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선물세트. 한국 애니메이션 <레드슈즈>(7월 25일 개봉)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 종합선물세트에는 아빠, 엄마, 아들, 딸 각자 하나씩은 마음에 드는 과자가 들어 있는 법이다.
<레드슈즈>의 전략은 뒤집기다.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공주>와 이를 바탕으로 한 디즈니 최초의 장편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1937)의 이야기를 변주한다. 미모에 집착하는 왕비(지나 거손), 사라진 아빠, 아빠를 찾는 화이트 왕국의 공주(클로이 모레츠)가 등장한다. 우연히 마법 구두를 신은 공주는 완벽한 외모의 레드슈즈가 된다. 마녀의 저주에 빠져 난쟁이가 된 일곱 왕자는 아름다운 레드슈즈가 자신들의 저주를 풀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220억 원의 제작비를 들인 <레드슈즈>는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한다. <백설공주>뿐만 아니라 <잭과 콩나무>, <피노키오>, <아서 왕의 전설>, <헬젤과 그레텔> 등 전 세계 관객에게 익숙한 동화 속 캐릭터를 끌어들였다. 또 (한국어 더빙 버전이 있지만) 영어 대사를 기본으로 제작됐다. 스노우 화이트 역에 익숙한 할리우드 배우, 콜로이 모레츠를 캐스팅했다. 남자 주인공 멀린 역에는 <헝거게임>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영국 배우 샘 클라플린이 출연한다.
종합선물세트이자 글로벌 시장을 노리는 <레드슈즈>의 비밀병기는 김상진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그는 1995년 디즈니 스튜디오에 입사했다. <라푼젤>, <빅 히어로>, <겨울왕국>, <모아나> 등의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다. 디즈니의 수석 애니메이터의 자리에 오른 그는 20년 미국 생활을 접고 <레드슈즈>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을 지휘한 사람이 있다. 홍성호 감독이다. 그는 <레드슈즈>를 제작한 싸이더스와 모회사 로커스의 대표이기도 하다. 7월 11일 홍성호, 김상진 두 감독을 만났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레드슈즈>는 오래 전부터 준비한 프로젝트라고 알고 있다. 2010년 대한민국 스토리 공모대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언제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홍성호 감독/ 2007년에 처음 시놉시스를 썼다. 2009년에 회사를 설립한 뒤 (<변호인>의) 양우석 감독과 작가들이 시나리오를 다듬고 발전시켜서 2010년에 상을 받게 됐다. 투자가 힘든 장편애니메이션이라 다른 일로 돈을 벌면서 5년 동안 시나리오 개발에 매진했다. 김상진 감독님과는 2008년에 처음 만났다. 2016년에 한국에 오셨다.
=김상진 감독/ 2015년인가에 50억을 투자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제작에 들어갔던 것 같다. 메인 프로덕션 과정이 3년 반 걸렸다. 후반 작업도 거의 1년 동안 진행했다.
-정말 오래된 프로젝트다. 작품을 완성했으니 후련한 마음도 있겠다.
=홍성호 감독/ 후련한 마음보다는 걱정이 앞선다. 해외에도 팔아야하고 국내 마케팅도 해야 하고. 투자자들의 투자금을 돌려드려야 다음 작품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니까.
-홍성호 감독은 로커스의 대표로 광고, VFX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홍성호 감독/ <원더풀 데이즈>(2003)의 CG 감독을 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다 찾아보는 열성 팬은 아니었다. CG아티스트로 일하던 1995년에 <토이 스토리>를 지금은 없어진 씨네하우스 극장에서 보고 이런 걸 만들어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24년이 지났다. 픽사는 그 사이에 21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김상진 감독님이 <레드슈즈>에 참여하게 된 이야기도 듣고 싶다.
=김상진 감독/ 처음에 제안 받고 홍 감독을 말렸다. 첫 애니메이션 장편을 제작하는데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캐릭터들도 떼거지로 나오니까. 캐릭터 하나하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데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하다. 결국엔 참여하게 됐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디즈니에 오래 있다 보니까 정체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왕 랄프>, <겨울왕국> 속편 작업이 예정돼 있었는데 디자이너로서 속편은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으니까 재미가 없고 솔직히 좀 하기 싫었다. 또 한 가지 계기는 영어가 아직도 안 된다는 점이다.
-디즈니에 20년이나 계셨는데….
=김상진 감독/ (기자에게) 지금 가서 20년 살아봐라. (웃음)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어릴 때 가지 않은 이상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국에서 모국어로 찰진 욕도 좀 해가면서 작업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홍성호 감독/ 한국어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작업하는 게 행복하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짠하더라.
