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이 연출한 ‘BBC’ 6부작 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을 촬영한 김우형 촬영감독이 29일(현지시간) 열린 영국 아카데미(이하 BAFTA) TV 크래프트 어워즈 시상식에서 픽션 부문 촬영·조명상을 수상했다. 이미 BAFTA의 트로피를 받은 바 있는 제임스 프렌드 촬영 감독, 화제의 드라마 <킬링 이브>를 촬영한 줄리안 코트 촬영 감독 등 쟁쟁한 후보를 제쳤다는 점, 무엇보다 한국 촬영감독으로선 최초의 수상이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김우형 촬영 감독

<리틀 드러머 걸>은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등을 써낸 첩보 소설의 대가, 존 르 카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았다. 그의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 중 가장 화려한 색채와 과감한 촬영을 만나볼 수 있는 작품. 화면의 나열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던 <리틀 드러머 걸>의 스타일리시한 영상에 국내외 평단 모두가 호평을 보냈음은 물론이다. 감독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면서 저만의 개성을 불어넣는 것도 놓치지 않는 김우형 촬영 감독, 그가 빚어낸 명장면을 만날 수 있는 영화들을 정리해봤다.


거짓말

감독 장선우 출연 이상현, 김태연, 전혜진 개봉 2000.01.08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은 국내에서 두 번이나 등급 보류 판정을 받았지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선 화제작으로 손꼽히며 호평을 받았던 2000년의 문제작이다.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로 영화판에 발을 들인 김우형 촬영 감독은 <거짓말>을 통해 처음으로 메인 카메라를 잡았다. <거짓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됐다. 인물의 불안하고 공허한 심리를 극대화한 촬영이 돋보인다. 장선우 감독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우형 촬영 감독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의 핵심에 가장 빠르게 접근한다. 관음적이고 음란하게 보일 수 있는 장면이지만, 그가 잡은 화면에선 공허함과 슬픔이 묻어났다”며 그의 촬영에 대한 만족과 신뢰를 밝혔다.


그때 그사람들

감독 임상수 출연 한석규, 백윤식 개봉 2005.02.03

<그때 그사람들>은 이순신 동상에서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초반부의 마스터 숏만으로도 관객을 압도시킨다. 그래도 이 영화의 명장면을 단 하나만 꼽으라면 영화 중반 등장하는 궁정동 연회장 부감 숏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한바탕 총격전이 끝난 궁정동 연회장. 참혹한 현장을 찬찬히 훑는 주 과장(한석규)과 그를 중심으로 곳곳에 흩어져있는 시체들을 그 어떤 권력의 위치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듯 촬영된 이 장면은 하나의 역사로 남은 공간, 그 순간 부유하는 공기를 관객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며 미학적으로도 완벽하단 평을 받은 장면. 1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고의 부감 숏으로 손꼽히고 있다.


만추

감독 김태용 출연 현빈, 탕웨이 개봉 2011.02.17

시애틀의 거리를 홀로 걷는 애나(탕웨이)를 비춘 장면에서도, 한껏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관광객을 담아낸 장면에서도. 김우형 촬영감독의 렌즈는 어느 상황에서든 묵직한 쓸쓸함을 머금고 있다. 도로를 보여주다 천천히 돌아 애나의 얼굴을 담아낸 장면, 자욱한 안개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던 애나를 한참 비추다 예상치 못한 순간 성큼성큼 훈(현빈)이 들어서던 장면 등을 떠올려보자. <만추>의 렌즈는 결정적인 순간을 묵묵히 기다리며 인물들의 미세한 감정까지 모두 담아낼 줄 안다. 감정을 억누르며 한참을 머뭇거리는 인물들의 마음을 그대로 투영해낸 촬영 방식. 벼랑 끝에 몰린 애나와 훈의 시한부 사랑이 관객의 마음에 오랜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다.


고지전

감독 장훈 출연 신하균, 고수, 이제훈 개봉 2011.07.20

2011년은 김우형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은 작품들의 촬영에 호평이 이어졌던 해다. <고지전>은 6·25 전쟁 후반부, 끝까지 전쟁을 멈출 수 없었던 최전방 애록 고지 전투를 스크린에 옮겼다. ‘한국 전쟁 영화의 진화’란 평을 받은 <고지전>의 하이라이트라면 단연 마지막 전투 신. 측면에서 전쟁터를 비추던 카메라는 곧 고지 한가운데로 침투해 병사들과 함께 가파른 경사를 오른다. 아군과 적군의 시체가 수두룩하게 쌓여있는 고지. 그 한가운데에 놓여있는 듯한 착각을 안길 정도로 전쟁터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담아낸 촬영. 드론 촬영이 불가능했던 시기라, 고지의 경사 끝과 끝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이은 줄에 카메라를 걸어 배우들과 함께 이동하며 촬영하는 와이어 캠 기법을 사용했다.


암살

감독 최동훈 출연 전지현, 이정재, 하정우 개봉 2015.07.22

김우형 촬영 감독이 <암살>의 촬영에서 가장 중점을 둔 건 시대의 빛이다. 그는 “시대의 아픔을 관객이 느낄 수 있도록 빛의 논리를 따라가는 촬영과 조명을 택했다. 인물과 대사, 공간을 감싸고 있는 빛들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시대의 묵직한 공기를 담아내면서 캐릭터의 펄떡이는 감정까지 포착해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암살>은 <리틀 드러머 걸>에서 선보인 김우형 촬영 감독의 장기를 미리 확인할 수 있는 작품. 나라를 빼앗긴 비극이 잠식한 경성, 폭풍전야처럼 미동 없던 카메라가 몸을 풀기 시작하는 건 인물들이 본격적으로 제 활약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잿빛 풍경 안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활약은 그들의 개성만큼이나 다채로운 방식으로 촬영됐다. 총기 소리에 맞춰 이들의 얼굴을 가까이 잡는 클로즈업 신은 독립투사들의 비장한 순간을 기억하려 누르는 카메라 셔터 같다.


1987

감독 장준환 출연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개봉 2017.12.27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으로 시작해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까지 담은 <1987>의 카메라는 영화의 내적인 부분과 외적인 부분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시대의 공기를 밀도 있게 포착한다. 후반부 성당 신,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을 쫓는 박 처장(김윤석)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듯 촬영한 장면은 그를 심판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박종철(여진구)의 영정사진으로부터 화면이 줌아웃되면서 기자들이 카메라를 향해 뛰어오는 장면을 통해선 뜨거운 울분이 실린 시대의 역동성을 살렸다. <1987>은 시나리오를 입체적으로 살려낸 촬영의 힘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1987>의 카메라가 관객을 압도하는 부분은 역사를 그대로 재현해낸 연세대 앞 굴다리에서 촬영된 장면, 그리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뭉쳐 “독재 타도”를 외쳤던 시청광장 신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진실을 밝히려 고군분투하던 인물들을 담아낸 카메라는 그 시절을 함께 통과한 누군가의 시선이 된다. <1987>의 카메라가 단번에 관객을 1987년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을 수 있었던 이유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