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의 중심에 서다

올해 논쟁적이고 시끄러운 영화를 꼽으라면 <조커>는 반드시 들어갈 것이다. 미국에서는 극장 입장 시 총기 검사를 할 정도로 모방범죄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고, 동시에 반대편에선 영화는 영화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중이다. <조커>를 둘러싼 상반된 평가는 이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는 물론 사회적 파급력, 나아가 영화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한 질문에 다다른다. 이에 박지훈, 김병규 두 평론가가 보내온 <조커>에 대한 각기 다른 평가를 여러분께 전한다. 이건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에 대한 이야기다. 두 가지 평행선을 달리는 잣대 중 무엇을 선택하고 얼마나 참고할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다.


"찬"

분열증 앓는 시대의 맨얼굴

<조커>의 폭력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와 우리 시대의 문제

좋은 영화란 윤리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윤리적인 영화가 모두 훌륭한 영화인 것은 아니지만, 비윤리적인 훌륭한 영화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이것이 도덕적 영화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영화의 윤리란 단단하게 굳어진 현재의 도덕에 대해 질문하고, 이를 통해 아직 오지 않은 도덕을 정초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오랫동안 영화가 수행해온 일이었고, 영화가 가지는 진보성이었다. 예컨대 프리츠 랑은 <M>(1931)에서 아동연쇄살인범에게도 법의 보호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리고 아서 펜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에서 살인자인 보니와 클라이드의 훼손되는 신체를 통해 사회의 야만성을 드러냈다. <조커>가 좋은 영화일 수 있다면 오직 윤리의 기반 위에서만 그렇다.

<조커>는 폭력을 미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조커>는 폭력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사실적으로 그려진 폭력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기괴하거나 혹은 피로할 뿐이다. 폭력을 행하는 아서(호아킨 피닉스)를 미화하지도 않는다. 아서는 <싸이코>(1960)의 노먼 베이츠처럼 기괴하고 미성숙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조커>는 폭력을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영화는 아서의 행동이 정당했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머레이(로버트 드니로)를 통해 아서를 비판한다. 그렇다면, <조커>가 아서의 폭력에 정당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면죄부가 될 수 있는 어떤 변명거리를 주는가? 다시 말해 만약 관객이 아서의 상황이라면 살인이 불가피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는가? 대부분의 관객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아서에 대한 공감이나 연민을 느낀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범죄자의 마음에 공감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공감이 관객에게 폭력을 체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이 정당한 의심이 문제된다.

아서와 관객의 거리

<조커>는 아서와 관객이 거리를 두게 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쓴다. 일부의 관객이 느끼는 ‘예술영화’ 같다는 느낌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첫 번째는 서사의 측면에서다. 영화의 마지막에 “당신이 이해하지 못할 농담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아서의 대사는 영화의 모든 사건이 아서의 망상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즉, 아서의 불우한 어린 시절도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든 사건이 아서의 망상이 아니라 할지라도 아서는 자신의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따라서 관객은 아서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모든 사건들을 온전히 믿을 수 없게 된다. 믿을 수 없는 서술자는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다.

