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그남자 만나지 마요>

“주변에 좀 괜찮은 남자 없어요?” 몇 년 전만 해도 저런 질문을 건네는 여자 지인들이 왕왕 있었다. 그럴 때면 말문이 막히곤 했다. 내 앞에선 썩 괜찮은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던 남자 지인들도, 보는 눈이 별로 없는 자리에선 아찔하게 이상해지는 걸 몇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참여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던 말간 얼굴의 청년이 알고 보니 주위 여성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노는 단톡방 죽돌이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 혹은 오랜만에 만나 점잖게 담소를 나누던 친구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겨 계속 얘기하자며 날 여성 접대노동자가 배석하는 토킹바로 데리고 가려 했을 때의 경악을 곱씹다보면 기분이 참담했다. 대체 왜들 그러고 사는가?

안 좋은 경험이 반복해서 누적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모집단 전체에 대한 신뢰가 하락한다. 썩 괜찮아 보이는 남자가 있어도, 이 남자가 정말로 어디 내놓아도 이견이 없을 만큼 괜찮은 남자인지, 아니면 내 앞에서만 괜찮은 남자처럼 구는 건지 알 도리가 있어야지. 그랬으니, 잠재적 연애 대상을 구하는 문의가 들어와도 난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었다. “글쎄요. 괜찮아 보이는 남자들은 대체로 이미 다 짝이 있더라고요.” 같은 말로 위기를 모면해보려 하면, 멀쩡하게 잘 연애하고 있는 지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짝이 있다고 다 괜찮은 건 아니고요…”라며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조용히 애인에게 연락해서 짐짓 심각한 말투로 말했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하고 있는 게 있으면 포기하지 말고 꼭 얘기해줘요.” 처음엔 어안이 벙벙해했던 애인도,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괜찮은 남자’를 찾는 사람들이 몇이라도 있던 시절이 나았던 것 같다. 이젠 아무도 내게 ‘괜찮은 남자’가 있는지 묻지 않는다. 내게 잠재적 연애 대상을 구하던 이들이 죄다 괜찮은 짝을 찾아서 그런 거라면 참 다행인 일이겠으나, 현실은 ‘괜찮은 남자’라는 기준선을 낮추고 또 낮추다가 지쳐서 그만 남성 전반에 대한 희망이나 연애에 대한 미련을 놓아버린 쪽에 가깝다. 이런 분위기를 아직 못 읽으신 분들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요즘 청년들이 삼포세대니 오포세대니 하면서 연애도 포기한다는데, 그게 다 좋은 일자리가 없어서 아니겠느냐”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럴 때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조용히 덧붙이는 것이다. “그것도 있는데요, 그게 전부는 아니고요…”

MBC every1 드라마 <제발 그남자 만나지 마요>가 그리는 세상이 딱 그렇다. 펠리컨전자 유비쿼터스 혁신개발팀 과장 대행 서지성씨(송하윤)는 신형 냉장고에 탑재될 AI ‘장고’를 개발하는 프로그래머다. 사용자가 간단한 유저 데이터를 입력하면, ‘장고’는 그 유저 데이터와 냉장고 속 식자재의 신선도를 분석해 최적화된 메뉴를 추천해줘야 한다. 그런데 대체 무슨 버그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지는 몰라도, 음식이 상했는지 알려줘야 할 ‘장고’가 갑자기 주변 남자들이 상했는지 아닌지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남자친구에게 가장 잘 어울릴 만한 다음 끼니를 추천해 달랬더니, 이 정신나간 AI가 남자친구의 신용카드 사용내역, 메신저 대화 내용, SNS 피드 업데이트, 통장 잔고 입출금 내역 등 도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긁어온 건지 알 수 없는 개인정보들을 긁어와서 친절한 목소리로 브리핑해주는 게 아닌가?

대체 코드의 어느 구석에서 이런 버그가 생겼는지 몰라 당혹스럽고, 누가 봐도 위법한 개인정보 데이터 마이닝의 결과로 보여서 충격적인데, 그런 와중에도 지성의 눈을 사로잡는 정보가 있었으니 바로 남자친구의 정체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남자친구 정한(이시훈)은, 알고 보니 자기 집에 설치해 둔 보안용 웹캠 영상을 몰래 빼돌려서 단톡방에 뿌리며 시시덕거리던 성범죄자였다. ‘장고’가 브리핑해 준 정보 덕분에 끔찍한 남자와 결혼하는 일을 간신히 피한 지성은, 버그를 잡으려고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론 자꾸 ‘장고’를 사용하고 싶은 욕구를 누르지 못한다. 불법 사찰인 것도 알고, 고쳐야 할 버그인 것도 아는데, 못 믿을 남자가 너무 지천에 널려 있는 세상인 탓에 ‘장고’의 신통함을 빌리고 싶은 순간들이 닥쳐오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제발 그남자 만나지 마요>를 시청하는 건 참 난감한 윤리적 딜레마를 경험하는 일이다. 사람들을 불법 사찰하는 ‘장고’의 존재를 용인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걸 자꾸 사용하고 싶은 지성에게 내심 동의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흉흉하고 그 중에서도 사람이 제일 흉흉하니, 그렇게 해서라도 횡액을 피해갈 수 있다면 다행 아닌가 생각하다 보면 기분이 참담하다. 내가 어쩌다가 차라리 ‘빅브라더’가 등장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그러니까 다들 좀 알아서 점잖게 나이 먹으려고, 더 괜찮은 사람이 되려고, 흔쾌히 믿을 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면 좀 좋나? 냉장고 따위에 사찰 당하기 전에, 자성과 갱생 정도는 셀프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승한 TV칼럼니스트