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이 슌지 감독 (사진 제공: 더쿱)

이와이 슌지 감독의 신작 <립반윙클의 신부>가 지난 9월 28일 국내 개봉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러브레터>, <하나와 앨리스> 등 감각적인 영상미와 음악, 시대와 장르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호연을 통해 소년소녀의 성장통, 옛사랑의 추억 등 신기루처럼 사라저버릴 것들을 붙잡고 위로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를 둘러싼 신드롬은 지금의 천만 흥행 부럽지 않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직 국내 소개되지 않은 전작 <뱀파이어>를 제외하면 <하나와 앨리스> 이후 그의 영화를 정식으로 만나볼 수 있는 게 무려 12년 만의 일이다. 비교적 오랜 시간을 거쳐 돌아온 '이와이 월드'에 새롭게 입성한 영화 <립반윙클의 신부>에서 우린 또 어떤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배우 임수정과의 무비 토크 때 나눴던 대화 일부 인용.)

<립반윙클의 신부>
젊은 여인의 수난사
주인공 나나미가 SNS 플래닛의 로고 모양 가면을 쓰고 있다. 일종의 '익명의 가면'인 셈.

익명의 사람들이 닉네임만 보고 관계를 이어나가는 온라인 소통의 장인 SNS 플래닛. 그 곳에서 활동하던 여인 '나나미'는 불안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테츠야'라는 남자와 친분을 쌓는데, 둘의 관계는 실제 만남으로까지 이어진다.

영화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하는데, "인터넷 쇼핑하듯 원클릭으로" 서로를 알게 된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조금 이상하게 흘러간다. 매사 소심한 성격 탓에 손해만 보고 살던 나나미는 억울한 사건을 당하는데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익명의 또 다른 남자 '아무로'의 도움으로 새로운 사람들과 인연을 이어간다. 물론 엄청난 사건의 연속과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이건 거의 여인의 수난사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극한의 위기와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게 된다.

결혼이라는 현실에 놓인 여자, 냉혹한 현실 앞에 내던져진 일본의 젊은이들, 익명 뒤에 가려진 진짜와 가짜의 구분, 혹은 그로 인한 믿음에 관한 이야기 등 다양한 소재가 한데 엉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립반윙클의 신부>를 이와이 슌지 감독은 어떤 이유로 만들게 됐을까.

2011년 전까지 오랫동안 해외에서 머물고 있었던 나는, 동일본 대지진을 겪고 난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게 됐다. 그리고는 흔들리고 상처받은 일본을 무대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립반윙클의 신부>다.

모든 것을 SNS로

<립반윙클의 신부>는 SNS만 있으면 모든 걸 할 수 있는 요즘 세상의 이야기다. 주인공 나나미는 현실에선 소극적인데다 목소리도 작고 낯도 많이 가리는 여인이지만 SNS에서는 솔직한 심경을 익명의 사람들과 거침없이 나누기도 한다. 큰 위기를 이겨낸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과 더불어, 현 세태의 반영이 이 영화 전반을 둘러싼 분위기라 할 수 있다.

<릴리슈슈의 모든 것> 때는 가상현실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때는 컴퓨터나 핸드폰 안에서만 일어나는 이미지의 세계였다. 지금은 핸드폰으로 주문만 하면 택시도 오고, 물건도 받을 수 있고, 사람까지 부를 수 있는, 현실과 이어지게 되는 SNS의 시대가 왔다. 그런 세상을 그려보고 싶었다. (배우 임수정과의 토크 중)
SNS로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지길 반복하는 나나미

이 영화는 나나미라는 여인에게 느닷없이 찾아오는 다양한 삶의 위기가 대부분 SNS를 통해 이어져온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현실을 비꼬거나 냉소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나나미가 혼자서 어떻게 버텨나가는지를 지켜보자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물론,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감각적인 영상미와 함께 말이다.


소설과 영화를 동시에
작업

<립반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던 기획 가운데 몇 가지 아이디어가 합쳐진 경우다. 또한 동명의 소설과 시나리오 작업을 별도로 진행했다. 덕분에 국내 관객들은 원작 소설과 영화를 동시에 접하게 된다. 시나리오와 소설을 함께 작업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독특한 작업 방식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의 최고 인기작인 <러브레터> 역시 1994년 이와이 슌지 감독이 직접 월간 '카도가와'에 연재했던 소설을 나중에 갈무리해 시나리오로 작업한 경우다.

대개 영화를 구상할 때 소설을 쓰면서 시작하게 된다. 물론 영화를 다 찍고 소설을 완성시키는 경우도 있다. 동시에 책상을 옮겨가며 쓰진 않지만 둘을 같이 키워내는 느낌은 있다. 예전에는 그림 콘티까지 그릴 때도 있었다.
<러브레터>의 그림 콘티 작업
동시 작업의 장점? 소설과 영화는 매체 특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작업을 하다 보면 하나만 몰두했더라면 놓쳤을 것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어렵지 않느냐고?
지금처럼 새로운 각본을 쓰고 있는데 이전 영화를 가지고 인터뷰해야 할 때가 더 힘들다. (웃음)
이와이 슌지 감독이 그린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단편 만화
에디터의 질문에 고뇌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했던 이와이 슌지 감독은 TV 드라마와 뮤직비디오 등으로 먼저 이름을 알린 감독 출신으로 직접 영화음악 삽입곡도 만드는 등 다재다능한 감독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항상 감각적인 영상미와 그에 딱 맞는 음악 등을 두루 즐길 수 있는 특징이 있다. 그가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는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만화, 음악, 소설 등 당대 유행하는 대중 문화 요소가 영화 곳곳에 차용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모르는 것들을 찾아보는 재미를 주기도 한다. <하나와 앨리스>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도라에몽과 관련한 지명, 작가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 등을 기억하는 관객이라면, <립반윙클의 신부>에서도 재미있는 대중문화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이번 영화에서는 '립반윙클', '클램본', '아무로', '람바랄' 등 가상의 아이디 닉네임에 직접적으로 만화와 음악 요소를 인용한다.

