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깁스는 미국의 스포츠 채널 'ESPN'의 로고도 디자인 했다

혁신적인 영화 포스터를 선보인 디자이너 필립 깁스가 지난 10월 초 8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영화 포스터를 작업한 1960년대 말부터 주류 영화계에 흔적을 남겼던 1980년대 말까지 깁스가 남긴 작품들을 소개한다.


로즈메리의 아기

Rosemary's Baby, 1968

출판계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다가 광고회사를 운영했던 필립 깁스는 <로즈메리의 아기>의 타이틀시퀀스를 만든 스티븐 프랑크푸르트의 제안으로 처음 영화 포스터를 디자인 했다. <로즈메리의 아기>의 포스터는 무서운 이미지 없이 무섭다. 눈동자는 저 위를 향하고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듯한 미아 패로우의 옆모습은 따스함이라곤 없는 녹색이 깔려 있고, 새까만 언덕 위에 놓인 유모차가 겹쳐 있는 난해한 이미지만이 포스터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배우를 남편으로 둔 여자가 맨하탄의 중산층 아파트로 이사하고, 악몽과 함께 아이를 갖게 된 후 하나씩 진실을 파헤치면서 불안에 정복당하는 영화를 간결하되 정확히 나타냈다.


다운힐 레이서

Downhill Racer, 1969

두 개의 이미지가 중첩된 형식은 <로즈메리의 아기> 바로 다음에 작업한 <다운힐 레이서>에서도 이어졌다. <다운힐 레이서>의 주인공은 슬럼프를 맞고 재기에 성공하는 괴팍한 성격의 천재 스키선수다. 포스터를 보고 있자면 스키만큼이나 로맨스가 중요한 영화라는 걸 알 수 있다. 아주 작게 보이는 웅크린 남자와 그 옆으로 울퉁불퉁 능선을 배치하고 그 아래를 싹 비워놓아 '스키'를 보여주고, 비현실적으로 포착한 키스 하는 남녀의 모습을 허공에 채웠다. 당대 최고의 미남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스타성을 어필 하지 않는 태도도 인상적이다.


엔터테인먼트

That's Entertainment!, 1974

영화사 MGM의 창립 50주년 기념작 <엔터테인먼트>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MGM에서 제작한 뮤지컬 영화의 명장면들을 짜깁기한 다큐멘터리다. 프레드 아스테어, 빙 크로스비, 진 켈리, 피터 로우포드, 라이자 미넬리, 도널드 오코너, 데비 레이놀즈, 미키 루니,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들이 중간중간 등장해 옛날 이야기를 들려준다. 포스터는 그들의 이름 하나하나를 모두 다른 폰트로 만들어 한데 모았고, 젊었던 얼굴을 오른쪽 아래에 배치했다. 얼굴만큼이나 강력한 이름이라니, 스타란 바로 그런 것!


마뉴

Emmanuelle, 1974

1970년대 중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프랑스의 에로영화 <엠마뉴엘>. 명색이 '에로'인데 포스터는 전혀 난삽하지 않다. 신체 일부만 클로즈업 하는 걸 선호하는 필립 깁스답게 옆으로 본 하관만 크게 잡아 우측 아래에 배치했는데, 입이 반쯤 벌어져 있어 섹슈얼한 무드를 놓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그 입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문구가 바로 "이만한 X등급은 없었다"다. 배우의 헐벗은 이미지 없이도 충분히 관능을 전달할 수 있다는 호기. 글자 꼬리가 한껏 늘어진 채 상승하듯 기울어진 쿠퍼 블랙 폰트마저 어쩐지 야릇해 보이지 않나?


토미

Tommy, 1975

<토미>는 밴드 더 후(The Who)의 멤버들이 배우로 참여하고 더 후의 음악이 영화 전면에 사용된 락 오페라다. 더 후의 보컬 로저 돌트리가 연기한 주인공 토미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내연남에게 살해당하는 걸 본 뒤로 말하지도보지도듣지도 못하다가 핀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 챔피언이 되고, 시력과 청력을 회복해 자유를 되찾는다. 포스터는 핀볼에 초점을 맞춰 로저 달트리의 얼굴을 데칼코마니화해 핀볼 게임대처럼 만들었고, 그 주변을 더 후 멤버, 앤 마그렛, 올리버 리드, 잭 니콜슨, 엘튼 존 등 출연진의 얼굴로 감쌌다.