두 번째는 이 영화가 뮤지컬을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서는 화장실에서 화면 밖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인 정신병원에서 아서는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노래를 따라 부른다. 이때 음악은 더이상 영화를 설명하지 않으며, 영화의 내부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렇게 음악이 자신을 드러낼 때 영화도 스크린의 바깥으로 나온다. 영화가 스크린 바깥으로 나옴과 동시에, 영화에 이입했던 관객은 스크린 바깥에 있는 자신의 위치로 되돌아온다. 뮤지컬은 언제나 리얼리즘과 불화를 일으켰고, 그래서 뮤지컬은 고다르와 같은 감독들에게 거리두기를 위한 주요한 장치로 쓰였다. <조커>가 관객과 거리를 만드는 세 번째 방법은 바로 태생이다. 관객은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커>는 코믹스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영화는 조커의 탄생에 대한 하나의 설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거리두기의 방법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아서에게 연민하거나 공감하게 되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어떤 관객은 이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아서가 폭력을 쓰기 때문만은 아니다. 다시 말해 폭력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트맨의 폭력처럼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이 있지만, 아서의 폭력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 백인 남자(존 윅)가 3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때 관객은 그걸 즐기고 응원까지 한다. 왜 <조커>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는지 모르겠다”는 토드 필립스의 말에 관객은 존 윅의 살인은 아서의 살인과 다르다고 답할 것이다. 존 윅의 살인은 정당방위이거나 혹은 복수니까. 즉 관객은 복수하는 자들 혹은 복수를 대행하는 자들의 폭력에 대해서는 큰 거부감을 가지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조커>의 윤리가 있다. 아서의 정당화되지 못하는 폭력을 접할 때, 동시에 정당화될 수 있는 폭력과 폭력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히어로의 정당성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다시 말해 아서에게 연민을 느낄수록 배트맨의 정당성에 의문을 가지게 된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제는 <조커>가 아니라 <배트맨>에 어울리는 명제다. 그리고 DC와 마블을 가리지 않고, 많은 히어로영화의 영웅들은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결해야만 하는 사건들의 존재가 그들의 고민을 가로막고, 그들은 사건을 해결하고, 또다시 공동체의 환호를 받는다. 공동체의 환호는 그들이 모든 일을 끝냈음을 알리는 신호다. 이 즉각적인 신호 앞에 더이상 고뇌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대중의 욕망에 따라서 움직이듯, 그 안에 있는 히어로들도 대중의 욕망에 따라서 행동한다. 이들은 사회와 멀리 떨어진 고독한 개인처럼 보이지만, 대중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욕망의 본질은 폭력을 향한 욕망이며, 악당의 존재는 욕망을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조커>의 아서는 대중의 욕망을 알지 못한다. 그가 던지는 농담이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다. 아서는 코미디의 문법을 모르며 대중의 언어를 알지 못한다. 아서의 웃음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처럼 아서의 말 또한 관객에게 와닿지 않는다. 아서의 말과 행동은 관객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는 문법의 바깥에 존재하는 자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다. 이해를 바라지 않지만 그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서의 신체가 중요하다. 아서의 신체는 낯선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낯선 신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낯선 신체가 춤을 출 때 관객은 정당화를 거부하는 신체를 목도한다. 다시 말해 그저 하나의 신체만이 존재할 뿐, 여기에는 선도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조커는 춤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하며 의지와 표상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는다. 현실의 육체는 그의 환상과 뒤섞이고 마침내 그의 육체는 추상화처럼 그의 의지대로 그려진다. 그의 육체가 환상과 뒤섞일 때, 그는 현실을 환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조커는 예술가다. 그는 춤을 추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지어내기도 한다. 조커의 농담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세계의 운동에까지 다다른다. 세계에서 소외되었던 한 인간이 자신의 농담으로 세계와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조커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자이며, 이 점에서 창작자이자 예술가다. 그리고 그의 예술은 결국 세계와 연결되고자 하는 시도다. 그리고 조커의 이야기는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람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예컨대 조커는 시위대의 아이콘이지만, 그는 그저 시위대의 어릿광대이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시위대 가장 앞에 있는 <모던 타임즈>(1936)의 떠돌이이기도 하다. 조커는 타인과 세계를 만들어냈지만, 그 이야기 속 조커는 또다시 타인과 세계에 의해 구성된 사람일 뿐이다. 다만 조커는 스스로 볼거리가 되기를 선택한다. 마침내 자유로운 어릿광대가 된 것이다. <조커>의 모든 사건이 정신병원에서 상담 중 지어낸 조커의 농담일 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미 한 바 있다. 그런데 정신병원에 있는 조커는 현실의 조커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코미디 장르가 되어버린 영화의 마지막은 이것조차 또 다른 농담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조커가 이야기를 지어낼 때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된다.

