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 실사화의 진정한 매력은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 쪽이다. 그린 애로우를 필두로 무려 8시즌에 이르는 TV 시리즈 <애로우>를 위시한 드라마 세계관은 지금까지 수많은 시리즈를 망라하며 좋은 성과를 내온 바 있다.
해외 영상 콘텐츠에 있어서는 아무래도 영화 쪽이 드라마보다 접근성이 높기 때문인지, DC 실사화 TV 시리즈들은 퀄리티도 있고 DCEU 영화보다 호평을 받고 있는 것에 비해 일반 대중에게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마블이 넷플릭스와의 협업을 통해 내놓은 <디펜더스>와 솔로 시리즈가 영화에 비해 큰 인기를 얻지 않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 상황.
해외 드라마 모두가 마찬가지겠지만, 국내 정식 방영되는 미드나 영드는 일부에 불과했기에 보는 사람만 보는 취미 정도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최근 들어 넷플릭스 등 OTT 플랫폼이 대중화되면서 미드 붐을 불러일으킨 <프리즌 브레이크>나 <브레이킹 배드>, <워킹 데드>와 <왕좌의 게임> 등이 많은 대중에게 다시금 선보이고 있어 이런 접근성 문제가 해결되고 있기는 하다.
DC 드라마의 주축은 앞서 이야기했듯 <애로우>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흔히 애로우버스라고 부른다)인데, 여러 드라마들이 이 세계관을 공통으로 공유하면서 다양한 크로스오버를 활발하게 진행해 장르 팬들의 흥미를 자극했다. 영화와는 다른 세계관이지만, 그래서 다행일지도 모를 DC TV 시리즈의 몇 작품을 소개해 본다.
※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접근하기 쉬운 작품 위주로 선정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스몰빌
2001년부터 무려 11년간 방영된 이 드라마는 ‘슈퍼맨 비긴즈’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방영된 적도 있다. 클라크 켄트가 어떻게 성장했고 가족들과의 관계는 어떤지, 그리고 어떻게 슈퍼맨으로 거듭나는지를 10시즌에 걸쳐 담아낸 드라마다. 시리즈가 오래 지속된 만큼 이야기가 늘어진다는 지적은 꽤 있었지만, 압축된 엑기스인 영화와 달리 클라크의 인간적인 면모와 성장을 담아내 결국 슈퍼맨으로 인정받는 결말로 유종의 미를 거뒀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힘들어했던 데다가 고소공포증도 있고, 처음에는 날지도 못하고(마지막 시즌에서야…) 슈퍼맨이라기엔 여러모로 좀 아쉬운 모습이 많았다. 하지만 슈퍼맨의 다양한 주변인물들을 폭넓게 그려냈고, 관련 빌런들도 다수 등장했다. 멀티버스 개념을 도입해 울트라맨(슈퍼맨의 빌런 버전)도 등장했다는 점이 재미있는 부분. 슈퍼맨을 연기한 다수의 배우(예를 들면 크리스토퍼 리브 등)가 특별출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애로우버스에 속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워낙 유명한 DC 드라마이기도 하고 아래로 소개할 드라마들에서 오마주된 이력도 있어 스몰빌을 먼저 언급해 본다.
애로우
DC코믹스의 유서 깊은 캐릭터 중 하나인 '그린 애로우' 중 1대 올리버 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다. 실사화 버전에서는 초창기 버전 대신 이후 설정이 변경된 버전을 반영했는데, 퀸 인더스트리의 수장인 아버지를 둔 재벌2세인 올리버 퀸이 유람선 사고로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그린 애로우로 거듭나 히어로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다.
난봉꾼 재벌 2세였던 올리버 퀸이 도시를 비탄에 잠기게 한 주범들인 재벌들을 처단하기 위한 목표를 갖고 자경단으로 활약하는 내용으로 진행되는데, 올리버 퀸이 왜 난파당했고 섬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전 시즌에 걸쳐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올해 5월에 시즌 7까지 방영되었고, 8시즌이 확정된 상황이다. 억만장자에 난봉꾼이었던(여자친구 동생과 바람을 필 정도로) 재벌 2세라는 점은 아이언맨과 비슷해 보이지만, 찬찬히 보면 초능력도 없는 자경단이며 유명인이라는 점, 막강한 재력을 활용한 전용 기지 등의 요소들은 배트맨과 더 닮아 있다고 할 수 있다.
