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한 호러 영화의 고전 <샤이닝>(1980)의 속편 <닥터 슬립>이 개봉했다. 전편의 주인공이었던 잭(잭 니콜슨)의 아들 대니(이완 맥그리거)가 성장해 '샤이닝' 능력자들을 이용해 영생하려는 비밀 조직과 맞서게 된다는 이야기다. <닥터 슬립> 보기 전 훑어보면 좋을 <샤이닝>에 관한 사실들을 전한다.
<배리 린든>(1975)을 마친 스탠리 큐브릭은 다음 프로젝트를 위해 수많은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큐브릭의 비서는 종종 그가 사무실 벽에 책 던지는 소리를 들었는데,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던 날엔 벽 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다음 영화를 위한 작품을 찾았구나 생각했다고.
데이비드 린치의 데뷔작 <이레이저헤드>(1977)는 스탠리 큐브릭이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영화들 중 하나다. 큐브릭은 <샤이닝>을 만들면서 <이레이저헤드>에 창작적인 영감을 얻었다고 밝혔고, 배우/스탭진에게 자신이 원하는 무드를 단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이레이저헤드>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레이저헤드
스티븐 킹은 '샤이닝'이라는 제목을 짓는 데에 존 레넌과 오노 요코 밴드의 노래 'Instant Karma'의 후렴구 "We all shine on"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잭의 가족이 오버룩 호텔로 가는 오프닝 신을 위해 찍어놓았던 푸티지는 리들리 스콧이 제작사의 압박에 <블레이드 러너>(1982)가 처음 개봉했을 당시 어거지로 해피 엔딩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활용됐다. 물론 큐브릭의 허락 하에. 이 장면들은 헬리콥터 카메라맨인 그렉 맥길리브레이가 몬태나 주에 위치한 글레이셔 국립공원 근방에서 촬영했다.
롱숏으로 찍은 호텔의 외관은 오리건 주 마운트 후드에 위치한 팀버라인 롯지다. 원작엔 217호였던 방이 영화에선 237호로 바뀌었는데, 영화를 본 이들이 217호에 묵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지배인의 요청에 따라 원래 없는 방인 237호로 정한 것이다.
셸리 듀발과 잭 니콜슨은 <샤이닝>을 향한 평단과 관객의 반응이 배우와 스탭의 노고와 스티븐 킹 원작의 힘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스탠리 큐브릭의 연출에만 극찬하는 바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 듀발은 <샤이닝>의 웬디가 생애 가장 힘든 연기였다고 떠올렸고, 처음에 웬디 역에 제시카 랭을 추천했던 니콜슨은 듀발의 연기는 정말 환상적이었고 여태껏 자기가 본 여성 배우들의 연기 중 제일 어려운 것이었다고 밝혔다. 듀발은 촬영 내내 머리카락이 빠지는 등 극한의 피로에 시달렸고,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까지 말라버려 촬영 틈틈이 많은 양의 물을 마셔야 만했다.
셸리 듀발과 잭 니콜슨
잭 니콜슨에게 격한 감정을 불어넣기 위해 2주 동안 그가 싫어하는 치즈 샌드위치만 줬다.
<샤이닝> 촬영 당시 잭 니콜슨의 아내였던 안젤리카 휴스턴은 스탠리 큐브릭 특유의 길고 반복적인 촬영으로 인해 니콜슨이 집에 오자마자 침대로 걸어가 쓰러져 그대로 잠들었다고 회고했다.
잭이 호텔 벽에 테니스 공을 던지면서 시간을 죽이는 설정은 잭 니콜슨의 아이디어였다. 시나리오엔 "잭은 일하지 않는다"고만 적혀 있었다. 공을 던지는 모습만으로도 잭의 폭력성을 엿볼 수 있다.
오버룩 호텔의 헤드 셰프 딕 할로랜과 잠시 통화하는 정비소 주인으로 출연한 토니 버튼은 촬영 중 휴식시간을 떼우기 위해 체스를 현장에 가지고 왔다. 젊을 적에 열렬한 체스광이었던 스탠리 큐브릭은 그걸 발견하곤 버튼과 체스를 두기 위해 그 날 촬영을 미뤘다.
스탠리 큐브릭과 미술감독 로이 워커는 일관된 디자인으로 통일하지 않고, 실제 존재하는 호텔들의 요소를 합친 듯한 모양새로 오버룩 호텔의 공간을 구성했다. 온통 새빨간 남자 화장실은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설계한 애리조나의 빌트모어 호텔, 콜로라도 라운지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아와니 호텔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와니의 샹들리에, 창문, 벽난로는 특히 아주 똑같아서 호텔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종종 여기가 샤이닝 호텔이냐고 묻는다고.
