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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력 스포주의! <오징어 게임> 시즌3, 씨네플레이 기자들의 리뷰와 별점

김지연기자
성찬얼기자
주성철편집장
이진주기자
추아영기자
〈오징어 게임〉 시즌3 포스터
〈오징어 게임〉 시즌3 포스터

드디어 시리즈의 마지막 챕터, <오징어 게임> 시즌3가 27일 오후 4시, 넷플릭스에서 공개됐다. <오징어 게임> 시즌3은 자신만의 목적을 품고 다시 참가한 게임에서 가장 친한 친구를 잃고 만 기훈(이정재)과, 정체를 숨긴 채 게임에 숨어들었던 프론트맨(이병헌), 그리고 그 잔인한 게임 속에서 살아남은 참가자들의 마지막 운명을 그린 이야기를 담았다. 씨네플레이 기자들은 마지막 시즌을 정주행한 후, 저마다의 감상을 공유했다. 초강력 스포일러가 있으니, 꼭 정주행을 한 후 아래의 리뷰를 읽길 권한다. 정주행 후, 여러분의 한줄평과 별점을 댓글로 공유해 주시라.

※ 아래부터는 <오징어 게임> 시즌3의 결말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시즌3
〈오징어 게임〉 시즌3

성찬얼 _모로 가든 서울로는 갔어야 했는데

허심탄회하게 말하자. 우린 <오징어 게임> ‘시즌3’를 기다린 것이 아니다. ‘시즌2의 파트 2’를 기다렸다. 이야기의 허리쯤에서 막을 내린 지난 시즌의 뒤를 어떻게 이을까. 그게 우리가 ‘시즌3’를 기다린 이유다. 실제로 동시촬영이었거니와 흐름상 시즌2에서 이어질 수밖에 없으니 <오징어 게임> 시즌3은 성실하게 그 임무를 수행한다. 문제는 그 과정과 결과값이다. 필요한 순간에 한발 물러서고, 숨돌릴 시간에 갑자기 스프린터 스타트를 밟는 이 드라마는 시즌2의 단점을 보완해야 할 위치에서 전작들을 ‘선녀’로 보이게 한다. 각 인물의 내면을 심층적으로 그려보려는 이야기는 정작 카메라가 인물들의 심리를 담을 줄 몰라서 거듭 좌초한다. 인물의 흔들리는 심리를 보며 서스펜스를 느껴도 모자란데, 충격적 결과가 보여지고 나서야 이 인물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짐작해야 한다. 배우들이 연기를 잘할 때 벌어지는 폐해를 목격한 기분이다. 판이 커진 게임에서 이것저것 담으려다 모조리 흘리는 격이다. 여전히 게임을 진행하는 파트들은 재밌다. 그렇기에 더 단점이 또렷해진다. 그 외의 파트는 모조리 삭제했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로 헐겁게 얹어져 있다. 신드롬을 증명하듯, 아니면 팬들을 달래려는 듯 시즌 피날레에서 악 소리 나는 카메오를 선사하긴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건 넓어진 세계관도, 충격적인 카메오도 아닌 이 자본과 폭력의 장대한 서사를 납득할 결말이었다. <오징어 게임> 시즌3은 거기에 충족하지 못한다.

