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영화'하면 어떤 이야기를 담은 극 영화를 떠올리지만, 영화는 본디 다큐멘터리로 시작했다. 그리고 극 영화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동안에도 다큐멘터리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사실성을 담보로 영토를 확장해갔다. <파이어 앳 시>, <성스러운 도로>, <화씨 9/11>처럼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극 영화들을 제치고 최고 상을 거머쥔 사례도 있다. 이 현실을 누구보다 가깝게, 그리고 낯설게 카메라로 포착한 다큐멘터리 장인들을 소개한다.
※ 감독들의 작품들 중 국내 개봉한 장편 다큐멘터리만을 다루는 걸 참고하길 바란다.
그렉 매길리브레이
<아메리카 뮤직&와일드>
그렉 매길리브레이는 북미 다큐멘터리 덕후에겐 친숙한 이름이다. 왜? 아이맥스 전용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던 감독이기 때문이다. 1976년 연출한 <창공을 날아라>를 시작으로 <살아있는 바다>, <신기한 동굴 여행>, <산호초 모험> 등 아이맥스 카메라로 자연의 모습을 담아내 관객들에게 선사했다. 초창기에는 <파이브 썸머 스토리즈>나 <스피드>, <비행의 마술> 같은 사회와 인간의 기술이 빚어내는 순간도 담았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하는 작품이 많아지면서 최근작들은 <허리케인 온 더 바유>, <알프스>, <그랜드캐년 모험>처럼 꾸준히 자연에 중점을 두고 있다. 4월 24일 개봉한 <아메리카 뮤직&와일드>는 음악과 자연에 대한 중편 다큐멘터리를 두 개를 결합한 신작이다.
프레더릭 와이즈먼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잭슨 하이츠에서>, <내셔널 갤러리>, <버클리에서>
최고령자급 연배에도 신작을 낼 때마다 주목받는 프레더릭 와이즈먼. 1930년생인 그는 1967년 <티티컷 풍자극>으로 데뷔한 이후 다큐멘터리만 40여 편 만든 장인 중의 장인이다. 그의 다큐멘터리 특징은 공간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사건이나 인물에 집중하는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 달리 그의 작품은 공간으로부터 시간, 구성원들을 포착해나가며 관계성에 집중한다. 그래서 (본인은 썩 마음에 들지 않다지만)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관찰 다큐멘터리의 거장’. 그는 인간 행동의 다양한 면모를 다양하게 담을 수 있게 도서관, 미술관, 정신병원, 체육관, 고등학교 등을 소재로 삼았다. 2018년에 제작한 <몬로비아, 인디애나>는 아직 개봉 전이다.
김재환
<칠곡 가시나들>, <미스 프레지던트>, <쿼바디스>, <MB의 추억>, <트루맛쇼>
한국 다큐멘터리계의 뜨거운 감자라면 김재환 감독이 1순위다. MBC PD였던 그는 2011년 <트루맛쇼>를 제작하며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전직한다. 이후 그가 내놓은 작품들은 대통령(<MB의 추억>, <미스 프레지던트>), 교회(<쿼바디스>) 등 한국 사회의 민감한 소재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느껴진다. 그나마 순한 내용을 담은 신작 <칠곡 가시나들>은 개봉 당시 CGV를 포함한 멀티플렉스의 횡포에 반대하는 상영 보이콧으로 화제를 모은 바 있다.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코드는 해학. 카메라에 담긴 극단적인 신념의 결과물을 바라볼 때 터지는 씁쓸한 웃음은 그의 작품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보다 마음 편히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 이후 어떤 작품을 꺼내들지 기대된다.
황윤
<잡식가족의 딜레마>, <어느날 그 길에서>, <침묵의 숲>, <작별>
황윤 감독은 정말 드물게 ‘동물’에 시선을 돌린 감독이다. TV 다큐멘터리에서 보는 자연 그대로의 동물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노출된 동물들이 그의 카메라에 포착된다. 2001년 공개한 <작별> 이후 <침묵의 숲>, <어느날 그 길에서>, <잡식가족의 딜레마>, <광장의 닭> 등 딱 다큐멘터리 5편만 내놨는데도 그가 보여준 존재감은 남달랐다. 그는 폭로 다큐멘터리, 극적 구성 다큐멘터리의 자극을 배척하듯 세심하게 피사체의 모든 걸 담는 데 전력했다. 긴 공백기를 갖고 돌아온 <잡식가족의 딜레마>도 가축이란 이미지로 표상되는 돼지 곁으로 다가가 기존의 주제를 다르게 변주했다.
