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일라잇>

신인 때 ‘발연기’ 소리를 듣던 스타가 배우로 성장해 가는 모습이 낯선 건 아니지만, 로버트 패틴슨의 성장 속도와 방향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지난 몇 년간 로버트 패틴슨의 행보는 자신에게 열광적인 팬덤을 안긴 <트와일라잇> 시리즈로부터 거의 도망치다시피 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다.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찍을 때도 저예산 영화 쪽을 기웃거리며 거대 프랜차이즈 안에 갇히고 싶지 않다는 무언의 신호를 지속적으로 보냈던 그는, 자신이 쌓아 올린 꽃미남 뱀파이어 이미지를 인버전(시간 흐름을 뒤집는 <테넷> 속 기술), 즉 초기화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처럼 쉽고 편리한 고속도로에서 뛰어내려 자갈밭으로 달려 나갔다.

혹자는 이런 그의 행보를 <타이타닉> 후 작가주의 영화로 눈을 돌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나 스타의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간 조니 뎁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아뿔싸, 로버트 패틴슨과 그들 사이엔 ‘연기 내공’의 큰 간극이 있다. 변화를 향한 의지에 팬들의 응원이 따랐던 디카프리오나 조니 뎁과 달리, 패틴슨의 걸음걸음에 편견과 우려가 깃든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라고 했던가. 판박이 스타가 되지 않으려는 패틴슨의 의지는 할리우드 스타 산업의 구속으로부터 그를 꺼내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게 했다. 이건 스스로를 구한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

로버트 패틴슨은 1986년 영국 런던의 근교인 반스(Barnes)에서 태어났다. 모델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어머니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모델 활동을 시작했고, 동네 아마추어 극단에 들어간 후 연기에 대한 열정을 품었다. TV 영화 <니벨룽의 반지>가 그의 데뷔작. 리즈 위더스푼 주연의 <베니티 페어>로 은막에 첫 진입 했지만 편집에서 잘려 나가며 인생의 쓴맛을 봤다. 그러나 기회는 빨리 왔다. <해리포터와 불의 잔>의 ‘세드릭 디고리’ 역을 맡으며 십 대 소녀들에게 매력 어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만난 <트와일라잇>은 흡혈귀처럼 그의 목덜미를 물어 그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던 지점으로 패틴슨을 올려놓았다.

설마 아직도 <트와일라잇> 시리즈를 뱀파이어 장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무늬만 그럴 뿐 속뼈대는 명백히 하이틴 로맨스였다. 십 대 소녀들이 바라마지 않는 연애에 대한 총체적인 백일몽이기도 했다. 빛을 받으면 다이아몬드 광채를 발하는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에드워드 컬런’을 연기한 로버트 패티슨은 사랑하는 이를 절대 배반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마성의 심성과 “내 여자의 순결은 내가 지키겠다”는 기지를 뿜어내며 여성들의 판타지를 자극했다. <트와일라잇> 사가가 이어진 5년의 여정 동안, 팬덤도 막강해졌다. ‘트와이하드(Twi-Hard)’라는 거대 팬덤은 영화를 찍으면 실제 연인관계로 발전한 로버트 패틴슨과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관계에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관심을 보였고, 언론은 그런 그들의 사생활을 일일 중계하며 뒷주머니를 챙겼다. 패틴슨은 세간의 과도한 관심을 불편해했다. ‘연기 외의 모든’ 걸 손에 쥔 자기 자신을 마땅찮게 여기는 듯 보이기도 했다.

대중이 크리스틴 스튜어트와의 이별, 새로운 연인 FKA 트위그스와의 약혼-파혼 여부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이, 그는 캐릭터 경중을 따지지 않는 선택과 독립/예술 영화로의 침투로 자신의 활동반경을 넓혀나갔다. 그리고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를 통해 커리어의 돌파구를 찾는다. 하이틴 스타와 거장 감독의 만남은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메뉴였다. 크로넨버그가 도대체 왜? 확인되지 않은 여러 이야기가 풍문처럼 풍문으로 돌았다.

