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전주국제영화제는 유례를 찾기 힘든 일정으로 치러진다. 영화제 홈페이지(www.jiff.or.kr)에는 2020년 5월 28일(목)부터 9월 20일(일)까지 무려 116일간 영화제가 개최된다고 나와 있다. 영화제에 한번도 안 가본 사람이라도 일정이 이상하다는 건 알 수 있다. 이런 독특한 개최 일정은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생겨났다. 코로나19의 확산 우려로 인해 전주영화제는 예년과 같이 열리지 못했다. 영화제 조직위와 집행위에서 선택한 대안은 이른바 무관객 영화제였다. OTT(Over the top) 플랫폼 웨이브(wavve)를 통한 온라인상영회에서 5월 28일부터 6월 6일까지 주요 초청작을 서비스한다. 9월 20일까지 예정된 장기상영회를 통해서는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들을 볼 수 있게 했다. 장기상영회는 전주디지털독립영화관 및 영화의거리 내 상영관에서 열린다.
그밖에 전주영화제는 주요 행사도 색다르게 치러졌다. 5월 28일에 열린 개막식은 비공개로 진행되고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6월 1일 CGV 전주고사 1관에서는 경쟁 부문을 포함한 각 부문별 수상작을 발표하는 시상식이 열렸다. 화려한 개막식과 폐막식이 없지만 전주영화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웨이브와 장기상영회를 통해 만나볼 수 있는 올해 전주영화제의 주요 수상작을 만나보자.
국제경쟁 대상 <습한 계절>
<습한 계절>은 중국 남부의 경제 도시 선전이 배경이다. 이 도시에 사는 젊은 네 남녀가 대기를 가득 메운 습기처럼 불통하며 얽히고설키는 관계를 보여준다. 영화의 중심에는 권태기에 접어든 커플 동과 주안이 있다. 동은 배우가 꿈이지만 지금은 오래된 테마파크에서 경비원으로 일한다. 주안은 꽃가게에서 꽃꽂이와 배달을 하며 지낸다. 이들에게 어느날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며 네 남녀가 등장한다. 국제경쟁 심사위원들은 총평을 통해 “중국 젊은 세대가 처한 문제의식을 화면 속에 담아내려는 시도가 돋보였다”고 평가했다. <습한 계절>은 시나리오 작가, 연출가,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가오밍 감독이 첫 번째 장편 다큐멘터리 <파이 구>(2006)에 이어 선보인 두 번째 장편이자 첫 번째 극영화다. 가오밍 감독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 “전 세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지금, 영화라는 밝은 빛이 우리 삶에 온기와 힘을 주고 있다. 머지않아 곧 전 세계의 영화관이 다시 열려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전주영화제와 심사위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한국경쟁 공동 대상 <갈매기>
<갈매기>는 여성이자 어머니에 관한 영화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오복(정애화)이 주인공이다. 그는 큰딸의 상견례 날 봉변을 당한다. 시장 동료이자 재개발 대책위원장 기택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오복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넘어가보려 했지만 이내 분노를 느끼고 큰딸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이후 그녀는 외로운 싸움을 해나간다. 기택은 증거를 대라고 하고 동료 상인들도 재개발 보상에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기택의 편에 선다. <갈매기>는 중년 여성의 미투를 다룬다는 점에서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에어컨 대신 선풍기를 트는 평범한 일상의 어머니의 모습도 담아냈다. 김미조 감독은 영화제 공식 온라인 데일리를 만든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시나리오를 준비하면서 ‘엄마에게는 권리가 없다. 자식의 아픔보다 자신의 아픔을 보듬을 권리, 밥을 차려주지 않을 권리’라는 글귀를 읽었는데 많이 와 닿았다. 오복의 아픔을 보듬을 권리가 자식의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상황과 맞물리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배우 정애화가 오복을 인상 깊게 연기했다.
한국경쟁 공동 대상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의 신동민 감독은 캐스팅이 독특하다. 감독은 자신의 어머니를 출연시켰다. 이유는 이 영화가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어머니가 출연했으니 다큐멘터리라고 해야 할까. 재밌는 건 3부로 구성된 영화에서 2부에서만 전문 배우 노윤정이 연기를 한다. 나머지 1부, 3부에서 감독의 어머니가 출연한다. 신동민 감독은 “어머니 역 배우가 바뀌는 것이 영화적 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역을 두고 배우가 바뀌고 1부와 2부의 배우들이 3부에서 다시 만나는 게 우리가 사는 모습과 비슷하다고도 생각한다”고 밝혔다. 어떻게 보면 감독의 이런 캐스팅과 연출 의도는 영화적 실험이거나 도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람아 안개를 걷어가다오>는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한국단편경쟁 대상 <우주의 끝>
<우주의 끝>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여성의 귀갓길을 따라가는 애니메이션이다. 구성은 단순하다. 시한부 진단을 받은 나는 의사인 친구가 “애들한테 뭐하고 할 거야?”라는 질문을 받고 “걸어라, 어차피 세상에서 배울 게 더 많으니까”라는 말을 떠올린다. 그렇게 나는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제시한 삶에 대한 대답을 듣는다. 그렇게 <우주의 끝>은 죽음과 삶의 사이, 지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귀엽고 화사한 파스텔 톤의 작화는 묵직한 주제와는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곳곳에 웃음도 배치해뒀다. 이 대비를 통해 <우주의 끝>은 탁월한 균형감을 선보인다. 단순한 구성 속에 삶과 죽음에 대한 메시지를 넉넉히 품은 작품이다.
위에서 소개하지 못한 주요 수상작으로 국제경쟁 작품상(NH농협 후원)에 아르헨티나의 클리리사 나바스 감독이 만든 <천 명 중의 단 한 사람>, 심사위원특별상에 루이스 로페스 카라스코 감독의 <그해 우리가 발견한 것>, 심사위원 특별언급에 마리암 투자니 감독의 <아담>의 두 배우, 루브나 아자발과 니스린 에라디 등이 있다.
지난해에 신설한 배우상은 배종대 감독의 <빛과 철> 염혜란 배우, 이태겸 감독의 <파견;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오정세 배우에게 돌아갔다. CGV아트하우스상에는 한국경쟁작인 임승현 감독의 <홈리스>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한국 단편경쟁 부문에서는 방성준 감독의 <뒤로 걷기>가 감독상(교보생명 후원)을, 강정인 감독의 <각자의 입장>과 유준민 감독의 <유통기한>이 심사위원특별상을 공동 수상했으며 조민재, 이나연 감독이 공동연출한 <실>은 특별 언급됐다.
비경쟁부문 상영작 가운데 아시아영화 1편을 선정해 아시아영화진흥기구(NETPAC)에서 시상하는 넷팩상은 푸시펜드라 싱 감독의 <양치기 여성과 일곱 노래>가 수상했다. 코리안시네마와 한국경쟁작 중 다큐멘터리 작품을 대상으로 시상하는 다큐멘터리상(진모터스 후원)은 박문칠 감독의 <보드랍게>가 차지했다.
씨네플레이 신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