기본적으로 말을 할 때 소리의 울림이 좋아서 이름을 차용한다.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에 나오는 '클램본', 건담의 캐릭터인 '아무로'와 '람바랄' 등, 어감이 좋은 말을 인용하고, 추후 영화에 그 의미까지 담기도 했다. 이 단어들이 작품에서 일종의 주어 역할을 한다. 아마 영화의 이름이나 지명에 핑크플로이드나 킹크림슨 같은 단어가 등장했다면 영화의 톤이 달라졌을 것 같다. 영화 속 모든 것들은 영화의 톤과 함께 결정된다.

여배우
쿠로키 하루의 발견

쿠로키 하루가 연기하는 '미나미'라는 인물은 정말 매사에 짜증날 정도로 소심하고 답답한 인물이다. 미래가 불투명한 기간제 교사인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 아이들에게 놀림 받다가 결국 해직당하기까지 하는 인물. 하지만 그녀를 통해 SNS를 통한 인간관계의 진심과 진실이 낱낱이 해부되기도 한다.

일본 드라마의 팬이라면 쿠로키 하루의 첫 단독 주연 드라마였던 <중쇄를 찍자!>를 통해 익히 그녀의 출중한 연기력과 더불어 에너지 넘치는 배우 특유의 매력을 접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이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그녀가 보여줬던 씩씩하고 활달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연기 유형을 발견할 수 있을 터.

쿠로키 하루와의 첫 만남은 그녀의 연극무대에서다. 그 뒤에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2년 동안 함께 진행하면서 오랫동안 옆에서 활동을 지켜봤다. 그녀를 주연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진 것은 마치, 오래 활동했던 밴드의 멤버와 연주를 하는 느낌 같은 것이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은 언제나 당대 최고의 신인 배우를 발굴해내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그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을 통해서 일본의 청춘 스타 아오이 유우를 영화계에 데뷔시켰고, 또 <4월 이야기> 때는 당시 최고의 신인으로 손꼽혔던 마츠 다카코의 마지막 십대 시절을 스크린 위에 아름답게 수놓아 주목을 받기도 했다. 대부분 그는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길 좋아했다.

쿠로키 하루 역시 난생 처음 엄청난 사건을 겪게 되는 '나나미'를 통해서 '이와이 월드'에 당당하게 입성한 것과 더불어 배우로서 새로운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쿠로키 하루는 머리가 좋은 연기자다. 그녀는 연기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나쁜 분위기는 절대 만들지 않는 사람이다.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짜증나거나 피곤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다른 배우들을 찍는 장면에서 카메라에 잡히지도 않는데 혼자 감정 연기를 보이며 눈물까지 흘리는 그런 배우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장르 실험

<립반윙클의 신부>는 이와이 슌지 감독이 TV드라마, 다큐멘터리,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실험해보고 또 경험해본 결과의 축적을 통해 다시금 자신의 본토인 장편 영화로 돌아와 완성시킨 영화같기도 하다. '이와이 월드'라 부르는 그만의 영화세계가 담고 있는 요소들이 고루 섞여 있는 영화기 때문. 이제 과거의 영광을 등에 업고 새로운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그에게 이번 영화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매 작품마다 어떤 의도를 갖고 활동하는 건 아니다. 결국 내가 가장 중시하는 건 인간과 인간의 인연이다.

매 작품, 내가 원해서라기보다는 누군가 내게 제안하고 건네준 힌트를 토대로 만든 것이 지금의 내 작품이다.

드라마를 만들 때도 이건 내 작품이야! 라는 의지를 갖고 만든 것은 아니다.

나는 지금도 세계 각지에 친구들이 있다.
그들과 함께라면 언제 어디서든 어떤 것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립반윙클의 신부'가 뭐야?

인터뷰를 시작할 때 설명했어야 할 가장 기초적인 질문. "제목이 무슨 뜻인가요?" SNS를 통해 인연을 맺고 결혼까지 성공했던 나나미는 결국 SNS 때문에 버림받고 좌절한다. 그런데 나나미는 또 다시 SNS로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새로운 인연을 찾아나선다. 그때 마침 그녀 앞에 나타난 인물이 바로 미지의 '립반윙클'. 결혼에 실패한 여인이, 게다가 매사에 소극적이어서 직업전선에서조차 내쳐져 밥벌이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 무기력한 여자가 또 다시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수 있을까. 영화는 그 흥미진진한 과정 속에 바로 제목의 뜻을 숨겨 놓았다.
나나미는 과연 온갖 시련을 이겨내고 누군가의 신부로 남게 될까. 이와이
슌지 감독의 독특한 영화색이 만들어낸 <립반윙클의 신부>의 이야기에 지금 바로 접속해 그 진실을 확인해보시라. 새로운 '이와이 월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가로등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