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을 걸으며 변요한은 추억을 줄줄 쏟아낸다. 저 가게는 걷다가 갈증이 나면 물 한 컵 얻어 마셨던 곳, 저 벤치는 사색을 즐겼던 곳, 저 공간은 <육룡이 나르샤> 당시 칼 싸움 연습을 했던 곳...출발지점으로 다시 돌아 온 우리는 그의 피규어 수집에 큰 영향을 끼친 커피숍으로 들어가, 그가 즐겨 앉았던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독립영화에서 출발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당신 또래 배우들이 참 많아요.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해요.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하나의 경향이지 않을까 하는. 과거 연극무대에서 자양분을 섭취해 온 충무로의 기초 토양이 당신 세대부터 독립영화로도 많이 옮겨 갔어요. 기존 선배들과 성향도 확연하게 다름을 보여주고 있고요. 어떤 변화가 감지된달까.
-변화에 대한 생각은 사실…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문화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말이죠.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창작하는 사람이라면 어떤 경향을 무조건 따르기보다, 제시할 필요도 있다고 보거든요. 노력이 필요한 거죠. 저희에게 어떤 특권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아직 도전할 기회가 많다는 것일 텐데, 그렇기에 더 유연하게 쓰고 싶어요. 책임감을 겸손 떨지 말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책임감을 겸손 떨지 말고 가져야 한다…훅 들어오는 말이네요. 또래 배우들과 이런 이야기, 종종 나누나요?
=옛날에는 했었는데 지금은 아끼는 편이에요.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기자님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이유는…지금 이 대화들이 기사로 나가잖아요? 선배님들이 보실 수도 있고, 젊은 배우들이 볼 수도 있죠. 선배님들은 “얘, 이런 생각 하고 있구나. 나도 이전에 저랬었는데” 생각하실 수 있어요. 실력이 있는데 아직 필드에 나오지 못한 친구들은 “그래 저 형도 하는데, 우리도 가능하지. 곧 우리 시대가 올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고요.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큰 사랑을 받으며 방영된 400억 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출연 후 그의 발길은 단편 영화 <별리섬>으로 향했다. <미생> 후에도 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독립영화를 선택했었다. 그러니까, 변요한의 독립영화에 대한 애정은 말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행동으로 옮긴다. “초심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말이 다소 상투적으로 쓰이는 요즘이지만, 변요한 앞에서만큼은 그 상투성이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아까 낭만 이야기를 잠시 했는데 당신에게 낭만은 뭔지요.
=돌발적인 것들. 가령 친구가 갑자기 와서 “나와!” “어디 가려고. 나가려면 씻어야 하는데.” “그냥 나와.” 그래서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나가서 시원한 아메리카노 먹으며 아이쇼핑하다가 맘에 드는 아이템이 있으면 남자끼리이긴 하지만 커플로 사서 나누는 게 저에겐 낭만입니다. 오늘 이렇게 기자님과 공원을 산책한 것도 저에겐 낭만이에요. 4년 동안 친한 지인들 혹은 홀로 걸었던 공간을 이렇게 낯선 사람과 1대 1로 산책한 것도 참 낭만적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순간이에요. 이런 게 또 기억에 남거든요.
-낭만적인 말, 감사합니다. (웃음) 듣다 보니 낭만은 당신 가까이에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런 것 같아요. 불평불만도 많고 감사한 것도 많아요. 그런데 불평불만은 최근 몇 년 사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래서 조금 불안하긴 합니다. ‘반감이 조금 있어야 하는데, 너무 유해지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불안함은 저의 원동력이었거든요.
-변요한은 뭔가를 하나 시작하면 끝장 보는 사람 같다는 인상이 있어요.
=아… 지금의 저는 딱 기자님이 보시는 모습인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끝장 보는! 지금은 그러고 싶고요. 끝을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 시기를 후회하고 싶지 않은 거죠. 물론 이렇게 하면서 행복해하는 지점들을 찾는 게 저에겐 숙제죠.
-당신이 배우가 된 건 운명이었다고 생각합니까, 의지였다고 생각합니까.
=운명이고, 조금 오버하면 숙명 같다는 생각도 합니다. 우연히 시작했고, 연기에 뜻을 품는 게 쉽지 않은 환경이었고, 포기하도록 이끄는 어려운 순간도 많았는데, 돌고 돌아 연기로 왔어요. 제가 다가간 것도 있지만 연기가 다가온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왜 당신에게 숙명과도 같은 일이 왔을까 생각해 본 적 있나요.
=해봤죠. 그런데 이건 말씀드리기가 조금 창피해서… 이 정도는 이야기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얼마 전 소속사 대표님과 밥을 먹었어요. 그때 대표님이 ‘선한 영향력, 좋은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연기로 누군가를 위로해야지, 더 그래야지”라고요. 대답은 안 했지만 제 마음과 같았습니다. 배우는 연기를 하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는 음악을 하고, 기자님은 글을 쓰는데, 이 모든 게 힘이 있다고 믿거든요.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해요.
-처음 연기를 시작했을 때와 비교해서 삶의 목표가 달라졌습니까.
=달라지지는 않았어요. 말하지 않고 있을 뿐.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부분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연기는 짝사랑 같나요, 아니면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 같나요.
=이전에는 짝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지금은 같이 사랑한다고 느껴요. 어느 순간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요.
-사랑하는 대상인만큼 연기에 상처를 받기도 할 텐데요.
=그렇죠. 가장 즐겁게 하는 것도, 가장 슬프게 하는 것도 연기죠.
-애증의 관계?
=아니, 애증은 아니고. 사랑입니다. (웃음)
-아프게 하지만 사랑이다!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더 빠지는 거죠. 저는, 아직도 너무 뜨거워요. 아직 세상을 다 알지 못하지만,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느낀 것들을 담아내고 싶은 열정이 부글부글 끓어요. 일희일비하지 않고 가고 싶어요. 조금 아프다고 해서 엄살 부리고 싶지 않고, 기쁘다고 해서 들뜨고 싶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