-정말 많이 받은 질문이겠지만 궁금해서 물어본다. 한국과 미국의 제작환경은 어떻게 다른가.
=홍성호 감독/ (김상진 감독에게) 제가 나가 있을까요? (웃음)
=김상진 감독/ (홍성호 감독에게) 나가 계시죠. (웃음) 일단 규모 면에서 확연하게 다르다. 드림웍스는 대학 캠퍼스 같다. 거긴 공짜 점심을 주기 때문에 드림웍스 다니는 친구를 만나러 가본 적이 있다. 디즈니는 사서 먹어야 한다. (웃음) 스튜디오 규모만큼 인력 규모도 다르다. 디즈니는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일할 때 2000명 정도 있었던 같다. 로커스는 제일 많을 때 140명 정도였다. 예산의 규모도 엄청나게 다르다. 문화적 차이도 무시 못한다. 점심 먹고 사무실로 들어가는데 당시 마이클 아이즈너 디즈니 컴퍼니 회장이 문을 잡아주면서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여기는 좀 다르구나라고 느꼈다.
-제작환경의 차이를 물어본 이유가 있다.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레드슈즈>를 보면서 영상의 퀄리티 면에서 미국 애니메이션과 크게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특히 멀린 캐릭터가 입술을 내밀고 키스를 바라는 장면에서 입술의 주름과 움직임이 실제 사람처럼 느껴졌다.
=김상진 감독/ 잘 만든 거 같네. (웃음)
=홍성호 감독/ 기술 차이는 소프트웨어나 하드웨어의 발전으로 줄어들고 있긴 하지만 역시 존재한다. 삼성이 반도체로 많이 팔고 투자하는데 이제 시작하는 회사가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디즈니에서 <라푼젤>을 만들 때 긴 머리카락을 구현하기 위해 ‘난리’쳤는데 우리는 그렇게 못한다. <레드슈즈> 속 캐릭터는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한번도 넣지 않는다. 그게 다 돈이다.
=김상진 감독/ (기자에게) 하루에 머리를 몇 번 쓰다듬나? 평범한 이런 동작이 캐릭터를 살아 있게 만드는 디테일이다. 제작비 때문에 제약이 생긴다. 디즈니는 다르다. 디즈니에서 <라푼젤>을 만들 때 석·박사 스포트웨어 엔지니어를 고용해서 1년 동안 리서치하고 개발했다.
=홍성호 감독/ 돈이 있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오랜 기간 투자해서 나온 결과물이니까.
=김상진 감독/ 기술력의 차이는 현저하게 존재하지만 <레드슈즈>를 이만한 제작비와 인력으로 만드는 건 정말 마법 같은 일이다.
=홍성호 감독/ 미국에선 ‘이걸 200억 원에 만들었다고?’라고 생각할 거다. 200억 원은 픽사가 단편 하나를 만드는 제작비 수준이다.
-기술 차이를 극복하는 건 이야기나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레드슈즈>에서 우드베어라는 캐릭터가 특히 귀여웠다.
=김상진 감독/ (기자에게 ) 그런 의문은 들지 않았나. 마녀의 저주에 걸렸는데 왜 이렇게 귀엽게 만들었는지.
-캐릭터 상품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웃음)
=홍성호 감독/ 나름의 철학이 있다. 마녀 왕비가 사과를 줘서 캐릭터를 나무로 만드는 저주를 건다. 각 캐릭터에 따라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은 순수하니까 귀여운 우드베어 삼형제가 될 수 있었다.
-애니메이션은 입모양과 대사가 일치해야 한다고 알고 있다. 클로이 모레츠가 주인공인 영어 버전과 한국어 버전이 있는데 어떻게 제작했나.
=홍성호 감독/ 영어에 입을 맞췄다. 한국어는 음성의 길이정도 맞췄다. 나중에 한국어로 된 애니메인션을 만들고 싶다. 아무래도 영어 대사가 해외 시장에 잘 팔리기 때문에….
-레드슈즈 캐릭터는 클로이 모레츠를 모티브로 만든 걸로 알고 있다. 클로이 모레츠의 캐스팅과 녹음 현장의 이야기도 듣고 싶다.
=홍성호 감독/ 클로이 모레츠가 ‘듣보잡’ 한국 회사의 시나리오만 보고 출연을 하겠다고 했다. 복이 하늘에서 떨어진 거였다.
-한국에서 녹음작업을 진행했나.