<코스모폴리스>

그러거나 말거나, 로버트 패틴슨은 크로넨버그와 함께한 <코스모폴리스>를 통해 ‘연기도’ 할 줄 안다는 걸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인다. <트와일라잇>에서 뱀파이어 캐릭터를 위해 희멀건 분칠을 뒤집어썼던 패틴슨은 ‘창백한 얼굴’이란 게 무엇인지를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보여준 것이다. 특히 패틴슨이 연기한 젊은 부호 ‘에릭 패커’는 자본주의적 삶의 봉우리에 위치하고도 한순간에 모든 걸 잃을 수 있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인물인데, 이른 나이에 자본주의의 맛을 제대로 본 패틴슨의 삶과 겹치며 극 안팎으로 흥미를 더했다. 이후 로버트 패틴슨은 크로넨버그와 <맵 투 더 스타>로 다시 뭉쳤고, <코스모폴리스>에 이어 또 한 번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섰다.

<굿타임>

크로넨버그와의 협업을 거치며 한층 탄탄하게 단련된 그에게 <굿타임>은 스타가 아닌 배우로 불리고 싶은 오랜 도전이 확실하게 인정받는 시간이었다. <굿타임>에서 그는 불운으로 연신 미끄러지는 ‘운수 없는 남자’ 코니를 맡아 전에 보여 준 적 없는 얼굴 근육을 그려냈다. 달궈진 프라이팬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초조함과 불안을 껴안은 패틴슨은 그 자체로 영화의 분위기였다. 이 배우가 이랬단 말인가. ‘청춘스타’에서 ‘위태롭게 질주하는 인간’으로 옮아가는 순간, 영화광들이 손을 흔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중엔 크리스토퍼 놀란과 맷 리브스가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굿타임>과 <잃어버린 도시 Z>를 보고 로버트 패틴슨을 <테넷>에 기용했다. 맷 리브스는 9대 배트맨 슈트를 그에게 안겼다. 뱀파이어가 배트맨이 된 것이다.

<테넷>

<테넷>에 대해서는 그 어떤 이야기를 하든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짧게 언급하면, 당신이 로버트 패틴슨에 대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었든 이 영화를 보면 그에 대해 재정의하게 되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배트맨. 로버트 패틴슨이 ‘젊은 브루스 웨인’ 역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에 여러 우려의 목소리가 전 세계에서 흘러나온 건 전혀 놀랍지 않다. 그땐 <테넷>이 공개되기 전이었으며, <굿타임>을 관람하지 않은 이들에게 팬틴슨은 여전히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 컬렌이었을 테니 말이다.

<더 배트맨>

그러나 맷 리브스에 의해 패틴슨의 카메라 테스트 영상이 공개되고, 최근 <더 배트맨> 예고편까지 모습을 드러내면서 반대의 목소리는 일단 조금 잦아지는 모습이다. 패틴슨 특유의 사각 턱이야 원래 배트맨과 맞닿아 있었고, 운동으로 단련 중인 듯 보이는 역삼각형의 실루엣은 ‘패틴슨이 배트맨을 하기엔 몸이 너무 작다’는 야유를 돌려놓는다. 아직 예고편만으로 판단하기엔 이르지만, 어둠을 먹고 선 로버트 패틴슨의 아우라는 그가 뱀파이어 허물을 진짜 벗어 던졌음을 알리는 신호가 될 수 있음을 예감하게 한다.

<더 배트맨>

로버트 패틴슨은 과거 엘르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요절한 비운의 아티스트 ‘에이미 와인 하우스’를 다룬 다큐멘터리 <에이미>에서 ‘토니 베넷’이 한 이야기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재즈 거장 토니 베넷은 이렇게 말했다. “(에이미가) 살아있다면 이런 말을 했겠죠. 서두르지 마, 넌 너무 귀한 존재야. 세월이 쌓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된다”라고. 미디어가 규정한 이미지 안에서 오해받고, 파파라치의 먹잇감이 됐던 에이미를 향한 토니 베넷의 말에 로버트 패틴슨이 멈춰선 이유를 얼핏 알 것 같다. 미디어와 대중이 원하는 삶에 포획당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향해 부단히 달려온 그의 삶의 이를 가늠하게 한다.


정시우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