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 스튜디오의 최신작 <닥터 스트레인지>는 공간이 뒤틀리는 화려한 비주얼과 베네딕트 컴버배치, 틸다 스윈튼, 레이첼 맥아담스 등 배우들의 호연이 유독 돋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케실리우스 역의 매즈 미켈슨의 존재에 대한 실망이 크게 남는다. 사실상 영화의 메인 빌런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맥없이 퇴장하기 때문이다. 맡는 캐릭터마다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배우였기에 더 안타깝다. 이런 아쉬움을 만회하고자,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은 매즈 미켈슨의 주요 작품과 캐릭터를 정리해봤다.


토니
<푸셔>
(Pusher, 1996)

<푸셔> / <푸셔 2>

20대 내내 무용수로 활약했던 매즈 미켈슨은 31세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 <푸셔>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인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스킨헤드의 마약거래상 토니는 친구 프랭크와 함께 시종 시시껄렁한 농담과 건들건들한 몸짓으로 코펜하겐을 배회한다. 영화는 마약거래가 어그러지면서 꼬여가는 프랭크의 삶에 초점을 맞춰 진행되지만, 옆에서 그의 파멸을 부추기게 되는 토니의 존재감은 가려지지 않는다. <드라이브>(2011)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데뷔작이기도 한 <푸셔>는 8년 후 토니를 주인공으로 한 속편 <푸셔 2>(2004)로 시리즈를 이어간다.


레니
<블리더>
(Bleeder,
1999)

미켈슨과 윈딩 레픈은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블리더>에서 재회한다. 포르노비디오 대여점 직원 레니는 숫기라곤 없는 남자다. 망나니짓을 일삼는 친구 레오와는 딴판. 여자 앞에서 특히 수줍음이 심한 그는 마음에 둔 레아에게 기껏 데이트 신청을 해놓고는 약속 장소 앞에서 도망이나 치는 지질함을 시전한다. (저렇게 잘생겨놓고는!) 레오에 집중하며 폭력과 비관을 퍼트리던 <블리더>는 결국 레니의 망설임을 순수로서 존중하면서 실낱같은 희망을 남겨둔다.


스벤
<정육점의 비밀>
(The Green Butchers, 2003)

<정육점의 비밀> 속 스벤의 비호감은 미켈슨의 미모로도 구제가 안 되는 변발에 그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왕따를 당한 스벤은 무식하고 뻣뻣한 태도로 도축업을 운영하는 남자다. 가게가 망해가던 차에 우연한 사고로 얻은(?) 인육으로 소시지를 만들어 대박을 맛본 그는, 난생 처음 경험하는 성공에 감격한 나머지 살인을 일삼는다. 살인과 성공이 이어지는 아이러니한 상황과 스벤의 쓰잘데기없는 진지함이 충돌하며 발생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블랙코미디에서 매즈 미켈슨은 유머러스한 연기의 재능 또한 유감 없이 증명했다.


트리스탄
<킹 아더>
(King Arthur, 2004)

덴마크를 대표하는 배우로 성장한 매즈 미켈슨은 <킹 아더>로 할리우드에 첫발을 내디뎠다. 트리스탄은 정찰을 전문으로 하면서 주인공 아더의 신임을 받는다.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은 그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동료들에게 감정 없는 살인병기로 통한다. 그의 살육은 국가나 동료를 구하기 위함이 아닌, 순전히 즐기기 위해서 자행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트리스탄의 캐릭터는 이후 그가 할리우드에서 도맡게 될 과묵하고 무표정한 남자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르 치프레
<007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 2006)

매즈 미켈슨은 <007 카지노 로얄>(2006)에 출연하면서 할리우드에서의 성공 가도를 이어나간다. 영화의 메인 악당인 르 치프레는, 시력을 잃어 감정이 읽히지 않는 왼쪽 눈과 모든 걸 간파하는 듯한 살기 어린 오른쪽 눈의 부조화를 이루며 냉혈한적인 면모를 증폭시킨다. 카지노 판에서 냉정을 유지하는 모습과 제임스 본드를 잔혹하게 고문하면서 미쳐 날뛰는 모습의 온도차가 영화를 압도한다. 매즈 미켈슨은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 시리즈가 선보인 악역 배우들 마티유 아말릭, 하비에르 바르뎀, 크리스토퍼 왈츠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였다.