아와니 호텔
잭이 타이핑 하는 콜로라도 라운지를 비롯, 오버룩 호텔의 모든 실내 공간은 영국의 엘스트리 스튜디오에서 찍은 것이다. 바깥에 눈 온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방 안에 70만 와트의 조명이 쓰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천장을 더 높이 해서 세트를 다시 짓기도 했다. 훗날 이 공간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이더스>(1981) 속 뱀이 가득한 '영혼의 샘' 신이 촬영됐다.
<레이더스>
<택시 드라이버> 로버트 드 니로 / <모크와 민디> 로빈 윌리엄스
스탠리 큐브릭은 한때 잭 역에 로버트 드 니로와 로빈 윌리엄스를 고려한 적이 있다. <택시 드라이버>(1976)의 드 니로는 별로 정신병자처럼 보이지 않아서, <모크와 민디>(1978)의 윌리엄스는 너무 정신병자처럼 보인다고 여겨서 단념했다. 한편, 원작자 스티븐 킹은 <차이나타운>(1974),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등으로 광기어린 이미지를 보여준 잭 니콜슨 대신 평범하다는 인상을 주는 마이클 모리아티나 존 보이트를 캐스팅 해 점점 미쳐가는 과정을 보여주기를 제안했다.
<페일 라이더>의 마이클 모리아티 / <미드나잇 카우보이> 존 보이트
스티븐 킹은 웬디 역에 셸리 듀발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는 웬디를 자기 삶에 그 어떤 문제도 겪어보지 않은 금발의 치어리더 같은 타입으로 만들어 오버룩 호텔에서의 경험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지도록 설정했는데, 듀발은 감정적으로 너무 취약하고 사연이 많아 보여 자기가 생각한 이미지와 정반대였다.
<뽀빠이>와 <세 여자>의 셸리 듀발
스탠리 큐브릭이 처음 대니 역으로 고려했던 배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1977)에 출연한 캐리 거피였다. 하지만 거피의 부모는 영화의 주제를 문제 삼아 캐스팅을 거절했다.
<미지와의 조우>의 멜린다 딜런과 캐리 거피
대니가 또 다른 자아인 토니와 대화 할 때 손가락을 움직이는 설정은 대니 로이드의 아이디어였다. 첫 오디션 중에서 그걸 선보였다.
딕 할로랜 역에 스캣맨 크로더스를 추천한 건 잭 니콜슨이었다. 크로더스 역시 한 신만 수십 번 촬영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큐브릭은 잭이 곡괭이로 딕을 죽이는 신을 70번 정도 찍을 생각이었는데, 니콜슨은 40회 정도 찍고 나서 촬영 당시 이미 60대 후반이었던 크로더스의 건강을 생각해 이쯤 찍는 것 어떻겠냐고 말렸다. 크로더스의 다음 작품은 촬영 대부분을 거의 한 테이크로 마무리 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브롱코 빌리>(1980)였다. 그는 첫 장면을 찍고 나서 다시는 밑도끝도 없이 찍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눈물을 쏟았다.
큐브릭이 딕 할로랜 역에 원했던 배우는 슬림 피켄스였다. 하지만 큐브릭의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를 찍어본 적 있는 피켄스는 다시는 그와 작업할 마음이 없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슬림 피켄스
'골드 룸'의 바텐더 로이드는 해리 딘 스탠턴이 맡기로 돼 있었지만 <에이리언>(1979) 합류로 무산됐고, 큐브릭의 초기작 <킬링!>(1956)과 <영광의 길>(1957)에 출연한 조 터켈이 연기했다.
<에이리언>의 해리 딘 스탠턴 / <샤이닝>의 조 터켈
욕조에서 나체로 등장하는 두 여자를 연기한 리아 벨덤과 빌리 깁슨은 <샤이닝>이 유일한 출연작이다.
웬디가 침대에 누워 있는 잭에게 아침식사를 가져다 주는 신, 잭은 '스토빙스턴'이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영화에서는 언급되진 않지만, 소설에서는 스토빙스턴이 잭이 교편을 잡았던 학교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잭 니콜슨은 웬디가 글 쓰는 걸 방해한다며 잭이 그녀에게 매섭게 쏴붙이는 신이 제일 연기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60년대엔 각본도 썼던 그 역시 비슷하게 다퉜던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니콜슨은 그 경험을 빌어 "내가 여기 있을 때 타자기 소리가 들리면... 타자를 치든 뭘 하든 내 기척이 들리면 그건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절대로 들어오지마" 라는 대사를 더했다.