이창재
<노무현입니다>, <목숨>, <길 위에서>, <사이에서>
<사이에서>. 이창재 감독의 장편 다큐멘터리 제목이다. 이 제목은 이창재 감독이 카메라에 담는 인물들의 특징을 암시한다. 숙명적으로 신내림을 받는 무당(<사이에서>), 법도에 발을 딛은 비구니들(<길 위에서>), 불치병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와 가족들(<목숨>) 모두 정체된 생활이 아닌 위태로운 경계선에 선 인물들이다. 단편 다큐멘터리 <에필로그>는 지인 이성규 감독의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 이창재 감독이 관찰자이며 그 죽음에 통감하는 경계선에 선다. 그가 마지막으로 선보인 작품은 2017년 <노무현입니다>. 엘리트도, 잘나가는 의원도 아니었던 노무현의 경선 과정에 주목해 화제가 됐다.
짧게 보는 장인들의 페어
작품이 많지 않아, 혹은 다른 영화 분야와 병행 중인 다큐멘터리 감독들과 그들이 남긴 대표작 다큐멘터리 두 편을 소개한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침묵의 시선>, <액트 오브 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 정권의 대학살을 조명한다. <액트 오브 킬링>에서는 그 정권의 지도자를 찾아가 대학살을 재연할 것을 권한다. 그것이 재현되는 동안 그 끔찍했을 광경을 목도한 사람들에겐 점차 변화가 일어난다. <침묵의 시선>은 그 학살의 피해자들이 본 가해자들을 담는다. 학살이란 단어의 무게가 가벼워질 만큼 그들은 담담하다. 조슈아 오펜하이머는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로 세계 영화인이 주목하는 다큐멘터리계의 새로운 기수가 됐다.
홍형숙
<경계도시 2>, <경계도시>
2010년 극장가엔 <경계도시 2>라는 영화가 걸렸다. 관객들은 어리둥절했다. <경계도시>란 작품이 있었던가? <경계도시>는 2002년 제작됐으나 국내에 개봉한 적 없다. 두 작품은 갑작스럽게 간첩으로 내몰려 입국금지 당한 재독철학자 송두율 교수를 다룬다. 2003년, 송두율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경계도시>는 그 이전을, <경계도시 2>는 입국 이후 벌어진 일들로 구성됐다. 홍형숙 감독은 모두가 송두율 교수를 잊기 시작할 때도 그를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어쨌든 가장 이득본 건 한국 영화계였다. <경계도시 2>라는 걸작을 얻어냈으니까.
정윤석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 <논픽션 다이어리>
정윤석 감독은 하나의 시선을 분명하게 형상화하려 한다. 1994년 지존파 살인사건,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이 세 사건을 사회 구조의 문제점으로 치환한 <논픽션 다이어리>도 그렇고, 밴드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가 국가보안법 재판을 받게 된 경위를 다룬 <밤섬해적단 서울불바다>도 그렇다. 사건의 경과를 통해 이 사건이 사회 어떤 부분의 산물로 생겼는지 구체화하려 한다. 그의 논조가 당장 완벽한 것은 아니나, 사실상 다큐멘터리란 장르가 도태되고 있는 한국 영화계에서 이같은 시선을 가진 '작가'의 등장은 그자체로도 장르를 환기시켰다.
김일란
<공동정범>, <두 개의 문>
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은 대중들에게 ‘용산 참사’란 이름으로 더 익숙하다. 그게 의미하듯, 이 사건은 단순한 화재가 아닌 철거민과 경찰의 대치에서 발생한 인재에 가깝다. 김일란 감독은 홍지유 감독과 함께 용산 화재 사건을 다각도로 접근해간다. 여러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재생산되던 사건이 <두 개의 문>을 통해 안타까운 사건과 그 모든 피해자들로 전환된다. 김일란 감독은 이후 이혁상 감독과 용산참사 철거민들이 다시 모인 자리에서 이 사건을 다시 조명한다. 2018년 개봉한 <공동정범>은 하나의 사건이 어떤 식으로 개인의 삶을 뒤흔드는지를 조망한다.
임흥순
<위로공단>, <비념>
임흥순 감독은 본래 실험 영화로 활동했다. 그래서 그의 다큐멘터리는 시간을 뛰어넘은 연계를 만들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첫 장편 다큐멘터리 <비념>은 1948년 4.3 사건과 2013년 해군기지 설립 논쟁의 제주도를 잇는다. 차기작 <위로공단>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40여 년전의 여성 노동자, 지금의 한국과 캄보디아 여성 노동자를 조명하며 이를 미술적 이미지로 봉합하려 한다. 그의 실험은 그해 베니스 비엔날레 은사자상으로 이어졌다. 이후 그는 <려행>, <환생> 같은 다큐멘터리와 <북한산>, <형제봉 가는 길> 같은 실험 영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씨네플레이 성찬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