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의 배경으로 한 전쟁영화 <1917>은 영화 전체를 단 하나의 신으로 촬영된 듯한 이미지로 관객에게 전장의 막막함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사실 <1917>은 여러 신을 교묘한 편집 기술을 통해 한 테이크로 찍은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됐다. 멀게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1948), 가깝게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버드맨>(2014)이 유사한 사례다. 길이는 물론 형식도 서로 다른 동서고금 명작들의 롱테이크를 소개한다.


살인의 추억

2003

감독: 봉준호

촬영: 김형구

<살인의 추억>의 논두렁 롱테이크는 자잘한 '삑사리'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다. 또 한명의 시체가 발견된 논두렁에 도착한 박두만(송강호)이 현장 통제가 안 되는 상황을 푸념하며 공간을 계속 왔다갔다 하는 동선을 한 호흡으로 담았다. 그는 진흙에 찍힌 발자국을 발견하고, 논두렁에 내려오다가 자빠지며 등장하는 반장(변희봉)과 함께 사체를 보다가, 경운기가 발자국을 밟고 지나가는 걸 뛰어와서 막으려다가 실패하고, 감식반도 자빠지는 걸 보고 "논두렁에 꿀 발랐나" 윽박을 지른다. 봉준호는 2분 짜리 신을 찍기 위해서 100명이 넘는 인원들과 함께 오전 내내 연습하고, 오후부터 14개 테이크를 찍었다. 배우들의 연기가 더 좋았던 테이크가 있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쓰지 못하고, 9번째 테이크가 최종 버전에 쓰였다. 송강호와 변희봉의 기가 막힌 애드립을 보면서 봉준호는 두 배우가 부자 관계로 나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고, 그 결과 <괴물>의 박희봉-박강두 부자가 탄생됐다.


올드보이

2003

감독: 박찬욱

촬영: 정정훈

한편, 2003년 한국영화계에 도착한 또 다른 명작 <올드보이> 속 장도리 액션신은 즉흥적인 결정 덕분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박찬욱은 원래 오대수(최민식)가 철웅(오달수)의 이빨을 다 뽑아버리고 나가는 길에 부하들과 마주쳐 그들을 모두 쓰러트려버리는 신을 수많은 컷 아래 정교하게 짜여진 액션과 다양한 시각효과를 적용해 연출하려 했지만, 촬영 스케줄에 쫓겨 오랫동안 준비한 콘티를 엎고 트래킹만으로 진행되는 극히 단순한 롱테이크를 택했다. 홀로 그 많은 깡패들을 감당하는 오대수의 괴물 같은 전투력, 그럼에도 점점 지쳐가는 육체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면서 일당백의 리얼리티를 살렸다. 죽어라 치고받을 때보다 가만히 멈춘 채 숨을 고르는 순간이 더 인상적이다.


칠드런 오브 맨

Children of Men, 2006

감독: 알폰소 쿠아론

촬영: 엠마누엘 루베츠키

알폰소 쿠아론은 롱테이크를 선호하는 감독으로 손꼽힌다.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2004) 같은 전체관람가 영화에서도 그의 취향은 어김없이 드러났다. <이 투 마마>(2001) 이후 5년 만에 오랜 촬영 파트너 엠마누엘 루베츠키와 함께 한 <칠드런 오브 맨>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고난도 촬영 테크닉으로 담아낸 롱테이크가 여럿 등장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테오도르(클라이브 오웬) 일행이 숲속을 달리다가 매복한 괴한들에게 습격당하는 신이다. 좁은 차 안에서 평화롭게 담소를 나누던 모습이 잠시 이어지다가 불타는 차가 그 앞에 처박히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어진다. 괴한의 공격을 피해 뒤로 달리던 중 줄리안(줄리안 무어)은 총에 맞고, 반대편에서 오던 경찰에게 붙잡히지만 루크(치웨텔 에지오포)가 그들을 죽인다. 아주 잠시의 평화조차 용납되지 않는 디스토피아의 아비규환을 추체험케 한다. 쿠아론은 다음 작품 <그래비티>(2013)를 12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연 바 있다.