특수효과의 제약 때문에 원작 소설대로 울타리 동물이 살아나는 걸 그려내긴 힘들다는 판단 하에, 스탠리 큐브릭은 대신 울타리 미로를 넣기로 했다.
에어컨이 없던 현장은 아주 더웠다. 특히 울타리 미로 세트가 정말 답답했는데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탓에 배우들은 촬영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고 있던 옷을 벗어던졌다.
스탠리 큐브릭은 영화를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기로 원했다. 이 말인즉슨, 모든 세트가 촬영 기간 그대로 보존돼야 한다는 것. 이 방식을 고집하기 위해 엘스트리 스튜디오의 모든 공간은 촬영 내내 사용 중 상태였다. 촬영 일정이 계속 늘어져 거의 1년 가까이 진행되는 바람에 엘스트리에서 찍기로 예정됐던 워렌 비티의 <레즈>(1981)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레이더스>의 촬영이 연기됐다.
<샤이닝> 현장의 가렛 브라운
스테디캠을 발명하고 촬영까지 맡았던 가렛 브라운은 애초 예정돼 있던 6개월의 촬영을 마치고 <록키 2>를 찍기 위해 미국으로 가야 했다. 하지만 6개월 동안 촬영은 반도 마치지 못했고, 여러 달 동안 브라운은 한 주는 런던에서 <샤이닝>을 찍고 일요일에 콩코드를 타고 필라델피아로 건너가 그 다음 한 주는 <록키 2>를 찍는 식의 일정을 반복했다.
기네스북에는 웬디가 계단을 오르는 잭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신을 127번 찍었다고 등재됐는데, 스테디캠 기사 가렛 브라운과 편집 어시스턴트 고든 스테인포스는 35번에서 45번 사이였다고 정정했다.
포스터와 로고를 만든 디자이너 솔 바스는 큐브릭이 만족할 때까지 300가지가 넘는 판본을 만들었다.
잭의 그 유명한 대사 "자니가 왔지요!"는 니콜슨이 미국 토크쇼 <자니 카슨의 투나잇 쇼>의 멘트를 따와 즉석으로 선보인 것이다. 영국에 살았던 스탠리 큐브릭은 이 말이 익숙하지 않아 이 애드립을 쓰지 않을 뻔했다.
셸리 듀발에 따르면, 욕실 문을 부수고 "자니가 왔지요!" 하는 신을 찍는 데에 3일이 걸렸고, 60개의 문이 사용됐다고 한다.
잭이 욕실 문을 부수는 신을 위해 소품 팀은 부서지기 쉬운 재질로 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소방대원으로 일했던 잭 니콜슨이 그걸 너무 쉽게 부숴버리자 더 단단한 문으로 바꿔야 했다.
영화 속에서 잭이 몇 달간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잭은 바보가 된다"를 타이핑 하는 소리는 실제로 그 문장을 적는 걸 녹음한 것이다. 같은 문장만 한 가득 있는 종이 뭉치는 스탠리 큐브릭의 비서가 몇 주에 걸쳐 쓴 것이다.
웬디가 대니를 찾으러 다는 길, 한 방 안에서 곰 의상을 입은 남자가 전 호텔 매니저와 섹스를 나누고 있다. 이 신은 영화 속에서 이렇다 할 설명이 없는데, 소설에서는 호텔 매니저가 1년간 개 의상을 입은 파티 손님과 몰래 동성애 관계를 가졌다는 언급이 있다.
영화 마지막, 잭이 대니를 추격하는 눈 덮인 미로는 900톤의 소금과 스티로폼으로 만들었다.
스티븐 킹은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캐딜락에 모터가 없는 꼴과 같다며, 큐브릭이 구현한 비주얼이 끝내준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건 그저 껍데기일 뿐 본질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스티븐 킹 / 소설 <샤이닝> 초판본
촬영 중에 배우 괴롭히기로 악명 높았던 스탠리 큐브릭은 나이 어린 대니 로이드에게만큼은 지극히 보호적이었다. 웬디가 237호에 들어갔다가 목이 다쳐서 콜로라도 라운지에 온 대니를 끌어안고 잭에게 욕설을 퍼붓는 신 속의 대니는 사실 실물 사이즈의 인형이었다. 로이드는 <샤이닝>이 영화가 호러가 아닌 드라마인 줄 알고 촬영했다. 수년이 지나 상당 부분 편집된 버전의 <샤이닝>을 보고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됐고, 영화가 개봉한 지 11년이 지난 17살이 되던 해에야 무삭제판을 볼 수 있었다. 로이드는 엘리자베스타운에 있는 한 대학에서 생물학을 가르쳤고, <닥터 슬립>에서 야구 경기를 보는 관람객으로 카메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