플래시
역대 플래시 중 가장 잘 알려진 2대 플래시 배리 앨런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플래시> 역시 높은 인기를 얻은 시리즈 중 하나다. 첫 시작은 <애로우>의 스핀오프였지만, 훨씬 높은 인기를 끌면서 여러 방면에서 호평을 받아 화려한 수상이력을 자랑하기도.
부모를 잃은 배리 앨런이 어머니의 죽음에 감춰진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우연히 연구소에서 사고에 휘말려 번개에 맞으면서 엄청난 스피드를 낼 수 있는 능력을 얻고 플래시가 된다는 설정이다. 과학 수사대 감식반이 본업이기 때문에 지능도 꽤 뛰어난 편이고, 사건을 조사하고 추리하는 데도 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은 원작과 같다.
DC의 경우 TV 시리즈와 영화의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배우도 다른데, 액션이나 연출 면에서 비교를 상당히 많이 당하기도 한다. 주요 능력인 스피드 포스(날아오는 총탄을 잡아낸다든가 빠르게 달린다든가) 연출 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드라마 쪽이 압승이다. 원작의 주요 이벤트 중 하나인 ‘플래시포인트’ 역시 다루어진 적이 있고, 인기에 힘입어 시즌 6도 확정됐다.
슈퍼걸
슈퍼맨의 사촌인 슈퍼걸은 앞서 언급한 <스몰빌>에서도 등장한 바 있는 캐릭터. 원래는 슈퍼맨 칼-엘이 너무 어리기에 그의 보호자로 함께 탑승했지만 행성 폭발 때문에 우주선이 원래의 궤도를 벗어나게 된다. 슈퍼맨이 탑승한 우주선은 지구에 불시착해 켄트 가족에게 입양되었지만, 슈퍼걸의 우주선은 팬텀 존(보통은 감옥으로 사용하는 그것)에 들어가게 되는 바람에 24년 동안이나 시간이 멈춘 상태로 갇혀 있게 된다.
24년간 지구에서 성장해 성인이 된 슈퍼맨과 달리, 슈퍼걸은 시간만 흘렀지 나이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역으로 슈퍼맨의 도움을 받아 지구에 정착하게 된다. 슈퍼맨과 같은 크립톤인이기에 능력은 전반적으로 유사하다. 하지만 크립톤 행성에서 유년기를 대부분 보냈기 때문인지 슈퍼맨과 달리 초반부터 능력을 거의 모두 쓸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
지구 도착 이후 12년간 평범한 인간으로 생활하며 취업도 했지만 모종의 계기로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했고, 슈퍼걸로 활약하며 겪게 되는 다양한 사건들이 드라마의 주된 내용이다. 시즌 1 이후 방송사가 CW로 바뀌면서 세계관에 합류했기에 애로우, 플래시와 본격적으로 연계하는 것은 2시즌부터다.
고담
이름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배트맨> 시리즈에 등장하는 바로 그 고담시를 다루는 드라마다. 주인공은 배트맨이 아니라, <배트맨> 시리즈에 단골 출석하는 제임스 고든이다. 20세기의 세기말이 배경인지라 살짝 과거 시점이며 고담시라는 배경과 포스에 걸맞는 고든의 수난사가 주된 내용이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경찰청장인 제임스 고든의 신출내기 형사 시절 이야기이므로 배트맨이 아직 어린 상태라는 점이 특징이다. 재미있는 건 배트맨을 괴롭히는 주요 빌런들인 포이즌 아이비, 캣우먼 등도 같은 어린 상태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외에도 배트맨 시리즈에서 등장했던 다양한 요소들이 드라마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점이 매력포인트.
