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 뭐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10월 달력 뒤에 남은 페이지라곤 고작 2장이 전부인, 지금 같은 시기엔 특히 연례행사 같은 회의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큰 걱정은 말자. 인생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은 불안함에 사로잡힌 건 영화 속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가끔씩은 방황해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영화 속 캐릭터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성큼 다가온 추위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면, 이번 주말 이들의 사연을 보고 들으며 위로를 얻어 가도 좋겠다.


어웨이 위 고(2010)

감독 샘 멘데스 출연 존 크래신스키, 마야 루돌프 장르 코미디, 드라마, 멜로/로맨스

서른셋 버트(존 크래신스키)와 베로나(마야 루돌프)는 첫아이를 맞을 준비로 들떠있는 오랜 연인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불안으로 바뀐 건 버트의 부모님이 2년간 해외에서 살기로 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하고서부터. 가족, 친구 등 연고가 있는 곳에서 삶의 터전을 꾸리길 원했던 버트와 베로나는 곧 태어날 아이와 함께 살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지인들이 살고 있는 곳을 방문해보기로 한다. 콜로라도에서 캐나다 몬트리올을 거쳐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까지 북미 대륙 곳곳을 오가는 여정. 사는 지역만큼이나 다른 개성을 지닌 다양한 인간 군상을 거치며 버트와 베로나는 짊어지고 있었던 고민에 대한 해답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음을 깨닫는다.

<어웨이 위 고>의 스토리는 실제로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된 부부 각본가 사이에서 탄생했다. 번갈아 각본 작업을 하며, 오로지 매일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노력하며 완성했다고. 작품 곳곳에 설득력 있는 현실감, 따뜻한 위트가 녹아들 수 있었던 이유다. 뱃속의 아이와 함께 인생의 방향은 물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단단히 다져가는 젊은 부부의 여정은 보는 이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기 충분하다. <콰이어트 플레이스> <오피스> 등으로 유명한 존 크래신스키, <SNL>의 주역으로 활약한 마야 루돌프의 사랑스럽고 활력 넘치는 에너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 히피 부모로 변신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전한 메기 질렌할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작년 <1917>로 자신의 인생작 역사를 다시 쓴 샘 멘데스 감독의 연출작이다.


시리어스 맨(2010)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출연 마이클 스털버그, 리차드 카인드 장르 블랙코미디

제목 그대로 시리어스(Serious), 심각하다. 래리(마이클 스터버그)가 놓인 상황이 그렇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수였던 래리. 아내는 자신의 친구와 바람이 나 이혼을 선언하고, 아들은 학교에서 마리화나를 피우기 바쁘다. 딸은 성형 수술을 이유로 아빠의 지갑에 손을 대고, 낙제 점수를 준 학생과의 묘한 트러블은 그의 직장 생활에 미세한 균열을 낸다. 갑자기 한꺼번에 모든 것이 뒤바뀐 상황. 꼬인 인생의 매듭을 혼자의 힘으로 풀 수 없던 래리는 신에게 답 없는 인생의 답을 찾고 싶은 마음으로 세 명의 랍비를 찾아간다.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뼈 있는 농담으로 유명한 코엔 형제 특유의 블랙 유머가 빛을 발한 작품. 지금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더 포스트> 등 다양한 작품으로 국내 관객에게도 얼굴을 알렸지만 당시만 해도 신선한 얼굴이었던 마이클 스털버그의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코엔 형제의 대사를 더 지독하게 살려냈다. 오프닝과 엔딩이 기가 막히게 훌륭한 영화 리스트에서도 빠지지 않는 작품. 래리가 찾은 위대한 랍비들이 보는 이에게 어떤 깨달음을 전할지는 재생 버튼을 누르고 판단해보자. ‘시리어스 맨’의 인생에 불어닥친 태풍을 보는 내내, 내 인생은 이 정도임을 감사하게 느낄지도.


