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18번째 장편영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은 '홍상수 월드'의 새로운 얼굴인 김주혁과 이유영이 출연한다. 애인을 멋대로 판단한 걸 후회하며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영수 역의 김주혁도 좋지만, 영수의 애인인 민정을 포함해 그녀와 닮은 수많은 여자들을 연기한 이유영의 해사함이 유독 돋보인다.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부터 이제 막 개봉한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까지,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들도 상당하다. 18개 장편, 2개 단편 총 20편의 홍상수의 영화에 2번 이상 출연한 여자 배우들을 정리했다.


정유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유신
<첩첩산중>의 미숙
<옥희의 영화>의 옥희
<다른나라에서>의 원주
<리스트>의 여자
<우리 선희>의 선희

<옥희의 영화> / <다른나라에서> / <우리 선희>

홍상수 영화에 가장 많이 등장한 배우는 바로 정유미다. 단편 <첩첩산중>, <리스트>까지 모두 6편. 2008년 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부터 2013년 <우리 선희>까지 거의 해마다 한 편씩 홍상수 감독과 작업한 셈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는 상용(공형진)의 부인 유신 역으로 비교적 비중은 작았지만, 현실과 경남(김태우)의 야릇한 꿈에 등장하면서 짙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부터는 주로 주연으로 활약했다. 홍상수의 필모그래피가 남자 캐릭터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몇 안 되는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들을 이끌어갔다. <옥희의 영화>(2010)의 옥희와 <우리 선희>(2013)의 선희는 모두 영화를 전공하는 대학생이고, 같은 패딩점퍼를 입고 나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윤여정
 
<하하하>의 문경 모
<다른나라에서>의 박숙
<리스트>의 엄마
<자유의 언덕>의 구옥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덕수

<다른나라에서> / <자유의 언덕>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윤여정은 2009년 작 <하하하>로 홍상수의 작품 세계로 입성했다. 8년 만에 통영을 찾은 문경(김상경)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이들의 '엄마'를 자처하는 캐릭터다. 임상수 감독 영화에서 주로 '누군가의 어머니'보다는 자기 욕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개인'을 선보였다면, 홍상수 영화에서는 대부분 주인공의 어머니를 주로 연기했다. <하하하>와 <다른나라에서>는 여러 인물들과 관계를 맺었던 데 반해, 근작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는 오로지 (전화 잔소리와) 집 앞에서 딸 희정(김민희)을 마중 나오는 역할만 맡았다.


예지원
 
<생활의 발견>의 명숙
  <하하하>의 연주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연주
<우리 선희>의 주현

<생활의 발견> / <하하하> /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예지원은 이번 글에서 소개하는 배우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홍상수 감독과 연을 이어왔다. 처음 작업한 2002년 <생활의 발견>에서는 경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어지간히 노력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명숙을 연기했다. 뒷모습으로 등장해 뒷모습으로 퇴장하는 명숙은 홍상수 영화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여자다. 연은 7년 후 <하하하>로 이어졌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유부남 중식(유준상)이 정말정말 사랑하는 '천사새끼' 연주 역이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2)의 연주는 <하하하>와 마찬가지로 유준상이 연기한 중식의 애인이라는 점에서 동일인물처럼 보인다. <우리 선희>에서는 주인공들의 단골 술집 주현 역으로, 옆모습으로만 등장한다. 


문소리
 
<하하하>의 성옥
<다른나라에서>의 금희
<자유의 언덕>의 영선

<하하하> / <다른나라에서> / <자유의 언덕>

문소리는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경남(김태우)이 통화하는 여자의 목소리로 홍상수 영화에 처음 들어왔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작품 <하하하>에서 관광해설가 성옥을 연기했다. 열변을 토하며 관광지를 설명하는 성옥은, 통영의 시인 정호(김강우)를 좋아하는 한편 자신을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는 문경(김상경)에게 곁을 내어주기도 한다. 자기를 호텔로 부른 문경에게 화가 난 나머지 길가에 풀을 뽑아오는 귀여운 여자다. 실제로 출산을 2주 앞둔 만삭인 상태에서 촬영한 <다른나라에서>에서는 안느(이자벨 위페르)에게 한눈 파는 남편(권해효)을 휘어잡는 금희를 연기했다. <자유의 언덕> 속 모리(카세 료)와 연인처럼 지내는 카페 주인 영선 역시 홍상수 영화 속 문소리 특유의 천진함이 빛을 발한다. 세 영화 모두 묘하게 사투리가 섞여 독특한 억양이 돋보이는 문소리의 발성이 아주 잘 살아 있다.


고현정
 
<해변의 여인>의 문숙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고순
<북촌방향>의 영화팬

<해변의 여인> / <잘 알지도 못하면서> / <북촌방향>

결혼 이후 연예계를 떠났던 고현정은 10년 만에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2006)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불과 며칠 전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갖는 중래(김승우)에게 분노를 토하는 연기가 압권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 제주도의 따뜻한 햇살이 잘 어울리는 고순은, 아주 잠시 연애하다가 도망친 경남(김태우)이 지근지근하게 굴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러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하는 건강한 여자다. <북촌방향>(2011)에서는 마지막 신에 등장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의 사진을 찍어준다.


송선미
 
<해변의 여인>의 선희
<북촌방향>의 보라

<해변의 여인> / <북촌방향>

<해변의 여인>의 송선미는 중래(김승우)가 신두리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 여자 선희로 분했다. 중래와 해변을 걸으면서 "사랑해요~~"라고 외치던 그녀는, 잠시 후 중래에게 시비거는 식당 직원에게 대뜸 쌍욕을 뱉으면서 그를 제압한다. 홍상수 영화와 철썩같이 어울리던 송선미는 아쉽게도 5년 뒤 <북촌방향>까지 두 작품에만 출연했다.


엄지원
 
<극장전>의 영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현희

<극장전> /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지원 역시 홍상수 감독과 두 작품을 함께 했다. <극장전>(2005)에서는 얼마 전 수능을 본 고교생 영실과 인기 배우 영실 1인2역을 소화했다. 엄지원의 호연은, 영화 속 영화와 그 바깥의 이야기를 가로지는 영화의 독특한 구조를 가능케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의 영화제 프로그래머 공현희는 영화제를 찾은 감독 경남(김태우)에게 (그 이름처럼) 공연히 빽 분노를 표출한다. 영실과 현희는 엄지원의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가장 돋보이는 캐릭터였다. 


정은채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의 해원
<자유의 언덕>의 남희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 <자유의 언덕>

정은채는 홍상수 감독의 14번째 장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출연하면서 단숨에 주목 받았다. 이민 가는 엄마(故 김자옥)를 떠나 보내고, 남몰래 연애하고 있는 학교 선생 성준(이선균)과 어정쩡한 관계를 이어가는 해원의 불안과 슬픔이 정은채의 짙은 얼굴에 서려 있다. <자유의 언덕>에서는 모리(카세 료)의 숙소에 묵는 손님 남희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그녀는 괜히 치근덕대는 상원(김의성)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숙소를 떠난다.


씨네플레이 에디터 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