<조커>는 단순히 <모던 타임즈>에서 한 장면만을 차용한 것은 아니다. 거리에는 분노로 살인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으며, 노동자는 과도한 업무에 시달려 정신병을 얻고, 실업자가 된 노동자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모던 타임즈>가 보여주는 시대와 <조커>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 모습만이 달라졌을 뿐이다. <조커>는 아서가 거리에서 일을 하다가 폭행당한 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권총을 소지하게 된 것에서 사건이 시작된다. <모던 타임즈>처럼 그의 노동과 실업은 그를 병들게 하는 하나의 요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던 타임즈>에서 노동자가 정신병에 이를 정도로 단순 반복 업무를 하게 되는 이유는 전면에 드러나는 기계 때문이다. 난폭한 식사기계로 대표되는, 인간을 짓누르는 기계가 문제된다. 그러나 <조커>에서 문제는 난폭함이 아니라 차가운 합리성이다. 말하자면 열리지 않는 자동문이 문제된다. 기계는 이미 배경이 되어버렸고, 배경 속 인간들은 분노의 대상을 잃어버리고 배경과 어울리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을 탓한다. 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속 분노는 자라나지만 분노가 향할 정당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조커>에서 병든 소시민 아서와 도취된 악당 조커가 구분된다면, 혹은 현실과 망상이, 진실과 거짓이 뚜렷이 구분된다면 이 영화가 이토록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조커라는 역병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 그것은 세계의 병증에서 기인한 것이다. 병든 조커와 세계의 병은 순환하는 회로를 구성하고 있다. 세계는 아서를 병들게 했고, 조커는 다시 세계를 병들게 한다. 세계는 이미 병들어 있고 사람들은 아주 작은 자극으로도 폭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 영화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화약고 같은 이 사회를 보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가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그저 보여줄 뿐이다.

타인의 이야기

<조커>를 옹호하는 이유를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는 이 영화가 폭력을 반추하게 한다는 점이다. 특히 히어로영화로 대표되는, 선으로 포장된 일상적인 폭력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이를 통해 범죄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정당성을 의심하게 한다. 다시 말해 불가침의 인권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술의 역량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언어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자신의 언어를 찾는 과정과 세계를 재구성하는 경로를 보여주는 것이다. <조커>에는 아서의 현실이 조커의 이야기가 되고, 조커의 이야기가 다시 아서를 구성하는 순환 과정이 있다. 나는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는 다시 나를 구성한다. 이 과정을 통해 타자와 내가 연결되고, 소외된 자들이 세계와 연결된다. 이것이 거짓의 역량이며 영화의 힘이다. 영화는 우리의 현실을 타인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우리의 현실처럼 보여준다. 만약 자신의 현실을 세계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현실의 중압감에서 조금은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는 이 영화가 이 시대의 징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조커의 광기가 아니라 터지는 웃음을 참아야만 하거나 억지로 웃어야만 하는 이 시대의 광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심각하지만, 억지로 웃는 얼굴을 짓고 있는 아서와 다르지 않다. <조커>는 모든 이들이 분열증을 앓고 있는 시대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영화다.

박지훈 영화평론가


"반"

