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일본판 영화 포스터입니다. 영화의 분위기를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 같네요.

세월의 흐름이 꼭 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이 아니고(당장 요새 나라꼴을 봐도...)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꼭 정신적인 미성숙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정신적인 성장은 곡선이 아니라 계단 같은 형식을 이룬다고들 하지만 그 역시 위에서 바라다보는 그런 느낌의 말일 뿐, 한 인격체의 성장은 그 누구에게든 아픔을 동반한다. 그냥 대체적으로 나이 먹은 자는 경험이 더 많을 가능성이 클 뿐이고, 그런 면에서 조금 더 둔감할 수 있다는 것뿐이다.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원제: Lost in Translation)는 그런 면에서 사람의 빈 곳을 이야기한다. 누구나 갖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내 가슴 속 작은 빈 공간, 이런 공간들은 내가 평소와 다른 환경 속을 걷고 있을 때 보통 더 잘 드러나곤 하고, 그런 식으로 사람은 익숙하지 않은 공간 속을 부유할 때 바뀌곤 한다. 이 영화도 그렇다. 외로움을 안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혹은 일 때문에 타지로 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낯선 공간 속에서 마치 물 위의 기름방울처럼 떠다니면서 느끼는 그런 까끌거리는 감정들을 이 영화는 표현해낸다.
 
산토리 위스키 광고 촬영을 위해 일본에 입국한 밥 해리스는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 일하는 내내 통역 문제로 제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고, 이런 저런 일본의 문화들은 너무 생경해 어색하기만 하고, 밥의 부인은 일하러 일본까지 날아간 남편에게 시차는 생각지도 않고 집안 가구와 카펫을 결정해달라며 시시때때로 전화에 팩스에 심지어 FeDEX까지 보내고 거기다, 뭐든 좋다는 밥의 대답에 "그거 하나 결정 못하냐"라는 핀잔까지 한다. 그걸 굳이나 외국에 나간 남편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누구더라. 심지어 출장간 남편에게 없으니까 익숙해진다는 말까지 한다. 그야말로 무신경의 극치인 셈인데, 나는 이 지점에서 그를 크게 동정했다.

밥이 촬영한 위스키 광고의 광고판

덕분에 밥은 일본에 체류하는 내내 불면증에 시달리고, 일본에 체류하는 내내 밤마다 호텔 바에 들러 위스키를 마신다. 이렇게 마시는 술이 건강에 좋을 리는 없겠지만, 같은 술꾼 입장에서 세상 모든 것이 답답하고 짜증을 유발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그런 짜증을 풀 수 없을 때 그런 자신을 위로할 수단이 위스키밖에 없다는 걸 나는 이해하고 공감한다.
 
여자 주인공인 샬롯도 마찬가지. 결혼한지 2년밖에 안된 어린 신부인 샬롯은 남편의 일 때문에 일본에 같이 왔지만 남편의 무신경함에 계속 마음을 다치다 심지어 남편이 바람을 피운 증거까지 목격하게 된다. 타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의 크기는 점점 커져가기만 하고 마음은 점점 지쳐간다. 그런 두 사람이 여행과 출장이라는 비일상 속에서 술 한잔을 매개로 외로움을 더 비일상적인 대화로 잠깐 덮어나가게 되는 과정을 이 영화는 담담하게 그려낸다.
 
영화에서 광고 아이템으로 등장하는 히비키 위스키는 일본의 거대 주류기업인 산토리에서 생산되는 위스키이다. 블렌디드 위스키인 히비키 이외에도 야마자키, 하쿠슈 등의 좋은 위스키들이 이 회사에서 생산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영화에서 왜 굳이 히비키를 매개로 사용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히비키 특유의 고급스러운 부드러움이 가슴 속 빈 공간을 이 영화처럼 부드럽게 채워준다. 야마자키는 좀 더 곧은 느낌이고 하쿠슈는 왠지 좀 더 어리고 싱그러운 느낌이라서 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히비키가 제격이다.

숙성년도는 다르지만 영화에 나온 산토리 히비키 위스키입니다. 최근 가격이 너무 많이 올라서 아쉽네요.

참고로 산토리라는 회사는 자체적으로도 일본 내에 증류소를 여럿 갖고 있어 야마자키, 히비키, 하쿠슈, 가쿠 등의 여러 위스키를 직접 생산하며 Premium Malts라는 브랜드의 맥주와 다른 종류의 여러 술들도 만들고 있다. 해외에 Beam. Inc라는 거대 주류회사도 보유하고 있는데 이 회사 소유의 여러 증류소에서 짐빔, 메이커스마크, 베이커스, 올드 오버홀트, 라프로익, 보우모어, 아드모어, 티쳐스, 사우자, 쿠르부아지에, 론리코 등의 다종다양한 술들을 생산한다.

나이가 들면 사는 것이 좀 더 편해지느냐고 묻는 샬롯에게 밥은 사는 건 편해지지 않지만 주변 상황에 자신이 좀 덜 흔들리게 된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런 저런 경험 속에 말랑말랑했던 마음의 껍질이 단단해져서가 아닐까. 나이 든다고 사는 것이 편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좀 더 힘든 티를 덜 내게 될 뿐이다. 힘든 티를 내어봤자 사회라는 정글 속에서 약해지고 늙은 짐승은 잘해야 비웃음거리가 되고 잘못하면 잡아먹힐 뿐이라는 걸 중년의 사내들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실제 술을 마시는 모습이 광고처럼 멋지진 않죠. 그게 사는거죠. ^^

샬롯이 밥에게 이런 저런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묻는 장면을 보며, 이런 대화를 통해 치유받은 건 오히려 샬롯이 아니라 밥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구든 삶이 진행될수록 마음의 껍질은 두꺼워지고, 그 속의 마음은 통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다가 메말라 사라지곤 한다. 주위에 있는 동료와 마음의 통로를 만들다 다치고, 심지어 가족과 통로를 만들다 다치고, 그렇게 서로를 본의 아니게, 혹은 일부러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면서 웅크리게 되는 모습들, 그 빈 공간을 채워주는 술과 대화들을 사람들은 그리워하게 된다. 그런 공감대를 잘 이끌어냈기에 아카데미 각본상까지 받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든 굳이 누군가와 억지로 대화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뭣보다 타인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서로가 그런 존재가 아니라면, 잠시라도 서로 마음 편한 거리를 유지하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위스키 한잔이 윤활유가 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술의 존재가치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데렉 / 술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