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의 <밀정>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시절을 배경으로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을 결의한 단체 '의열단'이 일본 경찰과 속고 속이는 암투극을 벌이는 영화다. 액션보다는 스타일을, 이야기보다는 인물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영화라 하겠다.
관객 각자의 호불호는 잠시 제쳐두고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와 '스파이'라는 캐릭터를 풀어나가는 <밀정>의 '스타일'을 생각해보자. 어릴 때 봤던 프렌치 누아르 영화들이나 존 르 카레 원작의 에스피오나지 영화들과 연결지어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런데 좀 비슷하면서도 느낌이 다른 영화가 한 편 있다.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밀정>과 유사한 소재를 다루고 있거나 스타일을 공유하는 영화 가운데에서도 '상하이'가 배경인 점이 같고 시대 배경도 (다소 차이는 있지만) 일제강점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많은 영화다.
그리고 김지운 감독은 <밀정>을 준비하면서 상하이의 공기를 참고하기 위해 <색, 계>를 일부러 챙겨보기도 했다. 다르지만 또 묘하게 닮기도 한 두 영화에 대한 몇 가지 공통점을 사진과 함께 찾아보면서 영화가 고민하는 것들을 이야기해보자.
갈등하는 스파이
<밀정>은 제목 그대로 '스파이'에 관한 영화다.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정보를 캐낼 목적으로 혹은 몰래 공격하기 위해 적에게 접근하는 사람들.
주인공인 의열단 김우진(공유)은 안전하게 거사를 벌이기 위해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에게 접근한다. 그는 이정출에게 조국을 위해 '스파이'가 되어달라고 청한다. 이정출은 마침 상부의 지시로 의열단을 색출해 처단하라는 지시를 받고 몰래 김우진과 친해지려고 접근하던 중이었다. 이정출은 양쪽 어디에도 잠입할 명분이 생겨 갈등하게 된다.
<색, 계>의 주인공 역시 갈등하는 스파이다. 홍콩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왕치아즈(탕웨이)는 멋있는 선배들이 공연하는 연극부에 들어가 '연기'에 대한 설레임을 느낀다. 그런데 선배들이 나라를 위한 독립 투사가 되어 투쟁하며 살기를 바란다. 심지어 몰래 암살작전을 펼치잔다.
젊은 날의 치기와 대의명분이 뒤섞인 청년들의 거사는 일본의 앞잡이인 정보부 이대장(양조위)의 목숨을 빼앗는 것. 연극부 선배 광위민(왕리홍)은 왕치아즈를 앞세워 이대장의 마음을 사로잡게 한 뒤 꼬여내어 죽일 계획을 세운다. 왕치아즈는 신분을 숨기고 이대장에게 접근한다.
가짜 신분
송강호가 연기하는 이정출과 탕웨이가 연기하는 왕치아즈는 적진에 침투해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기 때문에 가짜 신분을 내세우게 된다.
<밀정>의 이정출은 일본경찰이지만 상부의 지시에 따라 의열단원 김우진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골동품 상인으로 신분을 위장한 김우진을 찾아가서는 자신은 경찰노릇에 회의를 가지고 있고 이제 돈을 벌기 위해 무역업에 손대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가 의열단인지 모르는 척 하면서 말이다.
<색, 계>의 왕치아즈는 독립투사를 잡아다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정보부 소속 이대장 곁에 다가가 자신이 홍콩 출신 무역업자의 아내인 막부인이라고 소개한다. 나라 안팎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귀중한 생필품을 들여와 이대장과 그의 부인에게 나눠주며 환심을 산다. 믿을만한 측근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묘하게 두 사람 다 가짜 신분으로 무역업을 하는 설정을 가져다 쓴다. 도시와 도시, 나아가 해외 입출국이 상대적으로 많거나 자유롭기 위해서는 그만한 가짜 신분이 없기 때문. 아무튼 두 사람은 배우의 연기로 치자면, 진짜 그 사람이 되어보는 듯한 느낌의 '메소드' 연기를 잘 해야 하는 상황이다.
나 자신도 속여야 한다?
왕치아즈는 막부인이란 가짜 신분으로 위장해 이대장에게 접근하는데, 당연하겠지만 이대장의 마음을 사로잡기란 쉽지 않다. 괜히 당대 최고의 친일파 간부가 된 것이 아니다. 누구도 믿지 않고 철저하게 양심을 팔아버린 삶을 살기 때문에 권력자가 될 수 있었던 거다. 그런 그가 미모의 여인에게 쉽게 눈길을 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데 일종의 '스파이' 노릇을 해야 하는 왕치아즈는 이대장의 카리스마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린다. 뭐든지 어설픈 학교 선배들과 비교했을 때 이대장의 카리스마는 관능적인 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왕치아즈 스스로 '연기'에 너무 몰입해 자신의 진짜 감정이 뭔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색, 계> 초반의 그림과도 같은 순간이 그 혼란스러운 감정을 증명한다. 자기 집으로 초대한 왕치아즈의 집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대장은 만감이 교차한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집열쇠 하나, 그림자 하나의 떨림에도 두 사람의 미묘한 공기가 느껴질 정도다.
왕치아즈는 자신을 속이는 척하면서 연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에게 본능적으로 끌리고 있다. 그러니까 그녀의 미묘한 손동작과 눈빛과 표정에서 이대장이 집으로 들어오길 거부했을 수도 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저대로 이대장이 왕치아즈의 집에 따라가면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이다.)