가장 독특한 점은 일반적인 슈퍼히어로 스토리라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고담 시의 꿈도 희망도 없는 현실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인데, 다른 곳도 아닌 '범죄의 온상'의 대명사 고담시를 그리고 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배트맨이 장성하기 전까지 고담시는 영 어쩔 수 없는 모양인데... 물론 장성해도 고담시는 고담시일 뿐이지만.
레전드 오브 투모로우
본격 사이드킥 메인 등극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애로우>와 <플래시>에서 조역 역할에 만족해야 했던 각 히어로들의 사이드킥들이 시간여행을 통해 활약하는 내용을 그린다. 주된 테마가 시간여행이기 때문에 이미 처리된(…) 빌런들도 다수 등장한다는 점이 매력포인트.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시간여행을 하는 게 주요한 내용인지라,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비극이 벌어지기도 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화이트 카나리와 히트 웨이브, 아톰, 기디언, 쟈리 토마즈, 콘스탄틴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 시간여행이라는 독특한 설정 덕에 <애로우>의 주인공 올리버 퀸의 나이든 모습이나, 50대가 된 플래시 배리 앨런이 남겨둔 메세지가 등장하기도 하며 여타 드라마들과의 연계점도 볼만하다.
사이드킥이나 조역급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DC 하면 생각나는 유명한 캐릭터들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강렬한 매력은 없지만 DC TV 시리즈들을 재미있게 본 팬들이라면 반가운 얼굴들을 만나볼 수 있고, 좀 더 디테일한 이야기가 풀리기 때문에 호기심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듯.
DC 타이탄
국내에서 올초 넷플릭스에 공개되어 인기를 끈 시리즈인 <DC 타이탄>이다. 배트맨의 대표적인 사이드킥 캐릭터이자 가장 인기있는 배트맨 사이드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로빈’ 딕 그레이슨을 필두로 한 타이탄이라는 새로운 팀업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세계관 상으로는 애로우버스에 편입되지 않는 작품으로, DC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DC 히어로 스트리밍 플랫폼인 DC 유니버스의 첫 독점 시리즈다. 배트맨 사이드킥이 주인공이고, 배트맨과의 관계가 계속해서 다뤄지다 보니 결국 고담시에 방문하기도 하는데 역시 여기서도 범죄의 온상이다. 실제로 배트맨이 등장하기도 했지만... 뒷모습 뿐이었다. 배우 문제가 있었을 듯..
비주얼 면에서는 극심한 혹평을 면치 못했으며 딕 그레이슨의 캐릭터성이 붕괴되었다는 팬덤의 분노도 받아내야 했으나, 실제로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에는 평이 어느 정도 뒤집혀 나름 좋은 성과를 냈다. 시즌 2가 확정되기도 헀는데(물론 시즌1을 본 사람이라면 시즌2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을 것) 비주얼을 좀 바꿔주면 안되냐는 애달픈 의견도..
애로우버스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이외에도 DC 히어로를 다룬 드라마는 매우 많다. 최근 공개된 바로는 DC의 전설(아니고 레전드)같은 작품인 <왓치맨>도 드라마로 제작되어 올해 선보일 예정이며, 식물과 결합한 독특한 히어로인 <스웜프 씽>이 제임스 완 감독의 손에서 호러물로 태어나 현재 방영 중이다.
<타이탄>의 성공에 힘입어, 사이보그가 등장하는 <둠 패트롤>과 <스웜프 씽>, 곧 출격할 <스타걸>까지 볼거리는 차고 넘친다. 마블 쪽의 TV 시리즈는 넷플릭스와의 결별 및 디즈니 스트리밍 플랫폼에서의 제작 확정 외에 상세한 소식이 없는 것에 비하면 DC TV 시리즈는 볼 것도 많고 수작도 많은 황금어장인 셈이다.
웃픈 이야기지만, 최근의 DCEU에 별 관심이 없거나 실망한 관객이라 하더라도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 편한 마음으로 볼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라면 장점이다. 다소 긴 호흡일 수 있는 드라마이기에 넉넉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영화와는 다른 재미가 있기에!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번 주말에는 DC 드라마 한 시즌을 감상해 보시는 건 어떨지.
희재 / PNN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