원 아이
<발할라 라이징>
(Valhalla Rising, 2009)

<푸셔 2> 이후 5년 만에 니콜라스 윈딩 레픈과 다시 작업한 <발할라 라이징>. 정착할 영토를 찾는 종교 집단을 이끄는 애꾸눈의 무사 원아이가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땅을 떠도는 이야기다. 근육질을 자랑하는 미켈슨의 몸을 보자면 액션영화의 전개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간다. 현실의 폭력을 집중하던 윈딩 레픈의 기존 영화들과 달리 장황하고 난해한 종교적 질문들이 대자연 아래 펼쳐진다. 어쩌면 미켈슨이 출연한 모든 작품 중 가장 난해한 작품이다.


요한 프리드리히 스트루엔시
<로얄 어페어>
(A Royal Affair, 2012)

매즈 미켈슨이 활약하는 멜로는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연애와는 거리가 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과 칠흑같은 침묵에서 비롯되는 위험한 남자의 이미지 때문일까, 그는 줄곧 불륜의 주인공으로서 영화 속 인물들을 곤경에 빠트렸다. 절대왕정이 팽배하던 18세기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사극 <로얄 어페어> 속 요한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왕의 주치의로 궁에 들어온 독일인 의사 요한은 왕족의 신임을 사 정치까지 관여하게 되지만, 그만 캐롤라인 왕비와 불륜에 빠지게 된다. 도덕과 욕망 사이에서 고민하는 와중에도,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매즈 미켈슨의 섹시함이 더욱 도드라진다.


루카스
<더 헌트>
(The Hunt, 2012)

미켈슨이 할리우드 활동을 통해 점점 외연을 넓혀가는 점은 분명 반가운 것이었지만, 그의 이미지가 점점 과묵한 무사로 굳어져가는 과정은 어쩐지 달갑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는 와중 그는 덴마크의 시네아스트 토마스 빈터베르그의 <더 헌트>에 출연하면서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면모를 선보이면서 연기 스펙트럼을 보다 활짝 열어젖혔다. 소녀의 거짓말 때문에 하루 아침에 성범죄자의 누명을 쓰게 되는 유치원 교사 루카스를 통해 발현되는 매즈 미켈슨의 다채로운 얼굴은 경이롭다. 추문을 견뎌내야 하는 사내의 처지가 하나의 형용사로 한정지을 수 없는 복합적인 감정 표현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더 헌트>로 그는 2012년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면서 세계적인 명배우로 발돋움했다.


한니발 렉터
<한니발>
(Hannibal, 2013~15)

매즈 미켈슨의 커리어는 미국 드라마 <한니발>의 주인공 한니발 렉터를 연기하면서 더욱 단단해진다.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양들의 침묵>(1991)을 통해 보여준 금자탑에 가까운 선례에도 불구하고, 미켈슨은 전혀 다른 렉터 박사를 분하면서 홉킨스의 그림자를 가볍게 벗어던졌다. 그는 렉터의 악마 같은 면이 아닌 살인과 인육을 즐기는 극단적인 순수함에 초점을 맞춰 자기만의 한니발을 정립했다. 베일 듯이 정돈된 차림새를 하고 살해한 사람들을 요리해서 먹는 과정은 그 잔혹함이 무색하게도 아주 아름답다. 잔혹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한다는 설정은, 그간 미켈슨이 보여준 다중적인 캐릭터를 통해 절대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미하엘 콜하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
(Michael Kohlhaas, 2013)

고뇌하는 남자. 매즈 미켈슨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다. <미하엘 콜하스의 선택>은 실존 인물 미하엘 콜하스의 삶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다리 통행료를 둘러싼 마을의 새 남작과의 소송 끝에 아내를 잃고 공권력을 향한 봉기를 일으킨다. 사회에 대한 반기라니, 폭발할 듯한 분노가 대번에 느껴지는 이야기지만 미켈슨의 미하엘 콜하스는 폭발하는 대신 썩어 문드러져 가는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부조리를 보다 확실하게 설득한다. 지옥같은 시간을 지나 마지막 순간 미하엘 콜하스가 흘리는 눈물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