떨리는 마음에 있어서는 이정출도 왕치아즈 못지 않게 무지하게 떨린다. 이정출은 김우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돈 벌 궁리를 하는 척 다가간다. 이정출이 어떤 사람인가? 예고편에도 나온 대사지만 이정출은 애초에 조선독립 자체를 부정하거나 혹은 독립이 성사되지 못하길 은근히 바라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는 신념을 가진 쪽이라기보다 권력을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에 그가 친구도 조국도 몽땅 배신하고 어떻게 승승장구하는 친일파가 되었는지에 관한 '액션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이정출을 기회주의자라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에 그는 일본이나 조선 어느 쪽이든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선택에는 권력자의 우열이 첫 번째 선정 이유다. 그런데 왜 매번 갈등하는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누가 권력자가 될지 잘 판단해야 살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이정출이 어느 편을 선택할지 여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언제 왜 흔들리느냐가 좀 더 중요하다. 중요하다는 건 곧 비중 있게 묘사하는 장면이 많다는 얘기다. 이정출이 의열단을 만나 서서히 어떤 심경 변화를 겪게 되는 순간이 영화에 자주 등장한다. 의열단장 정채산을 만날 때, 일본경찰 상부가 자신보다 자신의 경쟁자인 하시모토를 더욱 신임할 때, 의열단이 궁지에 몰렸을 때 등등 이정출이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영화에 계속 등장한다.
참고로, 친일파 이정출과 이대장 사이에도 뭔가 공통점이 없을까? 왜 없겠나? 둘 다 일제의 앞잡이라는 점이 그 무엇보다 똑같은 공통점이 아니겠는가? 반은 농담이고 반은 맞다.
클로슈
의열단원의 유일한 홍일점 연계순(한지민)의 의상은 <색, 계>의 왕치아즈의 의상과 닮아 있다. 1920-30년대에 주로 유행했던 의상을 모티브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비슷할 수밖에 없겠는데 의상을 통한 두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는 면도 영화에서는 중요하니 닮은 의상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두 사람이 쓴 모자인 클로슈는 당대 유행했던 여성용 모자로 유행에 민감함 소위 갖춰 입은 여성들이 주로 쓰던 모자다. 눈가에 아주 살짝 그늘이 질 수 있는 형태다. 별 건 아니지만 '그림자'가 중요했던 두 인물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희미한 공통점 중 하나다.
뿐만 아니라 같은 공간과 시대배경의 어떤 영화에서도 등장할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하다. 더 흔하디 흔해야 두 사람이 저 모자를 쓴 이유가 부각되는 아이러니한 의상인 것이다.
또 다른 주인공, 상하이
<밀정>과 <색, 계>의 주요 배경인 중국 상하이는 19세기 외세의 무력에 의해 개방된 이후 전세계 문화가 뒤섞인 국제도시로 성장해갔다. 두 영화의 시대가 비록 각각 1920년대와 1940년대로 시대 격차가 있지만 일제 강점기가 무르익어 가던 시기와 식민 지배의 저항이 극에 달하던 시기의 공기는 매한가지였을 터.
냉전 시대의 베를린이 그러했듯, 상하이라는 공간은 신문물을 앞세운 밝은 미래와 세계 열강을 앞세운 독립투사들의 어두운 미래가 뒤섞이던 공간이다.
두 영화 모두 인물들이 자신의 처지를 직감하게 되는 순간이 각각의 스타일을 앞세워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밀정>은 대부분 그런 장면에서 밤의 차갑고 어두운 공기와 분위기, 담배 연기나 또각거리는 구둣발자국 소리 등으로 묘사하는 반면, <색, 계>는 별거 아닌 일상적인 순간을 보여준다. 극적인 효과를 얻게 만드는 방식이 전혀 다르다. 상하이의 밤과 낮이라 해도 되겠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
이정출과 왕치아즈는 모두 내면의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 인물이다. 그것이 꼭 적과의 동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의 심리 변화에는 다양하게 복잡한 면이 얽혀 있다. 이정출은 의열단을 색출해 승진도 하고 상부에 인정도 받는 게 중요하지만 경쟁자인 하시모토(엄태구)에게 공을 뺏길까봐 두렵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설프게 의열단을 도와줬다가는 자신이 죽은 목숨이 되게 생겼다. 그러니까 이정출은 갈등하게 되는 거다.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왕치아즈는 이대장을 상대로 한 번의 거사를 실패한다. 그를 향한 감정이 흔들리기도 했다. 아무튼 처참한 실패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영국에 나가 있는 아빠 곁으로 가기만을 바란다. 그런데 3년 후에 독립투사들이 찾아와서는 한 번만 더 거사를 도모해주면 외국으로의 이민을 추진해주겠다고 회유한다. 그녀는 나라를 벗어나기 위해서 작전을 또 한 번 도모하게 되는데 어쨌든 이번에 실패하면 그녀 또한 죽음이다. 왕치아즈는 자신이 마음이 흔들렸던 이대장을 또 한 번 유혹해야 한다. 그런데 자기가 흔들리게 생겼다.
두 사람은 각자 무엇을 택하게 될까. 조국을 택할지, 자신의 안위를 택할지, 그도 아니면 사랑을 택하게 될지. 이정출과 왕치아즈는 과연 어떤 선택의 길을 걷게 될까. 그런데 결국 어떤 선택을 하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 끝까지 내몰리게 되는 거라면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영화를 보고 두 인물의 마지막 행동, 혹은 어떤 상황들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해석' 가능할지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는 것도 우리의 일상 속 선택이듯, 우리는 늘 선택하며 살아간다. 영화의 주인공들은 선택을 포기하는 순간, 일제강점기에 순응하게 된다. <밀정>과 <색, 계>는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나 그런 선택의 기로에 놓인 인물들의 이야기를 공통으로 다룬 영화임과 동시에,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세상에서 끝까지 싸워내고야 마는 사람들이 주인공인 영화다.
그럼 여러분은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