악의 손길

The Touch of Evil, 1958

감독: 오슨 웰스

촬영: 러셀 메티

시간을 저 멀리 1958년으로 돌려보자. 오슨 웰스는 <악의 손길>로 오랜만에 할리우드에 돌아와 오프닝에서부터 화려한 연출력을 과시했다. 한 남자가 손에 시한폭탄을 작동시키는 클로즈업으로 지켜보던 카메라는, 그가 어떤 차 트렁크에 폭탄을 넣고 도주하고, 주인이 차를 몰고 이동하는 걸 저 멀리 위에서 내려다본다. 과연 저 폭탄이 언제쯤 터질까 불안한 가운데, 길에서 마주하는 상황 때문에 차는 느리게 이동한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돌연 두 연인이 등장하자 이제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가고, 곧 폭탄이 실린 차가 그 옆에서 아슬아슬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처음부터 폭탄을 대놓고 보여준 덕분에 가능한 서스펜스가 미국과 멕시코 국경지대 마을의 복잡다단한 면모를 한눈에 보여주는 유려한 카메라워크와 함께 맞물려 터질 듯 부풀어 오른다. 곧 터져버릴 자동차 옆을 걷던 남자는 신혼여행 차 미국에 온 멕시코 마약 단속반 바르가스(찰스 헤스턴). 이 폭발사고를 목격한 바르가스가 사건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플레이어

The Player, 1992

연출: 로버트 알트만

촬영: 장 레핀

로버트 알트만이 1992년 발표한 '영화에 대한 영화' <플레이어>의 오프닝은 8분에 달하는 롱테이크로 시작한다. 장소는 할리우드의 어느 영화사. 영화 촬영장을 담은 그림에서 줌아웃한 카메라는 위치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이 건물 주변을 샅샅이 관찰한다. 팀 로빈스가 연기하는 영화사 대표 그리핀이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염탐하듯 바라보다가 바깥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들에게 시선을 돌리다가도 다시금 그리핀에게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악의 손길>의 롱테이크와 유사한 스타일로 진행되던 영화는 대화 중에 <악의 손길>을 예로 들어 롱테이크를 예찬하는 대화까지 넣어 <악의 손길>에 무한한 존경을 바친다. 이 긴 여정의 끝은 그리핀이 협박 편지를 받는 것으로 맺는다. 총 15번 촬영해 10번째 테이크가 쓰였다고 한다.


주말

Week-end, 1967

감독: 장 뤽 고다르

촬영: 라울 쿠타르

롱테이크는 숏이 오랫동안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그 화려한 카메라워크 덕분에 시각적인 스펙터클을 제공한다. 장 뤽 고다르의 <주말> 속 롱테이크의 동선은 지극히 단순하다. 적적한 시골 마을에 각양각색의 차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고, 카메라는 오른쪽으로 천천히 이동하며 그 행렬을 그대로 따라간다. 카메라는 단순히 수평으로 움직일 뿐인데, 자동차의 저마다 다른 형상들은 은근 화려한 미장센으로서 작동한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차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길 조용히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어딜 가나 경적 소리는 끊이지 않고, 사람들은 바깥에 허무하게 앉아 있거나 아예 자리를 잡고 놀이에 열중하거나 서로 길길이 싸우고 있다. 고다르는 7분 훌쩍 넘게 진행하는 롱테이크로써 (자동차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이 만드는 아비규환을 그 자체를 보여준다. 우리는 결국 길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목격하고 나서야 이 체증을 빠져나올 수 있다.


여행자

The Passenger, 1975

연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촬영: 루치아노 토볼리

단조롭되 놀라운 롱테이크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잭 니콜슨이 함께 한 <여행자>의 마지막 장면을 빼놓을 수 없다. 아프리카 지역을 알리는 TV 리포터 로크(잭 니콜슨)는 게릴라 군을 취재하다가 자기와 닮은 국제무기밀매상이 죽어가는 걸 발견하고 그와 신분을 바꿔치기 하고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된다. 영화 마지막, 로크는 스페인 세빌의 한 호텔 침대에 가만히 누운 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카메라의 시선은 저 밖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다. 느린 전진이 5분 넘게 지속되는 동안 호텔 창 앞으로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고, 주변에 들리는 소음 사이로 둔탁한 총성이 총성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울린다. 계속 앞으로 가는 카메라가 창살을 아무렇지 않게 뚫고 바깥으로 나아가 한복판에 이르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해 로크의 방을 바라보게 된다. 로크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다.


좋은 친구들

Goodfellas, 1990

감독: 마틴 스콜세지

촬영: 마이클 발하우스

실내에서 펼쳐지는 롱테이크는 카메라가 제한된 공간을 오랫동안 이동시켜야 하기 때문에 촬영하기 훨씬 까다롭기 마련이다. 별별 장르를 시도하면서도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재능을 놓치는 법이 없었던 마틴 스콜세지의 갱스터 영화 <좋은 친구들>은 실내 롱테이크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주인공 헨리(레이 리오타)는 여자친구 카렌(로레인 브레코)을 코파카바나 나이트클럽으로 데려간다. 크리스탈스의 'Then He Kissed Me'가 흐르는 가운데, 갱단의 일원으로 점점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걸 과시하듯 그는 구태여 클럽 뒷문으로 입장해 온갖 인력들이 뒤섞여 있는 주방을 굽이굽이 지나 홀로 들어온다. 이 과시적인 동선을 통해 헨리와 스콜세지는 각자 제 목적을 달성한다. 헨리는 자기가 가진 권력을 과시하며 카렌의 마음을, 스콜세지는 휘황찬란한 카메라워크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부기 나이트

