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과 이재용 감독이 <죽여주는 여자>로 다시 만났다. <여배우들>(2009),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2012)에 이은 세 번째 조우다. 일종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인 두 영화와 달리, <죽여주는 여자>는 완전한 픽션이다. 다만 <죽여주는 여자>에서 극화된 이야기는 앞선 두 작품보다 현실적인 공기가 더욱 물씬하다. 성매매, 빈곤, 고독사 등 '노인' 문제에 더해 트랜스젠더, 장애인 등 우리 주변에 살아가는 '소수자'들까지 두루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주 '주목! 이 영화'는 노인과 소수자의 삶을 비추며 서늘함과 따뜻함을 오가는 <죽여주는 여자>를 소개한다.
주인공 소영(윤여정)은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라고 불리는 여자다. 누가 봐도 젊은(So Young) 복장으로 멋을 부린 채 집 밖을 나서는 그녀는, 탑골공원 근처를 배회하며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나간다. 상대했던 노인에게서 얻은 성병 때문에 병원을 찾은 소영은 의사를 찾아와 “민호는 당신 아이야”라고 울부짖는 필리핀 여자와 병원 앞에서 쭈뼛대는 그녀의 아들을 목격한다. 그리고 병원에서 벌어진 난리통에 혼자 도망친 민호를 자기 집에 데려와 보호한다. 탑골공원의 단속이 심해져 활동 반경을 넓히는 그녀는 과거 알고 지내던 재우(전무송)를 만나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을 경험하게 된다.
<죽여주는 여자>의 제목은 소영(윤여정)이 ‘서비스’를 죽여주게 잘한다는 뜻과 삶이 고단한 노인들을 죽여준다는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영화는 구태여 종로3가 근처 컴컴하고 축축한 모텔로 들어가 매춘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따라가지만, 노인 성매매의 생태계를 밀착해 들여다보진 않는다. '박카스 할머니'로서의 소영의 일상은 영화 초중반에 놓여 소영의 생계 상황이 얼마나 궁핍한지, 노년이 되어서도 몸을 팔아야 하는 그녀의 지난 삶이 어땠는지 어렴풋하게 유추해보는 차원에서 기능한다.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관객들은 소영의 과거를 하나씩 알아간다. 기구한 사연들의 조각은 소영이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될 따름이지만, 그 과정이 퍼트리는 파토스의 힘은 강력하다. 영화 오프닝 속 휑한 바닥에 홀로 외롭고 꿋꿋하게 피어 있는 작은 꽃처럼, 기구한 사연을 지고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소영의 삶은 관객의 뜨거운 눈물을 끌어낸다.
결국 제목의 무게는 자신을 부디 죽여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을 기꺼이 죽여준다는 설정에 크게 쏠린다. 범죄의 뉘앙스라곤 없는 소영의 살인은 차라리 의식에 가까워 보인다. 때문에 일말의 장르적인 터치를 거치지 않는다. 죽이는 방법을 고민한다거나 남의 눈을 피해 살인을 실행하는 긴박한 과정 같은 건 없다. 부탁을 들으면, 머잖아 그걸 실행에 옮길 뿐이다. 살인이 이루어지는 간소한 과정은, 건조함으로 연출의 톤을 맞춘 이재용 감독의 결단이라기보다, 노인의 죽음이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인다. “100세 시대가 축복인지 재앙인지 의문입니다.” 이재용 감독의 연출의 변이다.
매춘과 살인을 감당해야 하는 소영의 삶은 무겁기 짝이 없지만, 다행히 그녀의 곁에는 각자 다른 모습과 처지의 친구들이 있다. 집 주인인 트랜스젠더 쇼걸 티나(안아주)와 다리가 불편한 옆방 청년 도훈(윤계상) 그리고 얼떨결에 식솔이 된 코피노 민호까지, 우리 곁에서 생활하는 한국사회의 ‘소수자’들을 대표하는 군상들이 한 울타리 안에서 정을 붙이며 살아나간다. 이 친구들과 벗하고 사는 소소한 일상은 노년의 어두운 현실에 포커스를 맞춘 영화 전반의 탁한 공기에 숨통을 트이게 한다. <죽여주는 여자>는 소수자로서 각자 경험하는 갈등과 고통을 완벽하게 생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영의 만만치 않은 일과를 매번 목격하지만, 집에 돌아와 그들과 대면하며 보내는 일상만큼은 평화롭기만 하다. 둘러앉아 피자와 치킨을 나눠먹으며 기분을 내는 네 사람의 예쁜 모습이 뿜어내는 힘은 <죽여주는 여자>의 또다른 매력 포인트다.
에둘러 말할 수 없다. <죽여주는 여자>는 온전히 윤여정의 영화다. “모르고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세상이 있는데 (감독이) 그런 세상까지 알게 해준” 이 작품에서 윤여정은 이 땅의 후미진 곳에서 살아가는 노년 여성이 담을 수 있는 온갖 층위를 한꺼번에 보여준다. 남자들에게 다가가 '연애'를 제안할 수 있는 성적인 매력, 고된 삶을 살아가는 딱한 처지를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인품을 동시에 드러내는 윤여정의 얼굴과 제스처는 또다른 소영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든다. 특히, 자신을 알아보고 (영화에서 처음으로) 소영의 본명을 부르는 옛 동료를 어설프게 마주하다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어가는 뒷모습은, 윤여정이 얼마나 위대한 배우인지 깨닫게 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