불화하지 않는 웃음

<조커>의 폭력, 엉성한 난장

두 가지 이유로 <조커>를 보고 싶었다. 하나는 이 영화가 광대를 전면에 내세우기 때문이다. 트럼프 시대의 악몽을 말하기 위해 누군가는 70년대 신문사의 도덕극을 경유하고(<더 포스트>), 누군가는 변모하는 영화의 풍경을 들여다볼 때(<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데드 돈 다이>) <조커>는 어떤 은유나 우회도 없이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유산을 탐욕스럽게 핥아먹으며 어릿광대의 얼굴에 칠해진 끈적거리는 얼룩을 직접 마주보도록 요구한다. 이런 시도에 폭력에 관한 비판적 검토나 세심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건 (그 언술의 상투성을 제쳐두고서라도) 타당하지만 유효하지 않은 반응이다. 지독한 반영웅의 초상을 그리는 시도는 작가가 의도하는 비판적 관점과 무관하게 금지된 것의 프로파간다에 가까워지고, 대상을 향한 건조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인 매혹을 동반하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조커>가 보여주는 극단적인 폭력이 시대착오적이라거나 영화가 그러한 표현에 무책임하다는 비판은 초점을 빗나간 것이다. 할리우드는 매번 동시대적인 혼란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시대와 불화하는 비도덕적인 표현과 이미지의 파열음으로 파산에 직면한 영화의 시기로부터 출구를 모색하곤 했다(물론 그것이 공동체의 영역 안에서 수용되던 마지막 분기점은 70년대의 뉴시네마였다). <조커>는 영화 속에서 몇번이나 대사로 강조하는 것처럼 “미쳐버린 세상”의 한복판에 서서 의도적으로 그 시대착오적 방법론을 적극 표방한다. 혼란한 심리상태에서 발생하는 행동들, 돌발적인 충동과 병리적 망상의 공포는 미국이라는 정신분열의 세계를 일그러뜨려왔다. 나는 토드 필립스가 보다 대담하게 매혹과 분노의 패러독스를 다루며 아메리카의 도상 위로 꺼림칙한 얼룩을 덧칠하길 기대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그 광대를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호아킨 피닉스의 무표정과 광대의 웃음이 한 얼굴에서 결합하는 방식에 대해서다. 배우의 전체 필모그래피와는 무관하게 내가 기억하는 호아킨 피닉스는 무표정에 사로잡힌 단독자다. 토드 필립스가 피닉스의 조커를 구상하기 위해 참조했음이 분명한 <마스터>(감독 폴 토머스 앤더슨)의 프레디와 <너는 여기에 없었다>(감독 림 랜지)의 조는 웃지 않거나 웃음을 짓는 방법에 미숙한 인물들이다(직관적으로 말하면 피닉스의 조커는 조의 환경과 프레디의 휘어진 육체를 결합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동시대 미국인의 고독한 초상과 괴이한 표정을 포착해온 대표적인 작가들(폴 토머스 앤더슨, 제임스 그레이, M. 나이트 샤말란)이 그의 얼굴을 차용해온 것도 이 배우의 특별한 무표정과 연관되어 있다고 느낀다.

호아킨 피닉스는 웃지 않는다. 하지만 조커는 웃는다. 아서가 클럽의 코미디 쇼를 감상하며 유머를 공부하는 장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긋난’ 타이밍에 웃는 그의 모습은 이러한 미세한 불일치를 가청화한다. 그(호아킨 피닉스/조커)의 웃음은 외부의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기보다 세계의 균일한 볼륨에 노이즈를 일으키는 확성기의 소음이다.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스타의 무표정과 조커라는 분장에 새겨진 웃음이 맺는 불화, 그리고 아서라는 인물의 웃음과 세계의 (비)웃음 사이의 간극은 최종적으로 어떤 파국에 도달할 것인가. 말하자면 <조커>는 아메리칸 뉴시네마의 부스러기를 긁어모으면서, 그 자리에 동시대 할리우드가 견지한 남다른 무표정을 투사하는 두 가지 층위에서의 불화의 기획이다. 영화에 관한 주요한 질문은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 자행하는 폭력 자체의 정치성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선택된 그 과잉이 발산해내는 불화에 향해야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가 실패하는 지점은 그 불화의 기획이 실패하는 자리에 있다.

여기 정당한 카오스는 없다

이 가소로운 영화가 선택하는 건 어둠에의 매혹, 또는 어둠의 수사학이라 부를 만한 시각적 형식이다. 아서는 고용주에게 부당한 비난을 듣고 나와 쓰레기통을 걷어차다 그 옆으로 쓰러지듯 눕는다. 그의 형상은 실루엣으로 보이며 주변에 놓인 쓰레기 더미와 같은 어둠에 물들어 있다. 도시의 쓰레기, 혹은 그로 인해 창궐한 바이러스가 곧 조커다. 일차적인 문제는 어둠 자체의 매혹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선택이 아니라 그 시각적 수사의 진부함에 있다. 어둠의 육체성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지하철에서의 총격 장면을 떠올려보자. 만취한 금융회사 직원 셋과 일자리에서 해고당해 절망한 아서는 그 공간 속에서 함께 웃는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한 대목처럼(“우리는 하나인가요?”) 어둠 속으로 진입한 지하철 내부에서 그들은 하나의 그림자와 같은 형상으로 폭력에 투신한다. 아서가 살육을 저지르고, 본격적으로 망상을 확대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어둠의 윤곽에 몸을 담그고 난 뒤다.