Boogie Nights, 1997

감독: 폴 토마스 앤더슨

촬영: 로버트 엘스윗

불과 26세 나이에 <리노의 도박사>(1996)로 데뷔한 폴 토마스 앤더슨은 이듬해 발표한 두 번째 영화 <부기 나이트>의 문을 화려한 롱테이크로 열어젖힌다. 딱 들어도 레트로의 느낌이 묻어나는 노래를 전면에 내세운 채, 클럽으로 입장해 그 안을 돌아다닌다는 점에서 <좋은 친구들>의 롱테이크와 꽤나 닮았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좋은 친구들>의 경우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헨리와 카렌을 제외하면 모두 엑스트라에 불과하지만, <부기 나이트>는 거의 3분을 육박하는 시간에 잭(버트 레이놀즈), 매기(줄리안 무어), 브랜디(헤더 그레이엄), 벅(돈 치들), 그리고 대망의 주인공 에디(마크 월버그)까지 짤막짤막 훑고 지나간다. 이모션스의 흥겨운 디스코 리듬과 함께 소개되는 인트로가 끝나면 포르노 산업을 둘러싼 인물들의 흥망성쇠가 이어진다.


스네이크 아이즈

Snake Eyes, 1998

감독: 브라이언 드 팔마

촬영: 스티븐 H. 브럼

할리우드의 명장 테크니션 브라이언 드 팔마의 <스네이크 아이즈>의 오프닝 시퀀스는 무려 20분에 달한다. 그 중 초반 12분은 딱 한 테이크로 찍혔다. 복싱 경기 중계와 관련한 TV 화면들을 거치다보면 부패 형사 릭(니콜라스 케이지)이 나타나 능글맞게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찍히고, 그가 TV 프레임에서 빠지면 그대로 그 동선을 따라간다. 여러 사람을 마주하는 5분이 지나고 나서야 릭은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고, 거기서 옛 친구인 국방장관 경호대장 케빈을 만나 오랫동안 대화를 나눈다. 입이 떡 벌어지도록 복잡한 동선과 경기장을 가득 메운 엑스트라들로 밀어붙이는 스케일도 스케일이지만, 수많은 스탭들의 노력을 등에 업고 그야말로 원맨쇼를 펼쳐보이는 니콜라스 케이지의 연기 또한 눈부시다.


헝거

Hunger

연출: 스티브 맥퀸

촬영: 션 보빗

아일랜드 독립을 위해 탄식투쟁 했던 보비 샌즈의 실화를 그린 <헝거>. 전체 러닝타임 96분 가운데, 16분을 차지하는 롱테이크가 등장한다. 보비(마이클 패스벤더)가 도미니크 신부(리암 커닝햄)과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신인감독 스티브 맥퀸은 이 대화를 영상의 썸네일에 보이는 구도 그대로 가만히 바라만 본다. 아니, 경청한다. 눈앞에 놓인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기에 관객은 신부가 보비에게 단식을 그만두라고 설득하고, 보비는 제 신념을 관철하는 대화의 내용에 고스란히 집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간파했다. 맥퀸이 영화의 전통적인 형식에 비교적 자유로운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활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연출. 두 캐릭터를 연기한 패스벤더와 커닝햄은 한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하루에 10번 이상 연습을 거듭했다고.


러시아 방주

Русский ковчег

연출: 알렉산더 소쿠로프

촬영: 틸만 뷔트너

러시아 감독 알렉산더 소쿠로프의 <러시아 방주>는 영화 전체를 한 테이크로 찍었다. 여러 숏을 교묘한 편집을 통해 영화 전체가 한 테이크로 찍은 것처럼 보이게 만든 게 아니라, 정말 한 테이크로 찍은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로프>가 10분마다 필름을 교체해줘야 하는 촬영 속성 때문에 편집의 힘을 빌렸다면, <러시아 방주>는 2000년대 들어 보편화 되기 시작한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해 87분 이야기를 단 한 호흡으로 찍어낼 수 있었다. 한 남자가 자신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19세기 외교관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서 경험하는 시간여행을 그렸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박물관은 에르미타주에서 촬영된 <러시아 방주>는 박물관이 닫는 단 하루동안 찍을 수 있었다. 촬영에서 동원된 스탭 수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으나, 소문에 의하면 4500명이 넘는 인원이 에르미타주 현장에 모였다고 한다. 소쿠로프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지듯 등장해 박물관의 33개 방을 종횡무진하는 기나긴 이미지를 네 번째 테이크 만에 얻어낼 수 있었다.


씨네플레이 문동명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