한 번 욕 먹을 거 두 번 욕 먹는 가장 비싼 방법 ★★☆


〈오징어 게임〉 시즌3
〈오징어 게임〉 시즌3

김지연_이럴거면 그러지말지

궁금해서 잠이 안 온다. 그때 왜 그랬는지. 시리즈의 최종장까지 완주했음에도 아직도 해갈되지 않은 궁금증이 산더미다. 성기훈은 왜 게임에 다시 참가했는지. 황준호(위하준)는 왜 그토록 형을 찾아 헤맸는지. 노을(박규영)은 왜 그렇게 경석(이진욱)을 지켜줬는지. 아마도, 시즌2와 시즌3를 합쳐 6~7개가량의 에피소드로 공개했어야 할 것을, 늘이고 늘여 두 개의 시즌으로 만들고자 한 넷플릭스의 요구, 즉 '어른의 사정'이 작용한 탓이겠지만, 불필요한 캐릭터와 장면이 너무도 많다. 아쉬운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명색이 '데스 게임' 장르인데도 인물들은 너무나 편리하고 쉬운 방식으로 퇴장한다. 더불어, '시즌3에 바라는 점' 기사에서도 언급했지만, 성기훈의 '영웅놀이'는 우스꽝스러워야 했다. 그런데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우스꽝스럽긴 했다. 적어도 2화까지는 말이다. 시즌2까지만 해도 대의를 위해 반란을 도모하던 성기훈이, 갑자기 강자가 아닌 약자(대호)를 향해 살의를 느끼는 부분은 마치 구조를 탓해야 할 상황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일개 개인에게 화를 돌리는, 현실의 군상들과 닮았다. 그런데, 성기훈은 준희(조유리)의 아이가 태어나자 마치 그의 대부라도 된 듯 거룩한 부성을 발휘한다. 이 인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는 돈키호테인가, 성모 마리아인가? 더불어, <오징어 게임> 시즌3에서는 생명과 죽음, 아이와 부모에 관한 코드가 중첩되어 피로감만 쌓인다. 왜 그렇게 살고 싶은가? 아이 때문이다. 왜 그렇게 탈출하고 싶은가? 아이 때문이다. 왜 갑자기 각성했는가? 아이 때문이다. 왜 그들은 싸우는가? 아이 때문이다. 인물의 모든 동기와 전환점을 단지 '아이 때문'으로 치환해 버리니, 당연하게도 극적 재미가 덜해진다.

비극의 '비'만 있고 '극'은 없다 ★★


〈오징어 게임〉 시즌3
〈오징어 게임〉 시즌3

이진주_서사의 무게에 짓눌린 게임

<오징어 게임>의 본질은 무엇일까. 단언컨대, ‘게임’이다. 첫 시즌의 신드롬을 이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달고나 뽑기, 줄다리기, 구슬치기까지. 한국인의 집단 기억을 자극하는 전통 놀이는 국내 시청자에겐 추억을, 해외 시청자에겐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시즌3은 그 본질에서 멀어졌다. 규칙도, 긴장도, 의미도 흐려진 채, 게임은 그저 인물들을 위한 장치로만 존재한다. 사실 이것은 이미 예정된 균열이다. 시즌2와 3은 본디 한 번에 촬영된 하나의 덩어리다. 그 안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1편의 후광과 함께, 이른바 ‘날고 기는’ 배우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인물의 스케일이 커졌다. 서사는 풍성해졌지만, 갈래는 분산되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껴안고 울고 있는 캐릭터들 틈에서, 게임은 자리를 잃었다. 마치 사방에서 우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정작 집을 나서지 못하는 부모처럼 <오징어 게임> 시즌3은 그렇게 한자리에 선 채 숨을 고르고 있다.

이쯤 되면 ‘오징어 게임’ 아닌 ‘오징어 반상회’ ★★


〈오징어 게임〉 시즌3
〈오징어 게임〉 시즌3

추아영_영웅이 추락한 지극히 허무하고 절망적인 세계

게임을 통해 생존자를 가려내고, 생존하기 위해 나 이외의 타인을 죽여야만 하는 냉혹한 세계. <오징어 게임> 시리즈는 삶 자체가 서바이벌이 되어버린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사회를 축소해 그려내면서 전 세계인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시즌1에서 황동혁 감독은 창작자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으로 신자유주의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구조적 폭력과 모순, 그리고 그로 인한 인간성의 파괴를 적확하게 짚어냈다. 시즌2에서는 게임 내에 투표 제도를 도입하면서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드러냈다. <오징어 게임> 시리즈는 세계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작품이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기억될 수 있었다. 시즌3가 나오기 전까지는.

