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가 제작한 노아 바움백 감독의 신작 <결혼 이야기>가 절찬 상영중이다. 막다른 상황에 서 있는 부부 니콜과 찰리 역의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는 각자 커리어에서 가장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고 있다.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두 배우 외에 <결혼 이야기>를 채운 배우들이 그동안 무슨 작품들을 거쳐왔는지 살펴보자.


노라

로라 던

순탄하게 진행될 줄 알았던 니콜과 찰리의 이혼은, 니콜이 노라를 만나면서 법적 분쟁이 시작된다. 유능한 변호사인 노라는 신발까지 벗고 얼굴을 가까이 맞댄 채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정확하게 부부의 문제점을 파악해 니콜이 LA에서의 생활을 양보하고 살아왔던 문제점을 일깨운다. 로라 던은 흔히 데이빗 린치가 가장 사랑하는 배우로 손꼽힌다. <블루 벨벳>(1986), <광란의 사랑>(1990)에 이은 (현재로선 린치의 마지막 극장용 영화) <인랜드 엠파이어>(2006)는 온전히 던을 위한 작품이었다. <쥬라기 공원>(1993)과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2017) 같은 메머드급 흥행작과 더불어 클린트 이스트우드, 알렉산더 페인, 로버트 알트만, 폴 토마스 앤더슨, 켈리 레이커트 등 수많은 미국의 명 감독들이 던의 길쭉길쭉한 신체를 통해 자기가 구축한 세계에 별격을 부여했다. <결혼 이야기>로 노아 바움백과 처음 작업한 던은, 올해 바움백의 연인 그레타 거윅이 내놓은 신작 <작은 아씨들>에도 출연했다.

<쥬라기 공원> / <인랜드 엠파이어>


버트

알란 알다

찰리 편에 선 첫 번째 변호사 버트는 그를 처음 마주하고는 "보통 변호사들에게 당신은 업무일 뿐이죠. 난 당신을 사람으로 보고 싶어요. 당신의 부인까지도요"라고 말한다. 이혼 과정이 불쾌할 순 있지만 꼭 그렇게 지독할 필요도 없다고 믿는 그는 분명 따뜻한 사람 같다. 버트의 상냥한 태도는 찰리를 당장 안심시키긴 하지만, 이혼 소송에서 이겨야 하는 목적과는 거리가 멀다. 버트를 연기한 알런 알다는 미국의 전설적인 드라마 시리즈 <M*A*S*H>를 무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11개 시즌을 이끌었다. 주인공 호크아이 대위를 연기한 그는 시리즈의 최종회를 비롯한 수많은 에피소드의 연출과 각본까지 담당했고, 골든글로브 TV 코미디/뮤지컬 부문 주연상을 6번이나 수상했다. 이후 알다는 아주 활발하게는 아니지만 꾸준히 현역으로 활동하면서 <ER> <웨스트 윙> <30 락> 등 인기 TV 시리즈에 출연했고, 마틴 스코세이지의 <에비에이터>(2004)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2015)에 출연해 <결혼 이야기> 속 버트와는 전혀 다른 냉철한 인물상을 선보였다.

<M*A*S*H> / <에비에이터>


제이

레이 리오타

찰리가 처음 만나는 변호사로 제이가 등장할 때, 이 소송이 만만치 않게 흘러갈 거라는 걸 직감하게 된다. 고압적인 태도도 태도지만, 젊었을 적 레이 리오타의 캐릭터가 보여준 지글지글한 폭력성이 대번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버트보다 2배 이상 비싼 수임료를 받는 제이에게 '다시 돌아가면서' 소송은 그야말로 진흙탕싸움이 되고, 니콜과 찰리 사이 감정의 골은 겉잡을 수 없이 깊어진다. 조나단 드미의 <섬띵 와일드>(1986)에서 보여준 위협적인 연기로 로버트 드 니로의 눈에 든 레이 리오타는, 그의 추천으로 스코세이지의 갱스터 영화 <좋은 친구들>(1990)의 주인공으로 낙점돼 갑작스러운 성공으로 점점 더 잔혹하고 비열해지는 헨리 힐을 각인시켰다. 그 이후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부지런하게 활동하면서 부패한 인물을 연기하는 데엔 남다른 감각을 보여줬음에도 불구하고 리오타의 커리어는 <좋은 친구들>만큼의 스포트라이트를 이끌어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좋은 친구들> / <셰이즈 오브 블루>


헨리

아지 로버트슨

이혼을 그리는 영화에서 아이의 존재는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뉴욕에서 활동하고 이제 막 큰 주목을 받기 시작한 찰리가 LA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소송을 진행하는 것도 아들 헨리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걸 어필하기 위함이다. <결혼 이야기>에서 헨리는 꽤 여러 순간 등장하지만 이렇다 할 큰 인상을 남기지 않는다. 배우의 역량이 아닌 감독의 결정이다. 멋모르는 순수한 얼굴로 부모에게 속깊은 말을 던져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순간 같은 클리셰가 배제돼 있다. 아지 로버트슨은 한국 관객에겐 아직 낯선 배우다. 2016년 <SNL>의 한 콩트에 등장하고 여러 단편에 출연한 뒤 작년부터 저예산의 장편영화들로 필모그래피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는데, 한국 극장가에 개봉한 건 <결혼 이야기>가 처음이다. 위노나 라이더, 조 카잔, 존 터투로 등과 호흡을 맞춘 HBO 드라마 <플롯 어게인스트 아메리카>가 내년 중 공개될 예정이다.