와일드(2014)

감독 장 마크 발레 출연 리즈 위더스푼, 로라 던 장르 드라마

자신의 몸보다 더 큰 가방을 짊어지고 고행길에 나선 여성이 있다. 불우했던 유년 시절을 지나 엄마(로라 던)와의 행복한 삶만 이어나가길 꿈꾸며 살아왔으나, 갑작스레 엄마마저 잃고 만 셰릴(리즈 위더스푼). 삶의 모든 것을 잃고 자존감이 바닥에 떨어진 그녀는 내면의 고통과 맞서기 위해 PCT를 걷기로 결심한다. 멕시코 국경부터 캐나다 국경까지, 약 4300km에 이르는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장거리 트레일 코스 PCT는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극한의 공간. 셰릴은 감정적 고통과 맞먹는 신체적 고통을 견뎌가며,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진 채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정직하고 투명한 상태로 제 한계를 넘어선 어딘가에 부딪치고 싶은 모든 이에게 큰 용기를 전할 영화. <데몰리션>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등의 전작을 통해, 캐릭터가 극한의 심적 고통을 마주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풀어내며 더 짙은 울림을 선사해왔던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연출작. 러닝타임 내내 오롯이 혼자만의 에너지로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데 성공한 리즈 위더스푼의 깊이 있는 연기에 새삼 감탄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리틀 포레스트(2018)

감독 임순례 출연 김태리, 류준열, 문소리, 진기주 장르 드라마

시험, 연애, 취업. 무엇 하나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일상을 잠시 접어둔 채 고향 미성리로 돌아온 혜원(김태리). 그는 스스럼없이 눈밭을 헤쳐 텃밭의 배추를 뜯고, 한 줌 남은 쌀로 밥을 짓는다. 끓는 물에 된장을 푼 뒤 휘휘 저어 배추 된장국을 만든 혜원은 단출하게 차려진 한 상을 후루룩 비운 뒤 바닥에 드러눕는다. 오랜 도시 생활로 지쳐있던 혜원의 삶에 살이 붙기 시작한 순간이다. “배가 고파서” 고향으로 내려왔다는 혜원은 이렇게 직접 키운 농작물로 정성스레 밥을 지어 먹으며 사계절을 보낸다.

도시의 누군가는 혜원을 낙오자로 칭할 것. 그러나 직접 땀 흘려 일군 것들로 정성스럽고 건강한 삶을 꾸려가는 혜원은 그 여느 때보다 선명한 사계절을 보낸다. 그 싱그러움에 기대어 쉴 수 있는 현대인의 휴식처 같은 영화. 혜원뿐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고향을 벗어난 적 없던 동네 친구 은숙(진기주), 대기업을 퇴사하고 고향에 정착하길 택한 재하(류준열)의 상황까지 균형감 있게 다루며 2030 세대의 고민을 녹여냈다는 점이 인상 깊다. 식사 전에 관람한다면 막걸리를 미리 준비해놓을 것.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미스 리틀 선샤인(2006)

감독 조나단 데이턴, 발레리 페리스 출연 스티브 카렐, 토니 콜렛, 그렉 키니어, 폴 다노, 아비게일 브레스린, 알란 아킨 장르 코미디, 드라마, 모험

“파산에 자살에, 전부 다 루저들”이라고 묘사되는 가족이 있다. 마약 중독자 할아버지, 인생의 모든 것을 성공 혹은 실패로 구분 짓는 아빠, 전투 조종사가 될 때까지 묵언 수행 중인 아들, 사랑에 데인 후 자살을 시도한 외삼촌, 이들을 케어하느라 바쁜 엄마. 이 콩가루 가족의 중심축이 되어주는 존재는 7살 막내딸 올리브다. 미인 대회 비디오를 보며 열심히 동작을 따라 하고 그에 심취하는 것이 취미인 올리브. 어느 날 어린이 미인 대회인 ‘미스 리틀 선샤인’의 출전 기회를 얻게 되고, 가족들은 올리브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버스에 올라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좋은 일은 함께 나누고 싶지만, 취약점만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존재인 가족. 1박 2일의 여정 동안 가족 구성원은 골고루 저마다의 사건 사고를 겪고, 그때마다 미니버스 안엔 풍파가 들이닥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퀴는 계속 굴러가니. 좌절에 무너지지 않고 말없이 서로를 지탱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포기하지 않는 콩가루 집안의 가족애가 마음을 움켜쥐는 작품. 이제 훌쩍 커 성인이 된 올리브 역의 아비게일 브레슬린을 비롯해 스티브 카렐, 토니 콜렛, 폴 다노 등 믿고 보는 명배우들이 총출동한 작품. 이들이 탄생시킨 개성 강한 루저 캐릭터들, 그들이 빚어낸 훈훈한 결말은 그저 사랑스럽다.


씨네플레이 유은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