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슈마허 감독

조엘 슈마허 감독이 지난 6월 22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암 투병 중이었다. 패션 업계에 뛰어들어 활동하다가 TV 광고미술 분야와 영화 의상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고, 각본가를 거쳐 감독 크레딧까지 거머쥔 그는 8∼90년대 상업적인 성공까지 이뤄내며 자신의 능력을 다방면에서 입증해냈다. 스타일리시하고 세련된 영상에, 대중적인 호흡, 리드미컬한 색채감 등 패션 감각이 투영된 영상언어로 적지 않은 나이(첫 번째 극영화 연출할 때가 42살이었다!)에 데뷔해 할리우드에서 오랜 기간을 버텼다. 청춘물과 호러, 코미디와 법정물,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와 스릴러, 액션,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고른 수준의 작품들을 지난 30년간 꾸준히 작업했으며, 젊은 배우들의 가능성을 발견해냈다.

조엘 슈마허 감독

무엇보다 그는 음악을 굉장히 잘 활용했던 감독으로,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오페라의 유령>을 찍기 한참 전인 70년대 아이린 카라가 주연한 뮤지컬 <스파클>과 다이애나 로스가 나온 흑인 버전 ‘오즈의 마법사’인 <마법사>의 각본을 쓰기도 했다. <열정>과 <로스트 보이>는 80년대 전형적인 사운드트랙의 모범 답안과도 같았고, 색소포니스트 케니 G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사랑을 위하여>와 90년대 음악신의 총집결과도 같았던 두 편의 배트맨 <배트맨 포에버>와 <배트맨과 로빈> 사운드트랙으로 빌보드 차트를 호령하며 가장 상업적이면서도 화려한 음악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당대 가장 개성 있고 역량 있는 신인 작곡가들과 작업하는데 거리낌 없었고, 영화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 연출을 맡기도 했던 그는 스타일리스트 이전에 뛰어난 휴머니스트였다.

조엘 슈마허가 연출했던 대표적인 영화들의 사운드트랙들에 대해 소개해본다.


<열정> St. Elmo's Fire (1985)

음악 : 데이빗 포스터

80년대 청춘물들을 주름 잡았던 브랫팩 사단이 총출동하는 작품으로, 사회에 갓 진출한 20대 청춘들의 사랑과 우정, 좌절과 실패 그리고 희망을 설파했던 작품이다. 영화는 앞선 <아웃사이더>나 <조찬 클럽>만큼의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사운드트랙만큼은 두 작품과 대등한, 아니 오히려 이를 넘는 성과를 남겼다. 그래미상을 16번이나 수상한 팝계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데이빗 포스터가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에 도전한 작품으로, 한 달 반뿐이 작업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급하게 완성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멜로디의 스코어와 탁월한 프로듀싱 능력을 들려준다.

<열정>

존 파가 데이빗 포스터와 함께 하루 만에 작업했다고 알려진 동명의 주제곡 ‘St. Elmo's Fire’는 2주간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며 두고두고 리퀘스트 되는 영화음악이 되었고, 아울러 러브 테마는 연주곡임에도 15위까지 오르며 데이빗 포스터의 영화음악을 상징하는 곡으로 남았다. 지금은 영화보다 이들 두 곡이 더 긴 생명력을 얻었다고 할 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빌리 스콰이어나 존 앤더슨, 비키 모스, 피 웨이빌 등 80년대 추억의 AOR(Album Oriented Rock)계에서 활약했던 가수들의 목소리도 듣는 건 덤이다.


<로스트 보이> The Lost Boys (1987)

음악 : 토머스 뉴먼

역시 브랫팩을 데려와 청춘물에 코미디와 뱀파이어 호러를 믹스시킨 재기 발랄한 <로스트 보이>는 흥행에 성공하며 조엘 슈마허의 이름을 본격적으로 대중과 제작사들에게 각인시켰다. 가족 해체를 흡혈귀 집단에 대입해 80년대식 상업영화 공식을 따랐음에도 이 영화가 낡지 않고 지속적으로 언급되는 건, 섹시한 젊음의 에너지를 간직한 배우들의 싱그러움과 메탈풍의 의상, 적재적소에 등장하는 음악의 힘이 컸다. 당시 패셔너블한 십 대 취향에 걸맞게 고스(Goth)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음산한 팝과 파워풀한 락 그리고 80년대식으로 컨버전한 리메이크 곡들이 균형을 맞추며 인상적인 존재감을 뽐낸다.

<로스트 보이>

도어즈의 명곡 'People Are Strange’를 탁월하게 소화한 에코 앤 더 버니맨과 엘튼 존의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더 후의 리드 보컬 로저 달트리가 커버한 버전은 거부하기 어렵고, 주제가라 할 수 있는 제랄드 맥마혼의 ‘Cry Little Sister’과 루 그램이 부르는 ‘Lost in the Shadows’의 음산함이나 인엑시스와 지미 번즈의 활력, 포텐 터지기 전 풋풋하던 토마스 뉴먼의 놀이동산 풍 키치적인 스코어가 만들어내는 매력은 가히 일품이다.