<줄리엣, 네이키드>


산드라

줄리 하거티

니콜의 엄마 산드라는 귀엽고, 기운이 넘친다. 쾌활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가족들이 주말이랍시고 늦게까지 누워 있는 꼴을 못 보는 이 중년 여성은 니콜이 이혼하겠다는 뜻을 존중하면서도 내심 딸 부부가 갈라서지 않길 바라는 눈치다. 딸과 별거한 찰리를 그 누구보다 반갑게 대하고("찰리와 나의 돈독한 관계는 네 결혼이랑 별개야"), 찰리에게 변호사를 소개시켜준다. 심지어 첫째 딸의 전 남편이랑도 여전히 친하게 지낸다.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해 브로드웨이 무대에서도 데뷔했던 줄리 하거티는 영화사상 가장 웃기는 코미디 영화로 손꼽히는 첫 영화 <에어플레인!>(1980)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큼지막한 이목구비를 자유자재로 쓰면서 연이은 돌발상황을 맞닥뜨린 승무원의 허당끼를 보여준 <에어플레인!>과 그 속편에 이어 우디 앨런의 <한여름의 섹스 코미디>(1982), 미국 전역을 횡단하는 부부를 그린 <로스트 인 아메리카>(1985)에 출연한 하거티는 1990년대 들어 주로 작은 비중의 조연으로 활약해왔다.

<에어플레인!>


캐시

메릿 웨버

찰리에게 이혼 소송장이 전달되는 신은 <결혼 이야기>에서 가장 웃긴 대목이다. 니콜과 그의 언니 캐시가 전남편과 친한 엄마와 옥신각신 하면서 시작하는 이 신은 거짓말엔 영 재능이 없는(그래서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캐시가 아무 말이나 내뱉다가 싱크대에 있는 소송장을 찰리가 발견하자 "제부... 소송 당했어" 라고 고백하고 자리를 떠버리면서 그 웃음이 극에 달한다. <그린버그>(2010) 이후 오랜만에 노아 바움백에 출연한 메릿 웨버는 미드 깨나 본 이들에겐 꽤 친숙한 얼굴이다. 쇼타임의 <너스 재키>에서 흥이 넘치는 간호사 조이 역을 맡아 일곱 시즌 모두 참여했고, 넷플릭스의 서부극 <그 땅에는 신이 없다>(2017)에서 광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자립적인 여성 메리를 연기해 에미 어워드 조연상을 받았다. <결혼 이야기>와 더불어, 토니 콜렛과 함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이끌면서 넷플릭스의 단골배우로 자리잡았다.

<너스 재키>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프랭크

월리스 쇼운

<결혼 이야기>의 서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은근히 자주 등장하는 캐릭터가 있다. 찰리가 운영하는 극단의 최고령 배우 프랭크다. 연장자로서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을 주기보다는 틈만 나면 옛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그가 맡은 역할처럼 보인다. 나름 귀여운 꼰대 할배다. 귀 밝은 관객이라면 남이 하나도 안 궁금한 얘기를 열심히 전하는 프랭크의 목소리에서 <토이 스토리> 시리즈의 렉스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다. 1995년부터 2019년까지 겁쟁이 티라노사우르스 장난감 렉스를 연기한 월리스 쇼운은 픽사의 <인크레더블>(2004)과 디즈니의 <치킨 리틀>(2005)에도 목소리를 보탰다. 첫 영화 <맨하탄>(1979)부터 머리 한가운데가 휑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쇼운은 <프린세스 브라이드>(1987) <클루리스>(1995) <매기스 플랜>(2015) 등의 코미디 영화에 감초로 출연했고, 극작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쳐왔다.

<토이 스토리> / <클루리스>


평가원

마사 켈리

척 봐도 생활의 흔적이 거의 보이지 않는 찰리의 LA 거처에 한 여자가 찾아온다. 직접적으로 명시되진 않지만, 찰리가 아들을 부양할 수 있을지 평가하러 온 사람일 것이다. 급조한 게 분명해 보이는 인테리어로 가득한 공간에서 찰리, 헨리, 평가원은 저녁까지 정말 어색한 시간을 보낸다. 이토록 이상한 분위기에 의연하게 보이려는 듯 더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고 똑똑히 대답하는 마사 켈리의 세밀한 연기가 발군이다. 고향 LA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며 차근차근 활동 범위를 넓혀온 켈리는 코난 오브라이언과 크레이그 퍼거슨의 심야 프로그램, NBC와 코미디 센트럴 채널의 스탠딩 코미디에 출연했고 2016년 <행오버> 시리즈의 잭 갤리퍼내키스가 이끄는 TV 시리즈 <바스켓>으로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스탠드업 코미디 프로그램 <하프 아워>에 참여한 켈리의 영상에 달린 댓글 "TED 강연인 줄 알고 클릭 했다"는 그의 기묘한 스타일을 아주 잘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바스켓> / <하프 아워>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