다 할 활약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구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는 경찰들의 수난기를 통해, 무력하게 사건을 맞닥뜨렸던 ‘살아남은’ 이들을 위로한다.


<화씨 9/11>
(Fahrenheit 9/11, 2004)

“화씨 451이 책이 불타는 온도라면 화씨 911은 진실이 불타는 온도다.”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이라는 제목을 레이 브래드베리의 걸작 SF소설 <화씨 451>에 대한 오마주로서 따왔다. 저 말 그대로, <화씨 911>은 911테러를 둘러싼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석연찮은 정황의 진실을 파고드는 다큐멘터리다.
   
마이클 무어는 국민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해 공화당이 벌인 갖가지 술수들, 부시 가문과 빈 라덴 가문의 긴밀한 유착관계, 명분 따윈 없는 이라크 전쟁에 파병돼 죽거나 부상당한 젊은이들, 집과 가족을 잃은 이라크 민간인들 등 주류 언론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자료들이 우후죽순 쏟아진다. 거기에 <로저와 나>(1989), <볼링 포 콜럼바인>(2002) 같은 대표작에서 익히 보여준, 사건에 대한 중요 인물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막무가내의 질문을 던지는 방식까지 더해, 지극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시 정부를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쓴다. 그렇다, 끌어내리는 것. 차라리 황색언론에 가까운 <화씨 9/11>의 최우선 목적은 바로 부시의 재선을 막는 것이다. 경쟁부분에 올려 처음 영화를 공개한 칸 영화제 역시 그 의도를 간파한 듯이 이 작품에 기꺼이 황금종려상을 안기는 다분히 정치적인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알다시피 부시는 재선에 성공했다.



<플라이트 93>
(United 93, 2006)

<플라이트 93>은 폴 그린그래스의 2006년작이다. 1972년 북아일랜드 시민 13명이 영국군에 의해 사망한 사건 ‘피의 일요일’을 객관적이고 현장감 있게 그린 <블러디 선데이>(2002)와 재빠르고 현란한 액션으로 '본'시리즈의 이름값을 저 높이 끌어올린 <본 슈프리머시>(2004) 다음에 놓인 작품이다. 이 두 영화를 지나온 폴 그린그래스는 자신의 장기를 한껏 발휘해 뭇 관객을 911테러의 아비규환으로 데려다놓는다.

사건 당시 납치된 4개의 여객기 가운데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펜타곤과 충돌한 비행기와 달리 목표물로 향하던 중 추락한 유나이티드 에어라인 플라이트 93. 이 곳이 영화의 무대다. <플라이트 93>은 승무원, 승객, 테러범이 비행기에 오른 뒤 납치되어 펜실베이니아 벌판에 곤두박질치기까지의 과정을 묘사한다. 긴급상황에 대처하는 지상과 무방비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기내를 오가는 영화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의 절박한 마음만 비추는 걸로 만족할 생각이 없다. “하나의 사건을 또렷이 그리고 통렬히 주시하면 형상 속에서 그 사건보다 거대한 무엇, 시대의 DNA 같은 것이 보인다"는 말처럼, 폴 그린그래스는 그 시각 여객기 안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상황을 끈질기게 응시한다. 그 안에서는 모두가 연약하다. 심지어 이 지옥을 만든 테러리스트조차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 2011)


특정한 일에 과도한 집착과 몰입을 보이는 소년 오스카(토마스 혼). 그에게 아빠(톰 행크스)는 친구이자 선생님 같은 존재다. 하지만 돌연 아빠가 테러의 희생자로 세상을 떠난다. 오스카는 아빠의 유품에서 열쇠를 발견해 그것이 담긴 봉투에 적힌 '블랙'이란 이름을 보고, 열쇠의 주인을 찾아나선다. 뉴욕에 있는 '블랙 씨'를 모두 만나러 다니는 것이다. 아빠의 사고 이후 오스카의 불안은 더욱 심해지지만, 손에 탬버린을 꼭 쥐고 때마다 마음을 달래며 자기만의 모험을 계속해 나간다. 다행히도 오스카가 뉴욕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그에게 응원을 던지고,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할아버지도 만난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은, 그 자잘한 제목이 무색하게도, 911테러에 관한 가장 차분하고 드라마를 보여준다. 미국의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911테러를 다룬 작품들 특유의 극단적인 감정과 상황을 배제한 채 단정하게 오스카의 여리지만 강직한 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여타 포스트911 영화들에 비해 밋밋하다는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오스카의 여행을 따라가다보면, 영화가 전하는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에 향한 위로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영화 전반을 확실하게 장악하는 오스카 역의 토마스 혼은 물론 톰 행크스, 막스 폰 시도우, 산드라 블록, 존 굿맨, 제프리 라이트 등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가 특히 좋다.



<제로 다크 서티>
(Zero Dark Thirty, 2012)


<제로 다크 서티>의 시작은 결과물과 사뭇 달랐다. 본래 계획은 사건 후 홀연히 10년 동안 자취를 감춘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이 추적하다 실패하는 이야기가 담길 예정이었다. 하지만 2011년 5월 빈 라덴이 사살되자 불가피하게 이야기는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영화는 줄곧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테러를 감시하기 위해 파키스탄 미 대사관에 배정된 CIA 요원 마야(제시카 채스테인)를 따라간다.

영화를 연출한 캐스린 비글로는 전작 <허트 로커>(2010)로 이라크에서 임무 중인 폭발물 제거반의 숨막힐 듯한 작전을 재현한 바 있다. 폭발 직전의 순간을 극도의 긴장을 몰아붙여 담아낸 순간들로 극찬을 받았다. 전쟁 현장의 위험을 보여주는 성과로는 <제로 다크 서티> 역시 뒤처지지 않는다. 주로 밤에 작전이 이뤄지기 때문에, 자연히 스크린 속 시야가 매우 어둡지만, 그 한정된 시야의 단점을 뚫고 나와 오히려 더 팽팽한 몰입을 자아낸다. 영화는 80%를 마야의 고독을 관찰하고, 20%를 마지막 넵튠 스피어 작전을 펼치는 과정을 긴박하게 펼쳐놓는 과정에 할애한다. 컨벤션을 비튼 전쟁영화의 쾌감도 만족스럽지만, 무엇보다 짙게 남는 건 10년간의 추격 끝에 드디어 빈 라덴을 사살하고 난 후 마야의 모습에서 배어 나오는 허탈함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