이번 작품 <오징어 게임> 시즌3에서도 황동혁 감독의 예리한 관찰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일부’ 존재한다. 극 중, 가장자리로 밀려나면 아래로 떨어져 죽는 고공 오징어 게임에서 공정한 방법 ‘다수결’을 들먹이는 어른들은 젊은 민수(이다윗)를 탈락시키기 위한 모의를 벌인다. 민수의 마약 중독은 그들에게 낙오자로 낙인찍힐 빌미가 되었다. 그런데, 민수를 가장자리로 몰아넣기 위한 판을 짜고 조정하는 이는 정작 기성세대의 어른들이 아니다. 한 명의 다른 청년 명기(임시완)가 이 판을 주도하며, 민수는 좀 더 명석한 두뇌를 가진 명기의 손에 의해 죽는다. 민수의 죽음은 여실히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다. 민주주의를 줄곧 외치는 정치인들은 자기 이익에 눈멀어 젊은층의 마약 중독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환원하고, 한 번 사회 바깥으로 내쳐진 청년을 더욱더 사회의 사각지대로 몰아세운다. (우리는 민수가 전세사기 피해자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생존이 최우선인 대한민국의 2030에게 있어 타인은 사회적 공감을 나눌 동지가 아닌 밟고 올라가야 할 경쟁자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 시즌3가 현실을 적확하게 스케치했다고 볼 수는 없다. 우선 각각의 소수자를 대변하는 주요 인물들의 마지막을 자살로 매듭짓는 설정을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또 시즌2에서 극의 몰입력을 약화한 황준호의 서사는 인호와 준호의 관계를 풀어내지 않은 채 무력하게 끝나버린다. 기훈과 준호의 좌절은 자본주의가 깊숙이 자리한 지금의 시대에서 선한 마음을 지닌 몇몇 개인이 시스템을 무너트릴 수는 없다는 합리적인 추론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추론이 극 속에서 벌려 놓은 모든 서사를 해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임산부인 준희와 그녀의 아기를 통해서도 반복된다. 무엇보다 시즌2에서 혁명을 이끈 영웅으로 그려졌던 성기훈의 추락과 ‘캐릭터 붕괴’는 납득할 수 없을 정도다. 성기훈의 사회에 대한 냉소와 절망의 초점은 명확하지 않다. 단지 한때 혁명을 이끈 586 운동권에 대한 소극적 캐리커처로만 그칠 뿐이다. 황동혁이 그리는 지극히 허무주의적인 절망의 세계에서 소시민과 소수자들의 연대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성기훈이라는 영웅의 추락은 곧 작품의 추락으로 이어졌다.

좌우의 날개를 모두 꺾어버리는 <오징어 게임> 절망편 ★★


〈오징어 게임〉 시즌3 비하인트 스틸
〈오징어 게임〉 시즌3 비하인트 스틸

주성철_시즌3에 이르러 깨닫게 된 ‘사람조심’의 메시지

예상은 빗나갔다. 참가자의 절반을 날려버린 지난 시즌의 결말을 보면서, <오징어게임> 시즌2와 시즌3의 관계는 아마도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타노스가 세상의 절반을 날려버린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의 관계와 비슷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황동혁 감독은 망가진 것들의 ‘재건’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성기훈(이정재)은 강대호(강하늘)를 향한 사적 복수심에 스스로를 갉아먹고, 이명기(임시완)와 김준희(조유리)의 아이 출생과 장금자(강애심)와 박용식(양동근)의 모자 관계 복원 등 시즌3에서 인도주의적으로 해소해 주리라 여겼던 많은 것들을 비켜 간다. 선택과 포기 사이에서 주저 없이 후자로 몰리는 이 절망적인 풍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시즌3까지 이어오면서 연출자 스스로 변할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이리 계획했던 것일까. ‘무한도전’의 ‘못친소 페스티벌’을 연상시키는 클라이맥스는 그 절망감의 정점을 찍는다. 2화에서 담벼락에 쓰인 낙서 ‘사람조심’은 상대를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한 자기 자신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읽힌다. 어쨌거나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오징어게임>은 드디어 대단원의 막을 내렸고, 인간 탐욕의 드라마를 이처럼 유년기의 게임들로 치밀하게 그려낸 시리즈는 없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세 살 욕심도 여든까지 간다고나 할까. 그래서 마지막 6화의 제목 ‘사람은’의 뒷말을 시청자 각자 어떻게 채우게 될지 궁금하다. 성기훈이 뭐라고 했는지는 직접 확인하시길.

결국 남겨진 건 개인들, 가장 절망적인 정서의 시즌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