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복수하고 싶었을 마음을 이해한다며, 이제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을 사과하라고 말하는 윤혜린(고현정)에게 박태수(최민수)는 말한다. “억울하고 분해서가 아니야. 복수 같은 건 생각해보지도 않았어. 널 갖기 위해서였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넌 내 여자니까!”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이 툭하면 ‘최민수 성대모사’라고 흉내내는 장면이 바로 이 장면이다.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한 전설의 드라마 SBS 〈모래시계〉(1995) 제19화에 나오는 이 장면은, 거친 깡패 인생을 살아온 박태수의 저돌적인 사랑고백과, 박태수를 연기하는 최민수의 흐릿한 발음의 오묘한 조화로 수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물론 ‘최민수 성대모사’를 선보이는 연예인들의 과장된 발음에 비하면 최민수의 발음은 또박또박 선명한 편에 속한다. 특히나 김준호 버전의 성대모사를 듣다가 원본을 듣고 나면 흡사 아나운서의 발음을 듣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래서 〈모래시계〉를 직접 본 적 없이 저 장면을 성대모사로만 접해 왔던 사람들에게 원본을 보여주면 누구나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렇게 또박또박 발음을 잘했는데, 왜 성대모사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심하게 발음을 흘리는 걸까? 예능용 성대모사가 웃음을 위해 실제 특징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는 걸 감안하면, 세 가지 정도의 이유가 남는다. 첫째, 최민수는 평소에 발음을 다소 헐렁하게 한다는 이미지가 강한 사람이다. 둘째, 그런 최민수치고도 또박또박 연기한 장면이지만, 그 정도 발음조차 1995년 기준으로는 그렇게 선명한 편이 아니었다. 셋째, 최민수는 실제로 〈모래시계〉를 찍는 동안 의도적으로 발음을 흘렸다.
세 번째 이유를 다소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계시리라. 아니, 왜 의도적으로 발음을 흘렸다는 건가? 그냥 자기가 발음이 안 좋은 걸 핑계대는 게 아니고? 하지만 최민수의 설명을 들어보면 이해가 간다. 그 무렵 TV 드라마에서 ‘멋진 주연’은 사투리를 쓸 수 없었다. 특히나 호남 사투리는 더더욱 안 됐다. 박태수는 좌익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나 성공의 길이 막혀버린 탓에 광주를 무대로 조직 폭력배 생활을 시작한 청년이지만, 멋진 주인공이기에 사투리를 써서는 안 됐다. 그와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했던 동료 조직 폭력배이자 〈모래시계〉 최고의 악역인 이종도(정성모)는 전남 방언을 구성지게 써도 됐지만, 악역이 아닌 박태수는 서울말을 써야 했던 것이다. 최민수는 훗날 사투리를 쓰지 않되, 표준어로는 다 살릴 수 없는 인물의 정서를 잡아내는 나름의 고육지책으로 일부러 발음을 흘렸다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광주전남에 연고가 있는 수많은 이들에게 〈모래시계〉는 다소 엇갈린 기억으로 남아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5.18 광주항쟁을 공식적으로 다룬 최초의 TV 드라마라는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작품인 동시에, 그럼에도 호남 방언을 사용하는 인물은 지독한 악역이거나 주변부 인물에 국한되어 있었던 작품. ‘호남’하면 ‘조폭’을 떠올리는 얄궂은 스테레오타입을 한층 강화한 작품이기도 한 탓이다.
그런데 그 한계가 꼭 1995년만의 일이었을까? 광주항쟁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2007)에서도 주인공 강민우(김상경)나 그의 동생 강진우(이준기), 민우의 동료 택시기사인 박흥수(안성기)와 그의 딸 박신애(이요원), 성당 신부인 김신부(송재호) 모두 유창한 표준어를 구사한다. 작품 속에서 호남 방언을 구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월남 파병을 다녀왔다며 너스레를 떠는 인봉(박철민)과 동네 건달 용대(박원상) 콤비가 유일하다. 주변부 캐릭터들은 호남 방언을 구사할 수 있어도, 조금이라도 항쟁의 중심에 있었거나 인텔리 계급에 가까웠던 사람들은 표준어를 구사하게 만든 선택. 광주항쟁을 다음 세대에 알리는 게 목적인 영화조차도 집요하게 호남의 지역성을 지운다.
비슷한 일들은 2020년에도 일어난다. 광주항쟁 40주년을 맞이해 만들어진 뮤지컬 〈광주〉 또한 항쟁의 지도부나 인텔리 계층은 똑 부러지는 표준어를, 감초 캐릭터들은 호남 방언을 사용한다. 광주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작품조차 무의식적으로 표준어를 선택하고 주변부 캐릭터에게만 제한적으로 호남 방언을 허락하는 방식으로 호남을 배제하는 아이러니. 안다. 어떤 이들은 “사투리에 대한 표준어의 언어적 횡포라면 몰라도, 호남 차별이라고 보는 건 과대해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영남 방언이 폭발하는 영화 〈변호인〉(2013)을 보면서 ‘핏줄이 당기는’ 반가움을 느꼈던 걸 생각하면, 이건 호남 차별이 맞다. 어떤 지역의 방언은 되고 어떤 지역의 방언은 배제된다면, 그게 차별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래서 다시 〈모래시계〉를 생각한다. 호남 방언을 써선 안 된다는 이야기에 어떻게든 발음을 흐려보는 식으로라도 지역색을 묻혀보려 했던 최민수의 소극적인 저항을 생각한다. 사투리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사투리를 안 쓰는 쪽을 택했다는 말을 변명이랍시고 들려주는 사람들의 게으름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식으로 제 고장의 색깔과 역사가 지워지는 광경을 목격해야 할 나의 호남 친구들을 생각한다. 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 걸까?
글 | 이승한 TV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