이는 정당한 카오스라기보다는 엉성한 난장이다. 아서는 충동적으로 사람 셋을 죽이고도 태연하게 춤을 추는 미치광이인가, 유년기의 학대와 사회의 방치가 빚어낸 도시의 이물질인가. 가장 쉬운 해석은 후자가 전자를 만들어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는 그 둘을 헷갈리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정교한 인과관계를 설정해두지 않는다. 이를 감추는 영화의 질료가 그들의 환경으로 주어진 어둠이다. 바이러스는 이제 병균을 퍼트리고 전염병을 옮길 것이다. 어둠은 이 과정에서 세계와 인물이 불화하는 방식에 관한 분석적 판단과 이질적 차이를 무시하고, 이를 모호함과 시각적 매혹이라는 하나의 사태로 위장시킨다.

어둠의 팽창이 전제된 자리에서, 빛은 무엇도 명확하게 드러낼 수 없다. 그러나 <조커>가 구현하는 빛과 어둠의 동등성은 믿기 힘들 정도로 안이하게 짜여 있다. 석양빛을 등진 채 춤을 추며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의 걸음 위로 경쾌한 음악과 장엄한 음악을 번갈아 들려주는 것만으로 희비극적 아이러니가 발생하리라 믿는 절망적인 상상력은 차라리 농담처럼 보인다. 어머니를 살해하는 아들의 얼굴에 나른한 백색의 빛을 비추고 희미한 미소를 짓게 하는 한심한 연출을 영화적 초상화의 사례로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장면들에서 어둠과 빛의 시각적 도식은 영화의 표면에 강렬한 노이즈를 일으키는 대신, 그럴듯한 상징적 체계로 환원되고 만다.

<조커>는 두명의 아버지에게 추방당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아서는 토머스 웨인이라는 상상적 아버지와 머레이 프랭클린이라는 사회적/상징적 아버지로부터 모두 퇴장을 명령받는다. 그런데 아들은 한번도 아버지의 공간에 나란히 발을 디딘 적이 없다. 아서는 자신이 입회한 적 없는 공간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추방의 기억은 없는데, 추방당한 결과는 반복되고 있다. 문제는 영화가 이 불균형과 그것이 촉발하는 한쪽의 죽음이라는 관계의 역학을 탐구하는 대신 그 불균형의 결과로 발생한 아서의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침잠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머레이 쇼>에 출연해 자살을 계획하던 아서는 정작 생방송 현장에서 충동적으로 머레이를 살해한다. 특별히 충격적인 사태는 아니다. 제 머리로 향하던 총구를 상대방에게 겨누는 것만큼 그에게 자연스러운 열망은 없다(미리 생각해둔 ‘리허설’대로 진행되지 않는 생방송의 흐름이 그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대신 이 순간은 삶의 마지막을 미디어의 비극으로 상연하려는 미학적 실행력마저 부재한 아서의 철저한 무능력을 환기한다. 토드 필립스는 이 실패를 파괴의 카타르시스로 전환하는 클라이맥스를 선택한다. 이 선택은 동의하기 어렵다. 영화는 최종적인 순간까지 아서를 지배한 그의 무능력을 철저히 주시하는 대신 즉각적인 충격과 반응으로 꾸려진 폭발적인 대단원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돌린다. 그의 마지막 실패가 무엇이었는지 관측해야 할 순간에, 영화는 조커의 탄생을 미적으로 수용하는 수축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이 영화가 악의 근원과 탄생을 충실히 보여주었다고도, 그에 대한 시적 통찰을 제공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비소의 대상이 되는 건 아서의 무능력이 아니라 그의 외부를 맴도는 대중 집단의 비가시적인 얼굴과 목소리이다. 그들은 아서의 충동적 행위에 과도하게 반응하는 가면 쓴 시위대 무리로 소환되거나, 그의 망상적 무대에 환호와 야유를 보내는 화면 바깥 청중의 목소리로만 전제되고 있다.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익명의 시위 참가자가 가면을 빼앗기자마자 선뜻 이해하기 힘든 과도한 분노를 드러내며 순식간에 지하철을 폭력과 충돌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진정 ‘얼굴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일까. 이 대목에서 자본가/정치인을 향한 투쟁에의 공감은 조커를 추앙하는 우스운 집단적 무의식으로 전환되고, 이것이 내재하는 계급적 인식은 삶의 ‘코미디’를 자처하는 광대놀음의 유희에 의해 증발하고 만다. 계급의 압력과 공동체의 소멸이라는 세계의 물리적 사태는 조커의 반체제적 형상을 위해 동원될 뿐이다. 단지 어둠 속에서 그들이 함께 분노와 충동을 충전했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배트맨이라는 또 다른 가면, 초법적인 권능으로 조커를 상대할 ‘얼굴 없는’ 영웅의 도래를 은밀히 예고하는 교차편집의 제스처가 헛되게 다가오는 이유다.