사랑을 위하여 Dying Young (1991)

음악 : 제임스 뉴턴 하워드

<유혹의 선>으로 호흡을 맞춘 줄리아 로버츠와 조엘 슈마허가 두 번째로 함께 한 작품은 불치병 신파 로맨스 <사랑을 위하여>다. <귀여운 여인>을 시작으로 연타석 히트를 친 그녀의 흥행불패 신화를 이어나간 작품으로, 섬세한 감정 연기와 잔잔하지만 정공법적인 연출 그리고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음악이 어우러져 눈물샘을 자극하며 깊은 감동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언급하며 색소포니스트 케니 G의 존재감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가 참여한 4곡은 모두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그 감흥을 더했다. 이 영화 전에도 북미에서만 5백만을 팔아치운 괴력의 연주자였지만, 이 영화와 바로 다음 해 나온 “Breathless” 앨범의 대성공으로 전 지구적인 인지도와 7500만 장이 넘는 넘사벽의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사랑을 위하여>

케니 G

음악을 맡은 제임스 뉴턴 하워드와 조엘 슈마허는 전작 <유혹의 선>과 차기작 <폴링 다운>을 함께 했는데, 모두 좋은 스코어가 갖는 위력을 보여준 작품들이었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여리면서도 강함을 내포한 소프라노 색소폰의 음색을 생의 의지와 절절한 사랑에 빗대 탁월한 멜로디로 풀어낸 제임스 뉴턴 하워드의 선율은 그가 왜 현재 할리우드 최고의 마에스트로가 되었는지 증명해낸다.


배트맨 포에버 Batman Forever (1995) / 배트맨과 로빈 Batman & Robin (1997)

음악 : 엘리웃 골든탈

비평적으론 성공했지만 너무나도 암울한 배트맨 속편을 만들어내 스튜디오 간부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든 팀 버튼을 해고하고 조엘 슈마허가 그 뒤를 이었다. 밝고 가족 지향적인 히어로 영화를 추구한 제작사의 방향에 따라 슈마허는 딕 스프랭 시절의 만화 톤과 1960년대 TV 시리즈에서 영감을 얻은 분위기를 도입해 감각적이고 유머러스한 시리즈로 재창조했다. 하지만 많은 사공의 개입과 기존의 팀 버튼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과 너무나 판이한 톤의 객차로 시리즈는 결국 네 번째 작품을 끝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지금도 이견이 분분한 조엘 슈마허의 배트맨 영화들이지만, 바그너를 연상케 하는 대니 엘프만의 환상적인 테마에서 벗어나 현대음악가이기도 한 엘리웃 골든탈이 맡은 전위적이고 고딕적이며 모던한 스코어와 당대 최고의 팝 아티스트들을 대동한 엄청난 물량공세의 컴필레이션 사운드트랙만큼은 대체로 탁월하고 우수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다.

<배트맨 포에버>

사운드트랙 중 영화에 삽입된 건 달랑 다섯 곡뿐이 되지 않지만, U2와 씰, 브랜디, 오프스프링, 메시브 어택, 닉 케이브, 메소드 맨, 피제이 하비, 인엑시스의 보컬 마이클 허친스, 플레이밍 립스, 에디 리더 등의 환상적인 라인업을 자랑하는 <배트맨 포에버>의 사운드트랙은 프린스가 발표했던 <배트맨> 사운드트랙만큼 팔리며 더블 플래티넘을 기록했다.

<배트맨과 로빈>

망작이란 평가를 들으며 크리스토퍼 놀란이 부활시키기 전까지 관 뚜껑에 못질을 했던 후속작 <배트맨과 로빈> 사운드트랙도 스매싱 펌킨스를 필두로 R.E.M., 구구돌스, 언더월드, 쥬얼, 본 석스 앤 하모니, 몰로코, 로렌 크리스티 그리고 끔찍한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감방에 간 R.켈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락과 힙합, R&B와 일렉트릭, 댄스 등 온갖 아티스트들 끌어들여 역시나 플래티넘을 기록한 사운드트랙이 되었다. 다만 너무 많은 스타들로 정신없던 영화처럼 사운드트랙 역시 중구난방 통일성이 느껴지지 않는 단점이 있다.


오페라의 유령 The Phantom of the Opera (2004)

음악 : 앤드류 로이드 웨버

너무나도 유명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1989년부터 영화화가 추진되었던 작품이다. 하지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이혼과 조엘 슈마허의 바쁜 스케줄로 인해 결국 제작은 2002년에야 들어가게 되었다. 수많은 A급 감독 후보들이 있었지만, 웨버는 <로스트 보이>에서 음악을 탁월하게 구사한 슈마허의 연출력에 감복하여 영화판 연출을 의뢰했다. 두 편의 배트맨 프랜차이즈의 실패 이후 주춤했던 슈마허를 상업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재기시켜준 작품이기도 하다.

<오페라의 유령>

원작의 매력을 뛰어넘는 카리스마와 독창성을 갖진 못했지만, 에미 로섬과 제라드 버틀러, 패트릭 윌슨 등 배우들이 소화한 노래들과 영화만의 화려한 미술은 선방했다는 평가를 들었다. 대체적으로 영화판은 ‘Think of Me’, ‘Angel of Music’, ‘The Music of the Night’, ‘All I Ask of You’ 등 뮤지컬의 레퍼토리를 충실하게 따라가는데, 이번 영화판을 위해 기존에 작곡했지만 사용되지 않았던 ‘No One Would Listen’의 곡을 찰스 하트와 재활용해 ‘Learn to Be Lonely’라는 신곡으로 엔드 크레딧에 선보였다. 이 곡은 골든 글로브와 오스카 주제가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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