=홍성호 감독/ 한국에 들어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웃음) 뉴욕, LA, 피지까지 쫓아다니며 녹음을 진행했다. 녹음 끝나고 메이킹 영상을 위해 인터뷰를 했는데 모레츠가 우리보다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가 더 깊었다. 반성했다. 일곱 난쟁이 캐릭터 이름도 다 알고 있었다. 또 인상 깊은 게 난쟁이(Dwarf)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작은 친구들(Little People)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데도 존경스럽더라.
-글로벌 프로젝트여서 여러 가지 고충도 많았을 것 같다.
=홍성호 감독/ 황수진 프로듀서가 <레드슈즈> 프로젝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었다. 미국 스튜디오는 프로듀서가 프로젝트를 장악하는 반면 국내에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잘 모르는 편이다. 그런 점이 아쉽다.
=김상진 감독/ 이런 프로듀서의 경험 자체가 한국 애니메이션에 큰 자신이 된다.
=홍성호 감독/ 국내에서 만들고 수출하는 작품 가운데 유명한 애니메이션은 외국 스태프가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기획부터 후반작업까지 직접 했다. 그래서 <레드슈즈> 엔딩 크레딧 이름을 한글로 올렸다.
-한국의 기술력, 자본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마법 캐릭터 멀린이 쓰는 부적이 생각난다. 번개라고 쓰여 있었다.
=홍성호 감독/ 한국 사람이 만들었다는 확실한 표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의상도 한복 스타일에 모티브가 있다. 멀린은 <아서 왕의 전설>에서 조력자였던 걸 뒤집어서 주인공으로 만들게 된 캐릭터다.
-동화의 설정을 뒤집는 부분에서 일곱 난쟁이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저주에 걸리지 않았을 때처럼 잘생겨지는 게 인상적이었다.
=홍성호 감독/ 나는 거울을 보면서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한다. (웃음)
-남자들이 대체로… (웃음)
=홍성호 감독/ 그런데 누군가 찍어준 사진이나 녹음된 목소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볼 때만 난쟁이로 변한다는 컨셉은 거기에서 시작됐다. 마법구두는 원래 그 사람이 가진 장점을 빼았기도 한다. 레드슈즈가 점점 구두를 벗기 힘들게 되는데, 일종의 욕망의 마법구두라서 그렇다. 영화 후반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구두를 벗는다. <레드슈즈>에 많은 의미를 담으며 만들었다. 한 번 보고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아직 애니메이션은 아이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있다. 어린 관객이 많이 봐주길 바라는지 궁금하다.
=홍성호 감독/ <레드슈즈>의 타깃이 애매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들이 보기에는 조금 어려운 것 같고, 어른이 보기에는 약간 유치한 부분도 있다고. <토이 스토리>를 보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가 29살인가 그랬다. 그때 그림은 아이들한테 팔더라도 스토리는 어른들한테 팔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상진 감독/ <레드슈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일종의 종합선물세트 같다. 가족들이 선물세트를 열었을 때 아빠가 좋아하는 과자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과자가 다 있아서 같이 즐길 수 있다.
김상진 애니메이션 감독이 직접 <레드슈즈> 캐릭터를 기자에게 그려줬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디즈니의 영화 <라이언 킹> 이야기가 나왔다. 인터뷰가 진행되던 시간에 <라이언 킹> 언론배급 시사가 열렸기 때문이다. 홍성호 감독은 “<라이언 킹> 때문에 <레드슈즈>의 스크린이 안 열릴까봐” 걱정했다. 김상진 감독은 기자와 함께 인터뷰에 참여한 씨네플레이 대학 실습생 기자들에게 사인과 함께 <레드슈즈> 캐릭터를 그려줬다. 홍성호 감독은 “디즈니 스튜디오에 가면 갤러리처럼 캐릭터 그림이 전시돼 있는데 김상진 감독님 그림이 70퍼센트 정도 된다”고 말했다. 기자가 “김상진 감독님 그림을 팔아도 되겠다”고 하자 홍성호 감독은 자신의 사인을 김상진 감독 그림에 추가했다. 그는 “이래야 팔 수 없지”라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레드슈즈>를 만든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유쾌한 성격의 홍성호 감독은 오랜 시간 시나리오에 공을 들였고, 다른 분야 사업을 하면서 <레드슈즈>를 포기하지 않았다. 20년을 일한 직장 디즈니에 퇴사한, 누가 봐도 그림 잘 그리게 생긴 아티스트인 김상진 감독에게도 <레드슈즈>는 도전이었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나오기까지 두 사람이 견뎌낸 시간의 무게가 <레드슈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 박준모 정은수 대학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