슈퍼맨

Superman, 1978

<슈퍼맨>의 경우, 포스터보다는 '영화', '크리스마스 개봉'이라는 평범한 글씨만 덩그라니 써있는 홍보물이 훨씬 인상적이다. 우람한 덩치의 사내가 셔츠를 풀어헤치면 그 안에 슈퍼맨 수트가 떡 하니 보이는 컨셉 아트는, 크립톤인으로서 초능력을 갖고 태어났지만 지구에서는 신문기자로 존재를 감추며 살아가는 주인공을 확실히 나타낸다. 파란 수트 위에 찍힌 커다란 'S' 로고만으로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에이리언

Alien, 1979

필립 깁스의 포스터는 자극적인 실체를 전시하지 않음으로써 영화에 대한 궁금증을 자극한다. 깁스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에이리언>의 포스터도 그렇다. H.R.기거가 만든 외계생물의 기괴한 형상을 보여주기보다, 이제 막 깨어지기 시작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알만 덩그라니 띄웠고, <로즈메리의 아기> 포스터처럼 녹색을 강조색으로 사용해 으스스한 분위기를 부풀렸다. 새까만 배경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우주에서는 당신이 소리치는 걸 어느 누구도 들을 수 없다"는 문구가 적막함마저 공포로 승화시킨다.


올 댓 재즈

All That Jazz, 1979

<시카고>로 브로드웨이에서 큰 성공을 거둔 후 영화계에 입성해 감독으로서 활약한 밥 포시의 <올 댓 재즈>는, 무대 위의 쇼를 보여주기보다 뮤지컬을 만드는 사람의 내면에 더 파고드는 작품이다. 뮤지컬과 영화 작업을 병행하면서 술, 담배, 약에 의존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는 주인공 조는 분명 감독 밥 포시의 자기반영적인 캐릭터다. 필립 깁스의 포스터는 주연배우 로이 샤이더의 이름과 간결한 문구와 함께 LL과 ZZ을 겹쳐놓은 독특한 폰트로 만든 'ALL THAT JAZZ' 네온싸인을 덩그라니 두었다. 정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면이 아닌 아래에서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구도 때문에 불안정한 인상이 앞선다.


상태 개조

Altered States, 1980

<상태 개조>는 필립 깁스와 <토미>의 감독 켄 러셀이 다시 만난 작품이다. 환각과 고립 상태로 인간 진화의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주인공이 실험의 위험도를 높이게 되면서 경험하는 기상천외한 일들을 보여주는 SF영화다. 실험 중에 빠지는 환상에서 그는 턱이 돌출되고, 진화 이전의 직립동물이 되고, 인간으로는 불가능한 괴력을 갖고, 동물원에 들어가 영양을 잡아먹는데, 포스터는 그런 걸 드러내는 데엔 관심이 없다. 그저 실험을 위해 물에 살짝 잠겨 있는 모습을 거꾸로 매달린 듯 배치했고, 모래색으로 컬러를 입힌 후 얼굴에 붙은 전극에만 색을 살렸다.


폴 뉴먼의 선택

Absence of Malice, 1981

주류업자인 주인공은 신문기자의 의도적인 오보로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몰린다. 그로 인해 여자친구의 목숨까지 잃게 된 그는 언론사에게 복수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폴 뉴먼의 선택>의 포스터는 빼곡히 새겨진 글자 위에 단순한 덧칠로 폴 뉴먼의 얼굴로 새겼다. 1980년대 들어 필립 깁스의 포스터엔 문구의 비중이 확 커졌는데, 뉴먼의 얼굴 옆에 구구절절 적힌 글은 영화에 대한 설명이 지나치게 자세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딱히 매력을 떨어트린다. 그게 깁스의 선택인지, 영화사와 시대의 요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노 웨이 아웃

No Way Out, 1987

필립 깁스의 후기 작업엔 찢어진 흔적을 중심으로 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이 두드러진다. 국방장관의 애인과 밀회를 즐기던 해군 소령은 그녀가 돌연 실족사 하게 되면서 관계가 발각될 것을 두려워 하며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다. 케빈 코스트너와 숀 영의 끈적한 포즈가 중심을 차지한 <노 웨이 아웃>의 포스터는 정면을 응시하는 코스트너가 내연 관계로 인해 맨 위에 위치한 진 해크먼으로부터 위협 받는다는 설정을 드러낸다. 이미지 자체가 단출한 건 매한가지인데,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줬던 초기작들에 비해선 다분히 설명적이고 성기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위험한 정사

Fatal Attraction, 1987

몸을 맞대고 있는 글렌 클로즈와 마이클 더글라스에 연보라 톤이 입혀졌고, 그들 사이로 찢다 만듯한 시뻘건 균열이 있다. '위험한 정사'(원제를 직역하자면 '치명적인 매혹')라는 제목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에, 포스터만 보면 집착하는 남자를 여자가 외면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잘 알다시피 이것은 포스터의 '낚시'다. <위험한 정사>는 원나잇스탠드를 즐겼던 남자에게 여자가 처절하게 집착하는 과정을 파고드는 스릴러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