<조커>는 정치적으로 조금도 급진적이지 않다. 오히려 이 영화는 파렴치하게 반동적이다. 모두가 날뛰는 혼란스러운 도시의 전경은 역설적으로 이 영화의 시각적 맹점(blind spot)이다. 우울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던 아서는 엉망으로 변한 세계를 다시 창문 너머로 지켜본다. 이 순간에 조커가 짓는 웃음은 세계와 불화하기는커녕 예측 가능한 파국의 형태와 접합하며 너무 쉽게 소화되고 있다. 아서는 오작동과 방향상실로 목적지를 잃고 광장을 떠도는 광대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평온하게 주어진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곳에 파열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파렴치하게 반동적인

이 영화가 구성한 과잉의 수사화에 매혹되는 것도, 과잉의 활력 자체만으로 영화를 옹호하기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도발적인 영화란 공동체의 의미망에 무사히 안착하는 진부한 아이러니가 아니라 우리의 자리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패러독스를 다룬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조커>는 전자에 해당하는 평면적인 초상의 영화이자, 상투적인 어둠에 붙들린 영화이며, 반동적인 흥분으로 도취된 영화다. 무엇보다 토드 필립스는 70년대의 환대가 지나간 뒤, 폭력을 테제로 삼은 미국영화들이 왜 인물의 육체와 영화의 시각적 권능을 훼손하는 자기파괴적 행위를 출구로 삼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의 몸을 때리는 손과 통증을 느끼는 피부를 나란히 전시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또는 “흡혈귀들은 남의 피를 빨아먹지만, 우린 우리의 살점을 뜯어먹어야 한다”고 말하는 아벨 페라라의 <악질 경찰>이 보여주는 것은 공동체의 소진 이후 그곳에 방치된 자들의 정체성을 되묻는 자문이다. 그건 위반을 위반하고, 불화 자체와 불화하려는 도착적인 몸부림이다. 이에 비하면 <조커>가 발산하는 폭력과 카오스는 얼마나 안전하기 짝이 없는가. 모든 것이 남들은 “이해 못할” 아서의 망상일지도 모른다는 알리바이를 덧씌우려 애쓰는 소심한 에필로그에 이르면 사태를 모호함으로 이끄는 빛과 어둠의 수사는 반복적인 술래잡기로 형태를 바꾼다. 아서는 지독한 공상을 꿈꾸면서 아직도 어둠 속에 있다. 병동에 갇힌 카메라는 개인의 분노와 공동체의 충동이 세계와 충돌하면서 벌어진 결과를 외면한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커>는 그러한 기획의 실패를 찍는 것조차 실패한 사례다.

김병규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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